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선교 개념과 비거주선교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선교사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4가지 뜻이 있었다. 1) 신학을 하고 2) 장기간 3) 현지에서 체류하는 4) 전임전문사역자다. 이에 따르면 선교사는 당연히 선교지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작정한 사람을 말하며 동시에 늘 현지에 체류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시간을 선교 사역에 드리는 전임사역자야 한다.1)
이러한 전통적인 선교사 개념은 이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중에 특별히 현지에 늘 체류하는 전통적인 선교개념이 변화되면서 비거주선교사 혹은 비거주선교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비거주선교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비거주선교에 대한 편견 현대선교의 시작은 유럽의 세계항로 발견의 출발과 일치한다. 그 시기에 유럽은 완전히 기독교화 되었다. 이방인들은 대양을 건너서 먼 나라들에 살고 있었다. 선교는 그들에게 가는 것을 의미했다. 선교사는 떠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너희는 (다른 나라에) 가서’라는 선교의 지리적 요소가 강조되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누구를 선교사라고 할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2)
이런 전통적인 관념은 선교사가 누구인지에 대한 사고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선교사는 떠나야 한다. 본국의 교회 근처를 얼쩡거리는 선교사는 아직 제대로 떠나지 않은 사람이며 소위 선교사로서‘은혜가 안 된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후원도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비거주를‘떠남의 망설임 혹은 실패’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동안 떠나기만 하면 선교지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선교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외국에서 같은 민족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는 것, 예를 들어 한인목회를 하는 것도 선교활동으로 간주되었다.
랄프 윈터는 이러한 지리적 떠남의 관점에 대해 중대한 도전을 했다. 그는 선교라는 것은 문화적인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며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앞서 언급한 한인목회와 같은 활동은 지리적으로는 떠났지만 아직 문화(민족)를 떠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반대로 그가 어디에 있든지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어 교회가 없는 민족 가운데서 활동을 한다면 그가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가라’라고 하는 명령을 예수님의 지상명령에서 발견하며(마 28:19), 종종 그것이 지리적 경계를 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그 명령의 핵심은 모든 민족을‘제자삼으라’는 것이며‘가라’를 포함해서 다른 동사들은 그것을 수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라는 제자를 삼으러 가라는 것으로서 반드시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필자가 보기에 선교는 결국 거주냐 비거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민족’을 제자삼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제자 삼는 대상으로서‘모든 민족’은 랄프 윈터의 지적처럼 언어-문화적인 경계를 넘어설 필요를 발견하게 한다.
비거주선교(사)의 개념 몇몇 개념 정의를 인용해 보자. “비거주선교란 선교 사역이 제한되거나 닫혀진 지역 주변의 자유로운 곳에 선교 교두보를 설치하고, 장기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인 장단기 선교 목표를 설정하여 현지 언어를 익히고 현지교회와의 긴밀한 유대 속에서 현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신분을 확보하며 선교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3)
“비거주선교라는 개념은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닫힌 지역, 곧 미전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대부분의 미전도 지역에는 선교사가 장기적으로 정착하고 체류하기에는 제약이 많이 따르기에 이런 지역에 단기적으로 들어가서 그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사역을 하는 개념이다.”4)
“비거주선교사는 전임 해외선교사로서 하나의 미전도종족 복음화에 그 사역의 우선권을 두며, 다른 기관과의 중복이나 차이를 피하여 사역하는 자이다. 또한 비거주선교사는 법적인 거주금지나 감시로 인하여 사역에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주어진 사역지 밖에서 거주한다. 그곳을 거점으로 비거주선교사는 그 지역의 복음화에 관심 있는 그 지방이나 다른 지방의 개인, 단체, 교단, 또는 선교기관과 긴밀히 협조하여 하나의 조직망을 구성한다.5)
