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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1 통권 147호     필자 : 유관지 프린트   이메일 
[특집] - 故 방지일 목사님과 중국선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하면서 해야 하지요”
1981년(당시 70세)의 방송 대담


1979년 중국의 개방정책으로 중국 성도들의 편지가 대중국선교방송에 힘쓰고 있던 극동방송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방송사에서는 공산화 이전에 중국에서 사역했던 분들을 초청하여 연속 대담 특집을 마련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고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한 대담을 추모특집에 싣습니다.

이 대담은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재개 초기에 행해진 것이고, 중국선교에 대해 방 목사님께서 직접 하신 증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원고를 정리하면서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을 누를 수 없었습니다. 이 대담은 33년 전인 1981년에 했으며(일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당시 고 방지일 목사님은 70세로서 영등포교회 담임목사직에서 막 은퇴하셨습니다.

이 대담은 번문화(飜文化)되어 《월간목회》1982년 6월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대담진행자는 전영실(全英實) 아나운서(현 미국 거주)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중국에 가신 것은 언제의 일인가요?
1937년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면서, 남에게 받았으니 우리도 이제는 갚아야 한다는 취지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고 1915년에 저희 가친(家親: 방효원 목사님)을 파송하셨어요. 그래서 가친께서 한 20년 선교를 하셨고, 그 다음에 제가 1937년에 2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귀국하신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요?
1957년 9월 23일에 귀국했습니다.

20년 넘게 선교활동을 하셨군요. 산동성에서 일하셨지요?
우리 총회가 선교를 정할 때, 미국교회․중국교회와 협의해서 공자․맹자가 난 중국 문화의 발상지 산동이 좋겠다고 해서 산동성 내양(萊陽)을 중심으로 40여 년간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 지역의 모습, 눈에 선하시지요? 또 교인들의 모습도 그렇겠고요, 그때 교인들이 얼마나 되었는지요?
20여 년 거기 있었으니 눈에 선합니다. 기도드릴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같이 일하던 동역자들, 세례 준 교인들, 세운 교회, 믿음의 식구들입니다. 그때 중국의 교인이 모두 200만 가까이로 모였는데 선교지 안의 교인이 3천 명 안팎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파송을 받아간 목사님들은 몇 분이나 되셨나요?
아버지와 같은 때에 파송되었던 분들이 몇 분 계셨고, 저는 이대영(李大榮) 목사님하고 같이 있었어요. 이 목사님은 1948년에 돌아오셔서 작고하시고, 저 혼자 10년 동안 있다가 마지막으로 돌아왔어요. 

사님께서 처음 가셨을 때의 형편은 어떠하였는지요?
처음 가보니 선교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어요. 산동은 문화의 중심지이면서도 공맹(孔孟)의 도가 난 곳이라 거만한 사람들도 있었고, 유교의 성지라고 해서 전도하기가 어려웠지요. 그러나 믿기만 하면 성령의 감화로 뜨거워졌어요. 성경에도 친근하게 접근했고, 그건 참 좋게 생각되더군요.

그때 중국의 형편이 어려웠을 때라고 알고 있는 데요.
한 20년 있는 동안에 정변(政變)이 다섯 번이 났으니, 피난 다니면서 일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던 해 가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것인데, 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蘆溝橋)사건, 천진 교외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전쟁이야 여러 번 겪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배일자(排日者), 항일자로 몰아서 헌병과 경찰에게 시달림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 원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 목사들에게 있었어요. 미국 사람들을 다 포로로 하고, 외국선교사들이 활동이 다 제한되니까 자기네들이 다 한다고 해서 동아선교회라는 것을 조직해서 다 흡수해서 하려고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굴었어요. ‘같은 성직자인데 이럴 수가 있나….’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목회기록을 해 달라고 해서 좀 자세하게 썼습니다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있었던 반면에 기쁘고 흡족했던 일도 많았었겠지요?
한국 목사님들이 선교를 하는데 의료기관이나 교육기관 같은 것은, 또 구제기관 같은 것은 경제적인 힘이 없어서 운영하지 못했지만 중국 사람과 같이 호흡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눴다는 것이 즐거운 회상거리입니다. 그때 제가 사도행전을 강해했는데, 많은 난민들과 함께 죽을 쒀 먹으면서 같이 먹고 수천 명과 같이 자면서 성경을 공부하던 일이 기억납니다. 참 어렵던 시기지만 신령한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때처럼 살뜰하게 나눈 적이 없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참 깊은 감명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들이 많을 텐데요.
공산당이 들어 온 다음에 사방에서 난민이 몰려오는데 우리 동포들도 수만 명이 저 있는 곳으로 몰려 왔어요. 공산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자꾸 몰려오는데, 우리 동포들은 그곳에서는 외국인이니까 아무래도 더 신경을 써서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인들을 위해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중국 교인들이 와서 울더군요. “우리 목사님인줄 알았는데 역시 한국 사람들을 위한 목사님이로군요.” 하면서 말이에요. 저도 울었어요. 울면서, “조금만 기다려라, 이 분들의 형편이 좋아지면 여전히 여러분과 같이 지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지금도 그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사님께서 돌보시던 교회들, 이름이 기억나시는지요?
그 안에 노회가 셋이나 되었으니, 교회가 많았지요. 30여 개 되었어요. 그 가운데 제가 세운 교회가 넷인데, 둘은 예배당까지 지었고, 공산당이 들어 온 다음에 놓고 왔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즘 중공 안에서 몇 개의 교회가 문을 여는 등 퍽 고무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목사님 소감은 어떠세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죠. 중공 안 교회의 최근 소식은 잘 듣고 있습니다. 20대 청년들이 찬송을 부르고 눈물 흘리며 예배드리는 모습을 사진에서 보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1949년에 중공이 공산화되었는데 그때는 출생도 안했던 사람이, ‘예수’ 이름도 못 듣던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저는 거기서 몇 십 년을 지냈으니 짐작이 가는데 신자들이 전전긍긍하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전하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해가 돼요. 저는 그분들을 위해서 묵묵히 기도하고 있거니와 기도밖에는 할 것이 없어요. 중공 내 신자들도 이런 요청을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조금 문이 열렸다고 해서 너무 날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하면서 조심하면서 지혜롭게 해야지요. 방송선교 외에는 시기상조인 줄로 압니다. 

목사님을 아는 분들이 이 방송을 듣는다면 무척 반가워하실 것으로 생각되는 데요.
제가 있던 산동 일대는 전부 중국 사람이니까 이 방송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고, 동북 지방에 있는 수백만 동포들 가운데 저를 아는 분들이 있겠지요.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잘 지내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목사님, 중국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새로운 빛이 이만큼 비취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 빛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찾고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며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이곳의 형제들로 하여금 은혜와 지혜로움 속에서 하나님 속에서 연결되게 하소서. 저희 동포들의 신앙이 모범적이어서 중국 형제들이 한국교회를 칭찬하며 한국교회로 모인다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축복해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1980년대 초반의 용어에 따라 ‘중공’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당시 극동방송 전도국장으로 중국선교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고, 현재는 본지 발행인인 유관지 목사님께서 자료를 제공하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_편집자 주



유관지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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