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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4.28 통권 143호     필자 : 김인주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복음의 섬 제주, 중국인 사역
제주에 복음이 들어오다

제주 복음 특별자치도
제주도는 특이한 지역이다. 대한민국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라고 말하기도 한다. 배나 비행기를 타고서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나 자연환경이나 문화가 뭔지 이색적인 느낌이 든다는 생각도 들어 있다. 복음의 관점에서는 어떠한가? 현재 통계를 보면, 제주도민 60만 명 중에서 개신교인은 7% 정도, 천주교인은 10% 가량이라고 한다. 기독교신앙의 측면에서 제주는 한국에서 가장 뒤떨어진 지역이라 판단된다. 복음을 수용하기에는 척박한 환경이었던 것일까? 

제주인이 처음으로 복음을 수용하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복음서의 비유 가운데서 잘 알려진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개해 보자. 가장 큰 변수는 씨의 내용이나 상태가 아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수준이나 열정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씨가 어디에 떨어졌느냐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 따라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제주인의 기본 정서를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조선 시대에 제주 주민들은 섬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묶여 있었으며, 섬 전체가 귀양지로 활용되는 절해고도였다. 권좌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마지막 몇 해를 제주에서 보내야 했다. 청에게 굴복한 이후, 임금 인조와 조정은 폐주를 강화도에 두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더욱 고립시키기 위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가 숨을 거둔 날은 1641년, 음력으로 7월 1일이었다. 지금도 여름이 되어 그 날에 비가 내리면 광해군의 눈물이라 불린다. 

현실 권력에서 밀려난 이들을 보는 제주인들은 자연히 중앙 정부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운동경기에서도 약자(underdog)가 다시 일어서고 반전 드라마를 펼치기를 관중들은 기대하지 않는가? 어느 한쪽에 연고가 없는 경우에는 더구나 제주의 유지들은 유배인들과 인연을 맺기를 적극적으로 원했다. 제주 여인들과의 이러저러한 사연들이 생겨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제주인들이 유인들의 후손인 셈이다. 제주사투리에는 궁중 혹은 사대부 언어의 흔적들도 더러 남아 있다.

고난 속의 제주
제주도는 역사에서 큰 난리를 세 차례나 겪었다. 먼저, 고려말기에 목호의 난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고려를 굴복시킨 몽골인들은 제주를 병참기지로 활용하였다.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제주 땅은 최적이었다. 문제는 중원의 패자가 명으로 바뀌면서 생겨났다. 고려 조정은 명의 요청에 따라 군마를 보내려 하였다. 몽골인들이 반발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몽골은 북쪽으로 패퇴하여 북원이라는 나라로 유지되던 시절이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을 필두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철저히 도륙하였다. 몽골이 지배하던 시절에 다문화가정을 형성하거나 협력 혹은 동조하던 제주인들도 함께 몰살당하였다. 땅이 안 보일 정도로 피와 골이 낭자하게 섬을 뒤덮었다. 

 

사라봉에 제주역사의 큰 인물을 기리는 모충사가 있다. 세 개의 탑 중에서 왼쪽(서쪽) 탑이 조봉호의 구구정신을 현양하고 있다.

