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베트의 현대사가 바뀌다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1949년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설되면서 티베트의 현대사도 완전히 바뀌었다. 베이징방송은 중국 본토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한다는 공산당의 구호 아래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다음해 1950년 10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은 침략을 감행하였다. 4만의 중국군이 무기도 없이 초라한 티베트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중국경찰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향한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하여 1959년 3월 10일, 반(反)중국, 반(反)공산주의 봉기가 티베트인에 의해서 일어났다. 티베트의 시위자들은 결속하였고, 중국 보안당국의 탄압에 강하게 맞섰다. 2008년 3월 10일은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이 되는 해였다. 티베트 승려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 시위대가 중국경찰과 충돌하면서 시위는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고, 중국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사태가 격화되었다. 이후, 풀 수 없는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역사 가운데 티베트, 중국, 인도, 미국, 유럽 등 많은 나라들이 인권과 자유, 그리고 자국의 이익 관계로 지금도 여전히 얽혀 있다.
티베트불교가 힌두교와 본교(Bonpo)에서 영향을 받은 종교라는 것을 고려할 때, 불교의 발상지이자 힌두교의 발원지인 인도로 티베트인들이 넘어 온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티베트의 독립의사를 강력하게 개진(開陳)하는 요즘이다. 인도에서 반세기 이상 난민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특히 남인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난민들의 형편을 알리면서 남인도 티베트사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인도 티베트 난민의 상황과 분포 1959년 3월, 중국의 침략 이후 티베트인들은 달라이라마를 따라 본토를 황급히 탈출하여 히말라야를 넘어 주변국인 인도, 네팔, 부탄으로 흩어졌다. 1995년 이전에는 매월 700-1,000여 명 가량의 난민들이 네팔을 지나 인도로 넘어갔으며, 2000년 보도에 따르면 연간 2,000-3,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은 국경을 넘지 못하게 막아서는 중국군과, 넘어오지 못하게 감시하는 네팔경찰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넘는 모험을 감행한다.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로는 더욱 삼엄해진 경계 탓으로 연간 10여 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네팔 Swayembhunath 의 Nyelen khang이라는 곳의 생활환경이 인도에 비해 좋지 않기 때문에 머무는 티베트 난민들은 비교적 적다. 그래서 그들은 북인도의 다람살라로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달라이라마를 추종하기 위해, 망명정부에서 베풀어 주는 교육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또는 많은 승려들이 종교적인 수도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네팔보다 인도행을 택하는 것이다. 네팔의 티베트 난민상황에 관하여는 www.tibetjustice.org/reports/를 참조할 수 있다.
망명한 달라이라마를 따라 중국 국경을 넘어 인도로 온 티베트 난민은 1962년 5만여 명이던 것이 2002년 기준, 인도 전역에 총 11만 명 정도라고 한다.1) 그러나 유동인구와 도시지역의 난민들까지 포함한 잠정적 집계로는 20만 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네루(Motilall Nehru)수상에게 달라이라마가 땅을 요청했을 때 인도정부는 티베트 난민들에게 인도의 거칠고 메마른 땅, 불모지(不毛地)를 불하(拂下)하여 주었다. 그 당시 남인도 카르나타카(Karnataka)주의 주지사가 비교적 많은 땅을 주었기 때문에 현재 티베트 난민의 절반 이상이 남인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에 거주하는 티베트 난민은 'Settlement'라고 불리는 정착촌의 난민, 사원의 승려, 도시거주 난민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거주 난민들은 대부분이 비즈니스맨이거나 학생계층이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들은 티베트어와 그 지방의 언어 또는 힌디어를 사용하며, 난민 2세대 이후로는 주로 영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티베트 난민들은 인도 전역에'티베트 정착촌'을 이루는데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Himachal Pradesh) 주에 있는 '다람살라 정착촌'이다. 이곳은 라마교의 수장이자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거처가 있으며 티베트망명정부가 있는 곳이기에 더욱 유명하다. 