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jpg) 지난 호에는 근대 중국에서 제일 처음 교회를 세운 슈크 목사(Rev. Jehu Lewis Shuck, 叔末士, 1812-1863)에 대해 소개했었다. 이번 호에는 슈크 목사의 동료인 미국침례교 선교사 로버트 목사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로버트 목사는 중국 근대 기독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경험을 가진 선교사이다. 첫째, 그는 제일 처음 홍콩에 상륙한 외국선교사였다. 둘째, 그는 중국 본토에 제일 처음으로 침례교 교회를 세웠다. 셋째, 홍콩과 광동지역에서 집이 없어 배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단후(蛋戶)라고 부르는데, 이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였다. 넷째, 중국 근대에 가장 큰 사회적 반란을 일으켰던 태평천국의 영도자 홍수전(洪秀全)이 로버트 목사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여서, 로버트 목사도 이 태평천국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로버트 목사와 홍콩선교 로버트 목사(Issachar Jacox Roberts,羅孝全, 1802-1871)는 1802년 2월 17일 미국 테네시(Tennessee) 주의 하촌(Summer Country)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살이 되던 1821년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베드포드(Bedford)의 침례교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그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South Carolina)의 푸만 신학교(The Furman Theological Institution)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 로버트 목사는 가정형편이 부유한 편이어서 중국선교를 위해 특별히 3만 달러를 헌금하여 로버트중국전도회기금 (The Roberts Fund and China Mission Society)를 조직하였다. 로버트 목사는 1827년 4월 27일 테네시 주의 셸비빌(Shelbyville)에서 로버트기금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830년 1월 4일 조지아(Georgia) 주에서 브랜차드(Barsha Blanchard)와 결혼하였지만, 그 다음 해에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별의 아픔을 겪었다.
로버트 목사는 미국에서 우연한 기회에 귀츨라프(Rev. Gutzlaff) 목사의 선교 보고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36년 가을에 그는 로버트기금회의 중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1837년 5월 1일에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하여, 귀츨라프 목사와 슈크 목사와 연결하여 많은 도움을 받으며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마카오에서는 천주교도들과 마카오 당국의 방해로 전도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은밀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거나, 한센병 환자들에게 전도하는 정도였다. 그 당시 한센병 환자들의 피부는 보기에 매우 흉측할 정도로 문드러져 있어서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로버트 목사는 5년 동안 이들을 돌보면서 중점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로버트 목사가 한센병 환자들에게 이와 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는 예수님 이외에는 모든 만물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이 말에서 그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자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1841년, 로버트 목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또한 단독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많은 한계에 부딪힌다. 그는 결국 미국침례교 해외선교부(The Baptist Mission)에 가입하여, 남 침례교(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842년 2월 16일 아편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중국은 많은 손해배상을 지불하고, 또 홍콩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그 뿐 아니라 광저우(廣州), 시아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뽀(寧波)와 상하이(上海)등 5개 항구를 부분적으로 개방해야만 했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서방 열강들의 침략과 수모를 겪어야 했지만 한편으로 이 아편전쟁은 중국선교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동남아에서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서방 선교사들은 홍콩과 5개 항구가 개방되자, 사역지를 홍콩과 개방된 5개 항구로 옮겨와 중국선교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로버트 목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화영국전권대사 포틴저(Henry Pottinger)가 정식으로 홍콩을 자유항구로 발표하자,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선교지를 옮겨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 보다 며칠 후인 3월 3일 천주교 신부 요셉(Theodore Joseph : 若瑟)이 홍콩으로 이주하였고, 같은 미국침례교 소속인 슈크 목사는 3월 18일에 부인과 함께 홍콩에 도착하여 로버트 목사의 선교사역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로버트 목사는 중국 근대에 서방 선교사 중에서 제일 처음 홍콩에 도착하여 선교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홍콩에 도착해 처음에는 슈크 목사가 개척한 황호우따오 교회(皇后道?會, Queen’s Road Baptist Church)에서 동역하다가, 슈크 목사와 불화로 교회를 떠나 홍콩의 남쪽 시골로 가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과 촌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로버트 목사의 홍콩사역은 중국인들보다는 영국 군인들과 홍콩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이 주로 선교의 대상이 되었다. 개방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영국인들을 위한 목회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 목사의 홍콩사역은 순탄하지 않았고, 만족할 만한 효과도 없어 귀츨라프의 권유로 2년 후 광저우로 선교지를 옮겼다.