두 번째 난리는 1901년 신축제주교안이다. 흔히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1899년 교황청 직속으로 프랑스가 제주 선교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수천 명의 신도를 비교적 빠르고도 쉽게 얻었다.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이 필요로 했던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징세관이 필요했다. 그런데 천주교도들이 이 일에 크게 협력했던 것이다.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는 천주교가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큰 충돌이 벌어지고 수백 명이 살상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제주 목사로 홍종우가 임용되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한 인재였다. 개화의 방향에 대한 생각이 일본을 의지하려던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나라 밖에서 떠돌던 김옥균의 최후가 바로 이 홍종우의 총격에 의한 것이었다. 그 일로 징벌을 받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1903년에 제주 목사로 파견된 것은 프랑스와 협상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좌천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충돌의 희생자들 중에 연고 없는 무덤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황새왓으로 옮겨졌다. 전에 이재수가 이끄는 민병이 진을 쳤던 곳이다. 현재 황사평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천주교 희생자들을 위한 묘역과 제주 천주교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세 번째 난리는 한국전쟁 이전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인 제주4.3사건이다. 해방 후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못한 채, 남북분단이 점점 굳어가던 시절에 4.3사건의 폭풍이 들이닥쳤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을 마치고 시위가 있었는데 여기서 돌발 사고가 생겼다. 경찰의 발포로 말미암아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크게 다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망자는 시위의 구경꾼에 불과한 부녀자나 소년도 있었다. 더구나 도망가다가 등에 총을 맞았다는 것이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이를 조속히 수습하지 못한 채 일 년이라는 세월이 경과하고 긴장이 고조되면서 무장 항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에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일제히 공격하면서 제주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무장한 세력 수백 명을 소탕하면 해결된다고 판단하여 공세를 취했으나 사건은 점점 확대되었다. 군대와 경찰이 토벌하느라 애썼지만, 가족이나 이웃을 잃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입산하여 무장투쟁에 가담하는 숫자가 더 많아져 버렸다.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에 이르는 겨울이 가장 엄혹한 세월이었다.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마을의 거주자는 해안 마을로 강제 이동하도록 하였다. 민간인들도 무장대에 협력 혹은 방조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을 듣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처형하는 민간인 살육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어진 6.25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제주는 직접적인 피해 지역은 아니었다.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많은 피난민들은 제주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대부분 제주 땅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점이 외지인들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민간의 정서가 되고 불신의 풍조가 은연중에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공권력 혹은 국가권력에 대한 공포의 감정도 동시에 간직하게 되었다. 올해 들어서야 66년 만에 4월 3일은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었다.

천주교선교의 시작

선교의 모든 노력이 좋은 결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교를 향한 노력과 헌신을 오로지 그 열매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그 역시 성과를 만들어내는 환경을 이루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내리는 비와 이슬이 모두 식물에 의해 흡수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어떻게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겠는가? 따라서 제주에서 복음이 착근하기까지 이루어졌던 많은 시도들을 그 남겨진 흔적을 따라서 살펴보고자 한다. 

 

 정난주의 묘는 천주교의 대정성지로 조성되었으며, 올레길 11코스에 있다.

먼저 천주교의 경우이다. 1899년 천주교 전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복음을 접하거나 혹은 교회활동이 제주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백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면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제주목 관노로 유배되어 온 여인이 있었다. 기품 있는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킨 정난주 마리아, 바로 황사영의 아내였다. 1773년 정약현의 딸로 태어나 실학자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벽의 누이였다. 황사영과 혼인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매우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믿음으로써 현세적 명리에는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백서(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는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었다. 황사영은 대역 죄인으로 체포되고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제주에 유배된 마리아는 관비의 쓰라린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히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기게 되었다. 더구나‘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하였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평생 신심을 지킨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의 하나로 세우고 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1822-1846) 신부는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귀국하다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착하게 되었다. 출입국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에 그는 서품받기 전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이 배를 타고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그리고 동년 8월 17일 금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하여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교우 및 선원 등 14명이 승선한 라파엘호는 상하이항을 출항하였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에 표착하였다. 그곳은 제주 서쪽 끝에 있는 섬 차귀도였다. 이 섬이 보이는 가까운 곳에 표착한 것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선박을 수리하고 곧 서해안으로 올라갔기에, 제주에서 주민들을 접촉하거나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없다. 

김기량은 제주인으로서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신학생 이바울리노를 만나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곧 세례를 받았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명은 펠릭스라 하였다.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기에 앞서 육지에서 페롱 신부와 함께 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났다. 그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뒤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1858년 10월 4일 자 서한)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859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났다.

그를 만난 베르뇌 주교는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하였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천주가사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천주교 성지 황사평에 세워진 김기량의 순교비는 가슴에 못 박힌 것을 표현한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기름을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붙잡혔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 라고 권면하였다.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9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선교는 1899년 5월 페네(Jean Charles Peynet)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신부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복음의 여명은 제주 땅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뒤를 이은 개신교선교
제주인들이 개신교를 접촉했던 일들을 살펴보자. 첫째 아펜젤러 선교사의 학당에서 공부한 제주도 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장지영이다. 1886년 12월 11일자 아펜젤러 일기에 《신앙》이라는 소책자를 주면서 복음전도 사역을 제주에서 온 장지영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서 어려움을 잘 참고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0년대 초 제물포에 세워진 영국성공회의 성누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복음을 전해들은 제주인들에게 성경과 전도책자가 전해졌다. 이들에 의해 제주도에 복음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1890년부터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가 부산에서 자신의 거처에 사랑방을 마련하고 전도자들과 손님들을 위하여 점심식사를 제공하였다. 1893년 9월 11일자 일지에는 “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제주도에서 온 장님”의 방문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94년 2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주도에서 온 한 사람이 여기에서 여러 번 책을 구하고 약을 복용하였다. 그는 복음에 대해 약간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 몇몇이 최근에 그곳에서 왔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그 섬에 들어가고 싶다.” 1896년 베어드는 광범위하게 순회전도에 나섰다. 279일에 걸쳐 1,000마일이 넘는 긴 여행이었다. 베어드는 길거리와 항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전도했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이 제주도까지 전해졌다는 기록을 다른 선교사의 글에서 볼 수 있다. 