그밖에 시킴, 깔림퐁, 데라둔, 쉼라, 나갈랜드 등에 흩어져 정착촌을 이루고 있다.2) 지도에서 보여주듯이, 정착촌은 히말라야와 남인도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정착촌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언어, 전통,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다. 난민촌의 건물들은 유럽이나 미국 등의 후원으로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국인이 난민촌에서 1박 이상을 머물고자 한다면 '보호지역 허가서(Protected Area Permit, PAP)'를 수도 뉴델리에 있는 정부 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치 및 정책 1960년 달라이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도의 다람살라에 티베트망명정부(The Government of Tibet in Exile)를 세웠다. 망명정부에는 14대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가 갖추어져 있다. 중앙 티베트행정부(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 CTA)는 문화종교부, 건강부, 가정부, 교육부, 재정부, 국제교류부 등을 담당하는 여러 부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법부인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가 있다. 또한 입법부인 티베트 국민대표의회는 지역과 종파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티베트망명정부는 난민들이 발생하는 경우 그들을 돌봄과 난민 공동체의 결속, 난민의 인권 보호 및 환경에 대한 문제들을 책임진다. 또한 뉴욕, 런던, 파리, 제네바, 모스크바, 도쿄, 타이베이 등 전 세계 11개국에 망명정부 대표사무소를 두고 있다.3)
인도에서의 티베트 난민들은 인도인과 동등한 정책의 혜택에서는 제외되는데 예를 들면 투표권이라든지 인도여권을 가질 수는 없다. 인도에서 거주하기 위해서는 모두 '인도거주허가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매년 정기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종종 1979년 이후에 도착한 티베트인들은 인도거주허가증을 받기 어려워 편법으로 얻기도 한다. 새로 난민으로 도착하는 승려들은 사원에 소속되기도 하지만, 가족 단위의 새로운 티베트 난민들은 이전에 인도 정부에서 불하받은 땅이 충분하지 못한 까닭으로 다람살라에 남는 일이 흔하다.
티베트 난민들, 희망의 경제활동 티베트망명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농업, 농업에 관계된 산업, 카펫을 짜서 수출하기, 겨울 스웨터 팔기 등의 사업에 종사하는 난민들이 70%에 해당한다.4) 5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망명 1세대들은 주로 농업과 수공예 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2세대들 후로는 더 나은 교육의 혜택으로 인해 정착촌을 떠나 도시지역에 진출하여 비즈니스와 같은 다른 형태로의 직업 속에서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티베트 난민들은 인도인들과는 달리 규모가 작은 경제활동 혹은 육체노동과 같은 강도가 센 경제 활동보다는 손쉽고도 이익이 많은 쪽을 선호한다. 이러한 티베트 난민들을 볼 때, 한국인과 비슷한 성향이 있는 것 같아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든다.
교육은 미래의 힘 티베트 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달라이라마의 활발한 후원 외교정책에도 불구하고, 생활고에서 벗어난 가정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즉 일상생활은 그럭저럭 해결이 되는데 자녀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빼앗긴 민족을 회복하고자 또 힘없는 난민의 신분으로 견고한 위치를 구축하고자 티베트망명정부는 특별히 차세대 교육에 힘을 많이 쏟는다. 현재 77개의 학교에서 28,0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며, 85% 이상이 난민가정의 자녀들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서 가정과 같은 돌봄으로 SOS마을을, 새로 난민이 되어 도착하는 자녀들을 위하여도 특별한 교육정책으로 돌보고 있다.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45분씩 티베트어로 기도를 하며, 티베트역사를 공부한다. 이렇게 티베트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 견고히 다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어 과목을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인도의 문맹률이 48%인 것을 고려할 때, 25%를 차지하는 티베트 난민의 문맹률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5)
