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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 통권 159호     필자 : 张远来(장위& 프린트   이메일 
[오늘의 중국교회]
우리가 남긴 “낡은 가죽부대” - 중국교회의 저열한 근성을 반성하며
(那些年我们留下的旧皮袋—反思中国教会的劣根性)


누가복음 5: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기독교 중국 전파 200여 년 동안 특수한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사건으로 중국교회는 여러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그중에는 사회적 수용이 가능한 건전한 내용도 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못해 신앙과 인간 의지가, 혹은 동서양 문화가 혼재한 “낡은 가죽 부대”도 있다. 이런 “낡은 가죽 부대”는 교회의 건강한 발전에 크고 작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본고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가르치신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우리의 발전을 저해하는 몇 가지 “낡은 가죽 부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신앙의 실천보다는 개인의 영성 체험만을 구하다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들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씀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기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미국 헌법이 만들어지고 노예해방운동 일어났으며 모세 십계명 후반부에 도덕적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인류 보편적 가치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앙을 현실에 적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는 구원을 받는다”는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바뀌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이는 우리가 신앙의 사회적 실천보다 개인의 영적 체험을 지나치게 추구한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 신앙생활에서 개인의 영적 체험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신앙인은 교회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사회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신앙은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라 사회실천적 이다.
 

과거, 기독교의 중국 전래는 배척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 시작되었고 유입 후에도 교회의 생존환경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바늘구멍과 같이 협착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중국교회는 오랫동안 개인의 영적 체험만을 추구하고 신앙의 사회적 실천을 구하지 않는 타성적 사유가 형성되었다. 심지어 사회실천을 추구하는 신앙은 사회복음주의라고 오해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영적 그리스도인일수록 사회 밖으로 분리되어 나가고 신앙이 깊을수록 영성만 강조하는 괴상한 사람이 되었다. 바로 이점이 우리의 신앙이 왜 시종 자신의 틀 속에 갇혀 밖으로 뻗어 나갈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목회의 결과를 숫자로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외적인 성과를 목회와 치리의 성취로 나타내고자 노력한다. 현대교회는 갈수록 대형화되고 있지만, 영성은 오히려 텅텅 비어간다. 한 번은 교황과 신학자 아퀴나스가 교회의 물질에 대해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교황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금과 은은 없어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부유한 교회의 겉모습 뒷면에 가려진 내적 빈곤을 잘 나타낸다.
 

예배당의 존재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예배당은 외형적인 부호로써 내재적 신앙의 함의를 나타내는데 예배당 자체의 신성성과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는 이유는 성도들의 종교 활동에 편리함과 신앙문화의 번영을 위해서이며 성도의 신앙생활을 위해 편안하고 편리한 플랫폼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예배당은 사회 문명의 척도 가운데 하나이다. 서방의 기독교에 의해 그들이 교화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가 부흥된 곳일수록 물질과 정신 문명이 더욱 발달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큰 예배당이 있는 곳은 훗날 대도시로 성장하여 문명과 진보의 표지가 되었다. 따라서 예배당의 존재는 사회나 성도 모두에게 긍정적인 발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만약 화려한 예배당의 건축만을 추구하고 생명의 교회를 세우는 데 소홀한다면 본말이 전도되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게 된다. 기독교는 예배당이 없어도 전파되지만, 예배당만 있고 내실이 없는 교회는 종교형식에 신앙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유형의 재물을 쌓느라 교회의 사명을 잃다
사도교회와 초기 서방교회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교회 발전의 목표로 삼은 것과는 달리 중국교회는 많이 받았지만 헌신은 적었다. 교회는 자선과 선교의식 모두 부족했다. 200년 역사의 교회가 규모 있는 선교를 하지 않은 것은 2000여 년의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참으로 드문 일이라 하겠다. 오늘날 서방교회와 한국교회가 모두 몰락하고 있지만 그들은 교회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지상명령을 최우선적인 사명으로 감당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교회가 선교를 위한 예산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교회는 물질이 쌓여도 복음 사역의 개척에 사용하는 비율이 매우 낮고 심지어 복음전도 사업예산을 아예 책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 예배당의 화려함, 그리고 헌금과 신도 수이다.
 