선교목적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사람은 성서공회에 소속된 전라도와 충청도를 담당했던 권서인 피터스(A. A. Pieters)와 대영성서공회 책임자 켄뮤어(Alexander Kenmure)였다. 1899년 피터스는 켄뮤어와 함께 제주도를 다녀온 뒤 그의 선교여행을 글로 남겼다. 천주교의 뮈텔문서에 의하면 페네 신부가 개신교 선교사들의 제주도 방문을 언급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부들도 제주 현지인들의 외부인에 대한 경계하는 태도 때문에 선교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개신교 목사들의 전도활동을 “엽전으로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주도를 방문하였고 구체적으로 전도활동을 펼친 흔적을 증언하는 셈이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의 순회선교는 제주라는 섬을 방문하고 그곳에 대해 알아보는 선교여행의 차원에 속했다. 제주 개신교의 출발은 오히려 제주인들의 자발적 복음수용과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전에 흩어져 있던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제주교회의 초기역사를 새롭게 제시한 것은 박정환의 업적이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하여 지난해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제주성내교회 안에는 이기풍 목사와 나란히 김재원 장로의 공로를 새긴 비석이 서 있다.

전택부는 『토박이 신앙산맥2』에서 이기풍 목사가 오기 전에, 서울에서 세례를 받은 김재원과 제주도의 독립지사 조봉호라는 교인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제주도 신앙인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근거하여 퍽 상세한 내용을 채록(採錄)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자생적 신앙공동체 존재에 대한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기풍 이전의 이야기는 신뢰성이 낮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재원의 행적을 상세하게 전해주는 선교사의 회고록이 있다. 제중원의 네 번째 원장으로 활약한 의료선교사 에비슨(O. R. Avison)의 회고록이다. ‘제주도 김씨 이야기’를 통해 김재원의 치료과정과 회심 및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존재에 대해 많은 정보를 남기었다. 그는 소래교회, 연동교회의 이야기들보다 김재원의 일을 더 소중하게 앞서 다루고 있다. 김재원은 이호마을의 넉넉한 집에서 자라났다. 이호는 제주공항 활주로 서쪽 끝에 인접한 마을이다. 그리고 거로마을로 가서 공부하였다. 거로는 제주시 동부에 위치한 유학자들의 동네였다. 그러던 중에 문제가 생겼다. 늑막염을 방치하여 농흉으로 도지게 된 것이다. 여러 의원을 전전하고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는 등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에 새로 세워진 서양인들의 병원에 가면 고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아버지 김진철은 아들을 데리고 상경하였다. 뱃길로 제물포를 통해서 서울에 갔고 제중원을 찾았다.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칼에 맞아 큰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성공적으로 치료하면서 광혜원이라는 서양식 병원이 생겨났다. 1885년 봄이었다. 처음 광혜원 자리는 후일 경기여고, 창덕여고 등 학교가 세워졌고,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있는 곳이다. 다음으로 1887년에 옮겨간 곳이 을지로의 명동입구에 해당된다. 당시에는 구리개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1904년 11월에 숭례문 밖 서울역 앞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대우빌딩 그리고 남대문교회가 그 터였다. 김재원 부자가 찾은 때 제중원은 구리개에 있었다. 에비슨은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였다. 장기간 방치된 병은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부자를 보면서 가능성이 낮다고 말하면서 제안하였다. 예수를 믿는다면 고쳐보겠노라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낫는데 2년이나 걸렸다. 그는 신앙인이 되었고, 당시 제중원에서 여러 신앙인들을 만나게 된다. 한국인 처음으로 의사가 된 백정의 아들 박서양이 의학수업을 받던 때이다. 한국교회가 태동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여 한국의 아브라함으로 불리는 서상륜도 세브란스에서 조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증거가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김재원의 생각과 활동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일이다. 