로버트 목사와 단후선교 1844년 5월 15일, 로버트 목사는 홍콩을 떠나 광저우로 선교지를 옮겨와 홍콩에서와는 달리 중국인 전도에 주력하여 중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중국인 거주지로 이사도 하고 중국인 복장도 즐겨했다. 그 당시에는 청 정부가 외국인들을 감독하기에 편하도록 외국인들의 거주지를 제한했기에, 외국인들은 행동과 생활에 제약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외국인들 거주지를 떠나, 중국인들 사이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중국인들과 접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외국인 거주지를 떠나 중국인들 사회에 거주하며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한 외국인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인 7명이 기독교에 귀의하고 로버트 목사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광저우의 난관(南關) 동스좌오(東石角)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교회 이름을 위에동침례교회(?東浸信會)라 명명하였다. 이 교회는 중국 근대에 중국본토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침례교 소속의 교회로 이후 중국 남부의 침례교 활동에 주요한 전초기지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 당시 광저우 지역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가운데 배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단후(蛋戶)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광저우 지역의 특유한 생활문화 현상이었다. 로버트 목사는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선(福音船)까지 마련하는 등 이 단후사역을 적극 추진하였다. 로버트 목사의 사역을 보면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많은 부담을 가졌던 것 같다. 얼마 후 슈크 목사가 홍콩에서 광저우로 이주하자 로버트 목사는 슈크 목사와 중국인 전도사 양칭(楊慶)과 협력하여 광주 리엔싱지에(聯興街)에 건물을 임대해 “제일침례교(一號浸禮敎)”라는 교회를 세웠다. 1845년 슈크 목사가 양칭을 데리고 미국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로버트 목사가 이 교회까지 운영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영국에게 패하여,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중국인들의 배외 감정이 고조되어 선교활동이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특히 1846년 영국정부는 난징조약의 규정대로 영사관 직원들이 광저우에 입주할 수 있도록 청나라 정부에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소식이 민중들에게 알려지자, 민중들의 분노를 일으켜, 대규모 배외 운동이 일어났다. 동스좌오의 위에동침례교회는 민중들의 공격의 목표가 되어 파괴되고, 로버트 목사가 구입한 복음선까지 민중들에 의해 완전히 파손 되었다. 민중들의 폭동이 날로 심해지자 선교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생명과 재산의 위험까지도 보장할 수 없었기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광저우를 떠나 다른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로버트 목사는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선교의 기회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리엔싱지에의 제일침례교는 화가 미치지 않아서 그는 광동지역의 전도활동을 계속하고, 1949년에는 광저우 민중들의 풍파로 파괴된 동스좌오(東石角) 교회를 다시 회복하여 복음전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니, 그의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사명감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이 간다.
로버트 목사와 태평천국(太平天國) 로버트 목사는 문서선교와 출판활동을 특히 중요하게 여겨서, 항상 작은 전도 책자들을 배포하면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로버트 목사는 미국침례교의 중국선교에서 문서선교를 처음으로 시작한 선교사이기도 했다. 그가 출판인쇄한 작은 전도 책자가 무려 19만 1,258권에 이른다. 로버트 목사는 그만큼 문서 활동을 중시했다. 그의 열정을 알아본 많은 중국인들이 그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1847년 로버트 목사가 광저우에 거주하며 전도활동을 할 때, 태평천국의 영도자 홍수전이 그의 사촌동생 홍런간(洪仁?)과 함께 그를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매일 2시간 씩 성경말씀을 배우고, 암송하였다. 홍런간은 얼마 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홍수전은 3개월 동안 수업을 받고 세례까지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로버트 목사는 그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세례는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수전은 꿈에서 자기가 백발노인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예수이고, 자기는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칭하였다. 로버트 목사는 그의 신앙이 문제가 있다고 보고, 세례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홍수전은 로버트 목사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기독교 신앙의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1847년 홍수전은 광저우를 떠나 광시(廣西) 화시엔(花縣)에서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하여 민중들을 소집하고 세력을 확장하다가, 1850년 광시지역에 가뭄과 황충의 재난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극심히 어려울 때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칭하였다. 태평천국의 세력은 파죽지세로 중국 남부지역을 장악하여 3년 만에 난징(南京)까지 점령하였다. 그들은 난징을 티엔징(天京)이라 칭하고, 태평천국의 수도로 정하고, 홍수전은 천왕(天王)으로 등극하면서 계속 북상하여 청 정부를 위협하였다. 청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하던 중 다행히 정궈판(曾國潘)이 시양군(湘軍)을 조직하여 태평천국과 대항하여, 1864년 난이 일어난 지 15년 만에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였다. 비록 태평천국은 평정되었지만, 청 정부는 내유외환으로 국력을 탕진하여 국가의 존망이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1847년 8월 20일 로버트 목사는 6년 동안 소속해 있던 미국 남 침례교 해외 선교부(The Board of Mission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를 떠나, 선교회의 소속이 없이 단독으로 선교활동을 해야 했다. 1849년 2월, 로버트 목사는 미국에 돌아가 재혼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부인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계속 하였다. 이번에 다시 중국에 오면서 남 침례교 해외선교부와의 관계를 회복하였지만, 1851년 10월 8일 다시 남 침례교를 떠나, 홍콩으로 선교지를 전환하였다. 로버트 목사의 성격이 개성이 있어서 선교본부 또는 동료선교사들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여 주로 팀 사역보다는 단독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선교적인 사명은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아 한센병 환자와 가난한 단후들을 상대로 선교할 수 있었다. 