위의 몇 가지 정의에서 보듯이 비거주선교는 선교지에서 장기적으로 체류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사역이 자유롭지 못한 점 등 선교지의 제약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임과 동시에 목표로 하는 선교지 밖의 거주지가 전략적인 사역의 기회(이주자들의 존재 등)를 제공하고, 선교 자원의 동원과 협력에 용이한 점이 있는 등 비거주선교사가 거주하는 지역의 전략적 이점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이 지금은 여러 상황의 변화에 의해 점차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져 가고 있다. 선교사가 거주할 수 없는 이유(비거주의 이유)가 단지 지역적인 제약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추방 등 거주할 수 없는 선교사 개인의 이유까지도 고려한다. 즉, 한 선교지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지 않고 사역하는 모든 선교사들을 통틀어 비거주선교사라고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무조건적인 개념 확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는 비거주선교와 비거주선교사를 구분해야 한다. 비거주하는 사람들이 가끔 선교지를 방문해서 하는 선교활동을‘비거주선교’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을 모두 비거주선교사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거주선교를 하는 사람은 우선 선교 목표 지역이나 종족이 분명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선교대상에 대한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전문성이란 해당 지역과 종족에 대한 지식과 언어능력이다. 셋째는 비거주선교 활동이 선교하는 사람의 주된 활동(전임이나 준전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이런 특징들은 데이비드 게리슨의 책,《 비거주선교사》에서 밝힌 것과 유사하다. 이런 관점에서보면 선교지역에 가지 않더라도 특정 민족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본국이나 제3국에서 전문적으로 선교하는 사람들을 비거주선교사라고 부를 수 있다. 반대로 자주 선교지를 방문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특징이 없다면 비거주선교사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단순히 비거주하며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라고 해서 모두 비거주선교사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국에서 선교회나 교회선교 영역을 섬기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비거주선교사라고 부를 수 없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한국어로 가르치는 사람도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할지라도 비거주선교사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단기선교와 비거주선교를 구분해야 한다. 단기선교를 비거주선교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도 특정한 지역이나 종족을 대상으로 하고 어느 정도의 선교지에 대한 지식과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그 대상에게 이루어진다면 비거주선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목표가 없이 단회적으로 전문성이 결여된 상태로 이루어지는 단기선교는 비거주선교 활동이라고 간주하기 어렵다. 한편 국내에서 복음이 필요한 외국인 이주자에게 가서 단기선교를 하는 경우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비거주선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비거주선교(사)는‘선교지에 거주하지 않고 자기 나라나 선교지 인근의 전략적 요충지에 거주하면서 선교대상 민족을 제자삼는 일을 지속적이며 전략적으로 감당하는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비거주선교의 대두 21세기에는 과거보다 비거주선교나 비거주선교사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접근이 어려운 곳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위기관리재단의 분석에 따르면 종교적인 근본주의와 국수적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선교사의 활동을 금지하는 국가가 30여 개국이고 선교사의 추방이 이루어지는 국가는 120여 개국이라고 한다. 그러한 숫자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기독교 배타지역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선교는 비거주 사역이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선교대상의 이동 때문이다. 선교사의 장기체류가 힘든 선교지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반면, 선교지에서 비교적 선교가 자유로운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증가하고 있다. 이른바 난민, 이주자들이 그들이다. 2010년 국제이주자의 수는 무려 2억 14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미전도 종족 이주자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국가나 지역 혹은 거점도시는 비거주선교의 전략적인 지점이 될 것이다.
셋째로, 교통 통신의 발달이다. 비거주선교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다. 교통 통신의 발달은 선교지와의 시간-거리를 축소시켰다. 이제 전 세계는 어디든지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곳이 되었고, 인터넷통신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선교지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선교지와 선교사의 거주지 간 이동과 커뮤니케이션의 원활성이 증가할수록 비거주선교는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정보의 신속한 교류와 네트워킹의 급속한 발전도 비거주선교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데 한 몫을 톡톡히 할 것이다. 선교사의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성이나 방송선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최근 들어 인터넷 소셜미디어를 통한 비거주선교가 활성화되고 있다.