김재원은 제중원에서 서상륜으로부터 신앙과 전도훈련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에비슨 선교사는 1901년 6월 선교부의 동의하에 서상륜을 제중원 전도자로 고용하였고 서상륜은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서상륜은 병원 직원들을 아침 일찍 모아 기도회를 가졌고, 아침 식사 후 환자 및 조수들과 주 병동에서 함께 기도회를 가졌으며, 그 후 기회가 되는 대로 하루 종일 환자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가졌다. 이러한 사역을 지켜본 김재원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김재원은 병을 치료받고 기독교신자가 되어 고향 제주도로 돌아와 신앙을 전파하였다. 전도를 받고 이호마을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옛 풍습대로 3년 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김재원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문중은 김재원을 불효자로 단죄하여 멍석말이 매로 다스리게 하였다. 사태가 험악하게 되자 어머니가 나섰다. “무당 귀신은 내 아들을 못 살렸지만, 예수님은 내 아들을 살려주었지 않았느냐? 나는 아들 살려주신 예수만 믿지 다른 귀신 안 믿는다.”모자는 공동체를 지키며 전도하려 애썼지만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훈련받은 사역자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에 서울과 평양에서 응답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또한 애월읍 금성리에서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립 운동을 통해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려 했던 일꾼이 있었다. 금성은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30-40분 가까이 떨어진 곳에 있다. 조봉호는 교회보다 오히려 제주 사회가 크게 인정하고 숭모하는 독립투사이다. 그는 금성 옆 마을인 귀덕리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혜택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경신학교, 숭실학교에 수학할 기회도 가졌다. 그 공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근거가 거의 없다. 잠시 견학했거나 몇 학기 수업에 참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그가 받은 영향은 심대한 것이었다. 당시 민족 운동의 선봉에 섰던 신앙인들, 안창호나 이상재 등과 같은 유형의 신앙인이 된 것이다. 

조봉호가 세례를 받은 것은 이기풍 목사가 온 이후인 191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조사 혹은 전도사로 일하였다는 주장은 더 정확한 근거가 있어야만 설득력을 갖게 된다. 천주교의 제주도선교와 신축제주교안을 직접 겪었던 그로서는 개신교와 근대화, 예수교와 민족의 연결에서 새로운 빛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제주성내교회의 남녀소학교 최초의 교사로 봉사했던 사실이 말해주고 있으며, 1907년 7월 6일에 창립된‘호남학회’의 1909년, 1910년 제주 지역 회원이었다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 1908년 성내교회의 남녀소학교가 시작될 때 금성리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이 교사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조봉호와 금성리 신앙공동체는 새로운 시대에 제주도의 나아갈 길을 교육에서 찾았고 근대화와 개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기미년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재정이 필요해지자, 조봉호는 적극적으로 일어섰다.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일에 그는 적극적으로 나섰고 제주 지역 모든 교회가 이에 호응하였다. 4,450명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금한 것이 10,000원이었고 이는 상하이에 잘 전달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일이 탄로 나면서 60여 명이 검속(鈐束)되었다. 그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기로 결심하고 동지들을 살리려 하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과 옥살이로 지친 몸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것은 1920년 4월 28일이었다. 

평양에서 거리의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기풍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사 수업을 거쳐 임직을 받은 것이 1907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선교사로서 제주에 파송을 받았다. 제주에서는 이미 소수이지만 신앙인들이 있었고 신앙공동체 혹은 기도처소로 모이고 있었다. 이들에게 임직을 받은 설교자 혹은 성례 집례자가 절실하게 필요하였기에, 교역자 파송에 대한 요청이 있었다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다만 교회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당 가정들의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 서울이나 평양의 선교부는 면밀하게 제주의 사정을 살피며 준비하고 있었고, 구체적인 방안을 실현하기 위해서 훈련된 사역자들을 파송하였다. 이기풍에 이어서 속속 여러 일꾼들이 제주를 찾았고 활약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어쩌면, 백 년 전 제주 땅에서는 지금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활발하게 다각적으로 태동하며 새로운 날을 기다리는 선교의 역사가 진행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김인주 | 제주봉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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