로버트 목사는 홍콩에서 햄버그 목사(Rev. Hamberg)로부터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일으켜, 그 세력이 벌써 진링을 장악하고 계속 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청나라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별히 햄버그 목사는 홍수전이 밀서를 보내 로버트 목사를 진링(金陵)으로 초청하여 국사를 논하고 싶다는 소식을 전했다. 로버트 목사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매우 흥분하여 만약 태평천국이 성공하면, 중국에 합법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태평천국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태평천국 본부와 긴밀한 연락을 시도하였다. 1853년 7월 13일 마침내 로버트 목사는 북상하여 난징에 가서 천왕 홍수전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청나라 정부군의 감시가 심해서 실패하였다. 그는 광저우에 돌아와 계속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태평천국의 사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56년 로버트 목사가 광저우에 돌아와 목회할 때는 마침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여 중국을 공격하려는 시기였다. 영국은 1842년 중국과 난징조약을 맺고 5개 항구를 개방하면서 많은 무역상의 이득을 취했지만, 상하이 이북의 중국영토가 아직도 개방이 안 된 상태여서, 중국정부에 조약의 수정을 요청하였지만 청 정부는 거절했다.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무력으로 중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제 2차 아편전쟁을 도발하였다. 특히 광저우는 청나라가 서방무역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무역항이므로 전쟁분위기가 어느 항구보다 농후했다. 영국군함은 난관 일대를 포격할 계획으로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을 때, 난관 지역의 주민들이 로버트 목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로버트 목사에게 영국군 함장과 교섭하여, 무고한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로버트 목사는 이를 쾌히 승낙하고 영국군 함장에게 주민들의 걱정과 염려를 전달하고, 폭격계획을 취소해주도록 간곡히 부탁하였다. 영국군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계획을 취소하고 폭격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마침내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로버트 목사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버트 목사와 광저우지역 주민들은 한층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1860년 10월 13일 로버트 목사의 오랜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는 무사히 난징에 도착하여 천왕을 배알하였다. 천왕은 그를 반갑게 맞아서 국무조리(Assistant to the Chief Minister of State, 國務助理)로 특별 임명하여 외교대신(Minister for Foreign Affairs, 外交大臣)으로 활약하도록 하였다. 로버트 목사는 황색관복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쓰고, 태평천국의 정무에 참여하였다. 그가 태평천국을 지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태평천국이 성공하면 중국이 기독교화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태평천국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갖고,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 많은 선교사들이 와서 중국을 복음화할 것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그가 12월 4일 미국침례교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형제들이여, 지금 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빨리 중국에 와서 중국인들을 구하자.” 고 간곡히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료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고 간왕(干王) 홍런간과의 불화로 15개월 정도의 태평천국 관료생활을 청산하고 상하이로 피신하였다가 광저우로 돌아갔다. 그는 상하이에서 베이화지에바오《北華捷報》에 태평천국에 대한 과거의 입장을 완전히 번복하여, 태평천국의 영도자는 종교적인 미치광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그들의 목적은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정권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광저우에 와서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며 계속해서 태평천국을 비난하였다.
그 후부터 로버트 목사는 비록 상해 등을 방문하며 전도를 했지만, 원칙적으로는 광저우에 근거지를 두고 활약하다가, 1866년 미국으로 돌아가 노년생활을 보냈다. 그가 젊었을 때 마카오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접촉하며 복음전도를 했었는데, 아마 그때 감염 되었던 것이 오랜 잠복기간을 거쳐 그의 노년시기에 발병한 것 같다. 1871년 12월 28일 미국 일리노이 주의 유퍼 알톤(Upper Alton, Illinois)에서 한센병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부름을 받았다. 그가 임종 시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유언은 그가 일생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며 한센병 환자나 빈민층의 단후들에게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었다.
맺는말 중국에서 30여 년 선교사역을 한 로버트 목사는 초기 선교사들 중에 보기 드물게 자비량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물론 중간에 미국침례교에 가입은 했었지만, 그의 개성이 강한 성격은 팀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침례교를 떠나 대부분 단독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 뜨거워 선교사들 중에서 처음으로 한센병 환자들과 빈민층인 단후들에게 용감하게 전도하였고, 또 가장 먼저 중국인들 사회에 들어가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용기도 발휘할 수 있었다.
특히 로버트 목사와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과의 관계는 특수하여서 로버트 목사는 태평천국을 중국복음화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태평천국에 적극 참여하여 홍수전의 신앙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중국을 복음화 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의 영향력에 한계를 느끼고 태평천국을 떠나 광저우에 돌아와 태평천국의 비리를 폭로하고 이를 맹렬히 비난하게 되었다.
1864년 태평천국이 정궈판이 이끄는 시양군에 완전히 섬멸되고, 중국은 15년 동안의 긴 내란을 평정하고 마침내 평온을 되찾았다. 1866년 로버트 목사는 노후로 근30년 동안 몸 바쳐 선교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 은퇴생활을 하던 중 한센병이 발병해 1871년 일리노이 주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영원한 부르심을 받았다.
강인규 | 대만 중원 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