물론, 중국교회가 선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교회의 선교는 대부분 개인의 신앙 간증에 있으며 상업 활동과 가정모임을 통해 전개된다. 교회역사 2천 년 동안 형성된 교회조직이 교회의 사역으로 전개하는 조직적이며 목적과 계획이 있는 선교활동과는 다르다. 중국교회의 선교는 대부분 자발적이며 개별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교회 보편적 사역이나 연합적 사역이라 할 수 없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지상명령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또 교회가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질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교회는 대단히 많지만, 그에 준하는 국제적 영향력이나 지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필자는 중국교회가 국제적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의 말씀만을 구하고 가르침의 말씀은 받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성도 각자는 매우 경건하다. 그러나 이런 경건은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나타난 것이지 구원의 도가 공동체생활 가운데 실현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개인의 구원은 강조하면서도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생활 실천 원칙은 간과한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 생활에서는 잘 구현되지만 사회실천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말씀에 합한 공동체생활 원칙은 교회관리나 개인 구원처럼 중요하며 심지어는 더 중요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종종 하나의 전체로 보셨는데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라는 말씀은 사람을 공동체 속에 두고 하신 말씀이며 개인의 공동체 실천을 개인의 영적 성장을  가름하는 지표로 삼으신 것이다.
 

성경이 계시한 공동체생활과 관리에 대한 말씀은 개인 수양에 대한 가르침보다 훨씬 많다. 선지자가 사회의 죄악을 비판할 때 이는 공동체 전체의 문제였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합한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자질을 관리하는 일을 잘 강조하지 않는다. 교회치리는 대부분 지도자 개인의 의지로 결정하거나 사회제도로부터 가져온 관리수단을 사용한다. 일부 교회는 당 위원회가 만든 당 위원회 주임이 교회를 관리하며 교회 성직자는 당 위원회의 고용인에 불과하다. 원저우(温州)와 일부 남방교회가 바로 그렇다. 그래서 교회 목회자는 개인의 능력으로 일하거나 혹은 자신감이 부족한 상태로 목회를 감당한다. 반면, 어떤 곳은 큰 교회에서 담임목회자 혼자서 알아서 처리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의 관리기구는 거짓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곳은 상급기관이 너무 강해서 교회의 재무와 인사, 심지어 성직 안배까지 관여한다. 교회는 자신의 주관 능력을 잃어버리고 복잡한 관료조직으로 퇴색하였다. 물론 어떤 교회에서든 관행이 형성된 원인이 있으며 교회의 관리도 천편일률적 일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기본적인 원칙은 있는데 그 원칙은 바로 성경의 권위, 하나님 중심, 성도의 통합으로 각각 그 맡은 바 직무를 다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다.
 

가난할수록 거룩해진다는 말은 직장과 증인된 삶을 갈라놓는다
어쩌면 과거 선교사들이 중국의 일반 백성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가 한때 가난한 사람들의 요양원처럼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가난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하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다”라는 그 말씀에 근거하여 현실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와 자족의 마음을 갖도록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자만하거나 놀고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족은 마음의 상태이며 무엇을 추구한다는 것은 책임이다. 자족은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최대치를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지 타인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에 대해 우울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라도 진보적 투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나누어주는 비유에서 받았으면 노력해서 더 모으라고 하신다. 은사를 발휘하여 더 큰 가치를 만들어 내라고 하신다.
 