이제는 남인도 티베트 난민이다 인도 카르나타카 주의 정착촌은 가장 많은 티베트 난민들로 형성되어 있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통계상으로 드러난 11만 명 중에서 남인도 카르나타카 주에만 절반 이상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곳은 난민선교와 사역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인도정부에서 허락한 땅, 북인도의 다람살라에는 큰 사원을 지을만한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중국에서 넘어 온 중요한 사원과 불교대학이 남인도에 몰려 있다. 사원과 불교대학마다 티베트의 승려들뿐만 아니라 미얀마, 부탄, 네팔 등에서 유학 온 승려들로 넘쳐난다. 사원에서는 티베트어, 수학, 영어, 불교학 등 여러 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인도 전역의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인 반면 티베트인들은 비록 승려라도 고기를 먹는다. 그들에게 왜 채식주의자가 아닌지 질문을 하면 티베트에서의 습관을 아직 바꾸지 못했을 뿐더러 극심한 더위 등의 환경여건에 적응하고자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생존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난민 1세대들은 농업이나 카펫 짜기 등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업은 주로 옥수수, 쌀, 망고 등을 생산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수익성이 높은 유기농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동안 계속되는 이상기후로 인해 예상한 수익을 얻지 못하고 있어서 밝은 농민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상기후로 인한 수익성의 저조보다는 관개시설(灌漑施設)이 없는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하기 때문에 더욱 만족할 만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고 정착촌 농민들은 말하고 있다. 농민들은 정착촌의 자체적인 협동조합을 이용하여 농업자금을 쓰고 있다. 일반은행의 이자율이 7%인 것에 비해 1%라도 낮은 협동조합의 농업자금 대출을 이용한다. 또한 그들이 살던 땅, 본토 티베트와는 전혀 다른 남인도의 극심한 더위로 인해 여러 가지 질병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 밖의 또 다른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사원의 주방에서 일하는 '쬬니'씨의 여러 어려움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일 것이다. 한 달 수입은 1,000루피이다(2010년, 1루피는 25원). 그러나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며 딸을 마이솔로 유학시키는 남돌 아빠는 하루 4,000루피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문고드(Mundgod) 사원에 소속된 42세 승려 직맨은 사원에서 매달 1,000루피를 제공받는다. 달라이라마나 대만 등의 돈 많은 불교신자가 방문할 때면 조금 더 많은 수입이 생긴다고 한다.
2세대들은 1세대들과는 다르게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도시지역으로 진출해서 그들의 역량을 잘 발휘하고 있다. 또 다른 2세대들은 레스토랑, 수공예품 가게, 관광지 등을 오가며 옷가지를 팔며 보다 나은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대도시 방갈로르로 진출하는 꿈을 꾸며 의사가 되거나 비즈니스로 성공하기 원한다. 해외(선진국)에 나가 있는 친척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며, 이것은 로칼 인도인들보다도 양질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젊은 난민들은 결혼이나 직업을 통해 해외로 나갈 기회를 잡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복음 들고 남인도 정착촌으로 가자 남인도 카르나타카 주에는 4곳의 정착촌이 있다. 문고드의 도굴링(Doeguling) 정착촌, 벨라굽베(Bylakuppe)의 Lungsung Samduping(Old Camp), Dickey Larsoe(New Camp) 정착촌, 코레갈(Kollegal)의 Dbondenling 정착촌, 훈수르의 Rabgyaling 정착촌이 대표적이다. 1960, 70년대 당시 불모지를 불하받았기 때문에 이들 정착촌을 찾아가려면 인가가 없는 넓은 들판을 한참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다.
◆ 도굴링 티베트 정착촌 문고드 정착촌은 후블리(Hubli, 카르나타카 주의 북쪽에 위치한 인구 78만의 농업도시)에서 약 1시간 정도의 거리로, 1970년대 카르나타카 주 정부가 수풀이 무성한 땅을 내어주면서부터 정착이 시작된 곳이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사원이 많이 있으며 2만5천여 명의 난민이 9개의 난민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중에 승려가 7천 명 가량이다. 필자가 이곳에 처음 갔을 때에는 어마어마한 사원들과 불교대학, 끝없이 이어지는 승려들의 행렬 등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 Lungsung Samduping / Dickey Larsoe 정착촌 '벨라굽베'는 현지어로 '못 쓰는 땅','버려진 땅'이라는 뜻이다. 벨라굽베에는 1960년에 세워진 Lugsung Samduping 정착촌과 1975년에 세워진 Dickey Larsoe 정착촌이 있다. 난민 인구가 3만8천 명이 넘는6) 골든 템플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마이솔(Mysore)에서 82km 떨어진 쿠샬나가르에 위치해 있으며, 닝마파 계의 Namdroling 사원과 겔룩파 계의 Sera 사원의 승려들만 5천 명이 넘는다. 또한 유명한 불교대학들이 있어서 티베트승려뿐만 아니라 미얀마, 부탄, 네팔 등지에서 몰려온 승려들과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늘 부산한 모습이다.
◆ Dhondenling 정착촌 Dhondenling 정착촌은 인구 5만 명 남짓한 작은 도시이다. 실크도시 코레갈에서 2시간가량 들어가는 구디야빨랴에 위치해 있으며, 1974년 카르나타카 주의 도움으로 땅을 불하받아 5만5천 명의 난민들이 22개의 정착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 작은 도시에 15개의 사원이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정착촌 안에는 병원, 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 Rabgyaling 정착촌 인구 5만 명 정도의 훈수르에서 20분 정도 들어가는 구루뿌르에는 3천2백 명의 사람들과 승려 650명의 Rabgyaling 정착촌이 있다. 마찬가지로 카르나타카 주 정부로부터 몹쓸 땅을 불하받아 1972년 세워졌다. 현재 1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교, 사원, 진료소 등이 정착촌 안에 들어서 있다. 이 정착촌은 특별히 농경지가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티베트인들이 망명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많은 최신 농기계들을 세워 놓고 인도인들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이 진풍경이었다.
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의 권세 1990년 3월 티베탄리뷰 와의 인터뷰에서 스티븐 히쉬는, 티베트 난민들의 복음에 대한 저항이 그들의 강한 민족주의 자존심 때문이며 티베트 사람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심하기 때문에 티베트 기독교인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믿음을 저버리기 쉽다고 말하였다.
티베트 난민사역과 중국 라싸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한 사역자는 티베트에 있는 티베트인들이 인도에 있는 티베트인들 보다 기독교에 대해 더 호의적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변화하는 세대와는 달리 지금도 외부인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고립적인 조직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완고한 성향의 1세대와는 달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젊은 세대들의 의식은 도시진출, 해외진출 등과 맥을 같이 하여 조금씩 다른 세상으로도 마음을 여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에 의하면 한 사람의 티베트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평균 11년이 걸린다고 보고했다. 더구나 인도에서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라는 인식이 많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건너와서 도우라 지금까지 발표된 티베트인 사역접근계층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약물중독이나 고아에 대한 사역이 65%, 승려들에 대한 사역이 20%, 티베트 일반인에 대한 사역이 10%, 영향력을 많이 끼칠 수 있는 계층인 비즈니스 종사자나 지도자층에 대한 사역이 5%로 나와 있다.7) 그러나 남인도의 경우, 이러한 형태의 통계조차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역적·전략적으로 중요한 남인도에 전문 티베트인 사역자가 없기 때문이다. 열악한 사역의 조건과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소망을 가지고 이들의 미래를 그려 본다.
계속되는 종파 간 내부긴장, 난민들의 불안정한 지위, 도시지역으로의 이동과 국제사회로의 진출 그리고 티베트 청년들의 의식의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 불교인들의 형식적 모임, 티베트 젊은이들의 극히 개인적인 진로개척 방향 등으로 이제 세계 유일의 제정일치에서 제정분리를 표방하고 있는 티베트 사역에의 접근이 이전보다는 좀 더 희망적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남인도 티베트를 지키며 기도하고 있는 우리가정은 교육, 의료, 비즈니스, 미디어사역 쪽으로 접근이 용이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친구 사귀기가 필수로 전제되어져야 하겠다. 중국 티베트에서 중요한 것들이 남인도로 건너와 반세기를 넘어가며 특별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추수할 일꾼이 없으니 오늘도 아버지의 안타까움으로 기도한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
미주 1) U.S.DOS 3월 2002년. 2) 사진 지도참조. 3) Brussels, Canberra, Geneva, Kathmandu, London, Moscow, New Delhi, New York, Pretoria(남아공), Taipei, Tokyo. 4) www.tibet.com 5) 2000년 기준. 6) 2000년 집계. 7) www.caf.com
曉星 | 인도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