우리가 가난할수록 거룩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직장과 그리스도인의 증인된 삶을 분열시키게 된다. 실제로 직장은 우리가 섬기는 무대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경건함을 보지 않는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품격과 성취이다. 가난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 가난은 때로 극단적인 믿음이나 직장에 대한 무지, 제도적 결점이나 도덕적 결함 등에게서 온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신앙을 가졌으면 그런 사회적 지위를 가진다. 당신의 신앙이 완전하면 당신은 더욱 완전할 것이고 당신이 탁월함을 추구하면 당신은 더욱 탁월해질 것이다. 당신이 가난함을 거룩하다고 한다면 당신은 가난해질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잘못된 직업관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속 이원론, 신앙이 생활에서 분리되다
앞에서 제기했던 문제, 즉 중국교회의 성도 수에 비해서 중국교회의 국제 종교계와 국제 사회, 그리고 중국 사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현상의 본질적 원인은 중국이 영속 이원적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세상이 대립하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은 세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취로 사회에 영향을 주는 동력을 잃었다. 그리고 신앙과 사회 생활이 분리되고 교회와 사회가 분리되었다. 우리는 교회를 마당 깊이 감추어 두었다. 우리는 더 깊이 숨을수록 더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더 멀리 떠날수록 성결해진다고 믿었다. 세상과 멀어지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다는 의미는 세상과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다. 세상을 등지는 것을 거룩하다고 할 수 없고 그런 거룩함은 필요 없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성경의 가치관이지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다. 성경의 생활방식을 배우는 것이지 세상의 생활방식이 아니다. 성경의 가치관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고 문화적으로 포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는 증인 된 삶에서 얼마나 떠나 있는 것인가라는 말이 된다.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삶이다.
 

영속 이원론은 사단에게 세상 사람들을 갖다 바치도록 하고 이 세상이 사단의 것이라고 믿게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단은 이겨본 적이 없다. 진정한 주권은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취사선택하면 된다. 선진 기술과 현대화된 수단은 본래 중성적인 것이지만 어떤 곳에 사용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인터넷으로 유언비어를 퍼트릴 수 있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도 있다. 당신이 이 세상을 영속 이원론으로 결정할 때 원래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복음전도의 경로를 잃게 된다. 거룩함은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성직 분화와 전도자 직분이 불분명하다
전도자는 신이거나 종이다. 전도자 신분을 즉시 인정함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어떤 지역은 전도사가 흡사 하나님과 다름이 없는 최고의 대표로 여겨지며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임의로 교회를 지휘할 수 있다. 어떤 교회는 기본적인 재무관리도 없어 봉헌을 아예 전도자에게 한다. 혹은 봉헌한 재무를 모두 전도자가 알아서 처리한다. 그는 생활비 명목으로 “아랫사람”에게 사례비를 마음대로 줄 수 있다. 교회의 도장이 교회에 있지 않고 그들의 호주머니 안에 있다. 그들은 교회의 도장과 영수증을 어디든지 지니고 다닌다. 어떤 제제나 제약으로 그들의 행위를 제한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떤 지방 교회는 전도자가 교회의 종이다. 교회는 전도자에게 함부로 지시하고 교회 권력의 주체인 개인의 결정에 따라 좋든 나쁘든 전도자의 대우가 정해지고 청빙 여부가 결정된다.
 

전도자를 “신”으로 여기든지 상징적 의미의 교회 목자로 여기든, 아니면 교회에 고용된 하인으로 여기든 그 배후에는 전도자에 대한 잘못된 기대, 즉 전도자가 그 신분과 직분에 부합되지 않은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전도자도 전도자이기 전에 “사람”이다.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죄성을 가졌으며 나약한 인간이다. 그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일체의 필요를 요구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또 “전도”자이다. 그(그녀)는 하나님과 사람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시종이다. 전도자의 직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 속에 나타남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에게는 거룩한 권세와 권위가 필요하다. 전도자에 대한 잘못된 기대는 스스로의 인식에 기초하며 전도를 빌미로 자신의 필요를 만족하게 하려는 잘못된 욕심이다. 우리가 전도자 직분에 대해 오해할 때 우리는 정확하지 않은 기대를 하게 되고 심지어 우리 자신도 매우 모호한 기대를 하게 되어 교회와 전도자 사이의 긴장감을 일으킨다.

 

 

출처 | http://blog.sina.com.cn/u/2322758050
번역 | 박다혜 ·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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