넷째, 신노마드(유목민) 시대의 도래이다. 정보화-세계화가 만들어낸 사람들로서 고독한 자유, 테이크아웃 음식과 모바일기기를 선호하는 현대인을 가리켜 신노마드족 이라고 하고 이들의 시대를 가리켜 신노마드 시대라고 말한다. 신노마드 시대는 직장도 평생직장을 가지는 정착민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여러 직장을 거쳐 가는 특징이 있다. 이직과 재취업을 반복하게 된다. 이들은 여행을 아주 중요시한다. 이런 시대적인 현상이 비거주선교를 부축일 것이다.
다섯째, 향후 세대의 특징 때문이다. 지금부터 10-20년 후면 지금의 10대, 20대의 청소년들이 선교의 주역으로 자리바꿈할 시대이다. 그런데 이들이 바로 신노마드 시대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세대이다. 이들이 선교에 헌신한다면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사역하기 보다는 자기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선교 지역을 찾아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몇 개월, 저기서 몇 년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들은 이러한 유동적 선교 패러다임을 훨씬 안정적으로 생각하는 세대들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비거주선교는 한층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들 세대에는 비거주선교(Non-residential Mission)에서 멀티거주선교(Multiresidential Mission)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거주선교의 중요성 비거주선교의 중요성은 멀리 가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바로 한국교회가 비거주 선교의 수혜자였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아직 한국이 개방되지 못하고 기독교의 전파가 금지되어 있을 때 인근의 전략적 지역인 만주 지역에서 사역했던 존 로스 선교사 일행의 비거주선교의 결과로 처음 개척되었다.
존 로스 목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의 선교사였다. 그들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구한말 당시 만주에 거주하면서 대영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어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이응찬, 서상륜, 백흥준 등의 한국인 소매무역상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성경번역을 도왔다. 1883년에 신약성경의 일부가 번역, 인쇄되었으며 1887년에 신약전체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들이 성경번역 과정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자청하여 받고 고향에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다. 당시 금교(禁敎)의 상황에서 1884년 황해도 소래에서 서상륜이 복음을 전하여 믿는 자들의 무리가 형성되어 13명이 가정교회로 모이면 만주의 로스 선교사에게 와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신자 수가 79명으로 증가하여 존 로스에게 와줄 것을 다시 요청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교회라고 간주되는 소래교회의 출발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동진 박사는 한국교회의 선교 운동은 사실 중국 땅에서 예수를 영접한 한국인들이 자기의 고향에 들어와 한국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할 때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들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거주선교사의 사역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선교는 거주선교사가 아니라 비거주선교사의 사역에 의해서 시작된 것임을알아야 한다.
이런 전략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란 사역을 위해서 이란 난민들이 몰려있는 터키나 말레이시아에서 사역을 하고 그들을 훈련시켜서 본국으로 보내는 사역을 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을 위한 레바논에서의 사역, 아프간 난민을 위한 타지키스탄에서의 사역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주로 선교지 밖에서 이주자들을 통한 비거주 사역의 예들이다. 중국선교를 위해서는 주변의 싱가포르와 홍콩, 대만, 한국 등이 전략적 비거주선교 거점이 될 것이다. 그곳에 와 있는 중국인을 위한 사역과 동시에 그곳을 출발하여 선교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사역하는 비거주선교 사역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비거주선교의 위험성과 한계 지금까지 비거주선교의 시대적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제 비거주선교의 위험성과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글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 같다.
첫째,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선교편의주의의 위험성이다. 비거주선교의 전략적인 가치의 부상과 아울러 비거주선교사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제사보다는 젯밥’에 마음을 두고 비거주선교를 하는 선교사가 생길 위험도 있다. 비자를 받는 과정이 힘겹고 현지상황이 열악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거주하는 어려움을 피하고자 비거주 사역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자녀를 보낼 수 있는 좋은 학교가 현지에 없기 때문에 교육환경이 좋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비거주 사역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전형적인 선교편이주의에 입각한 비거주선교이다. 선교사가 선교현장에 거주한다고 하더라도 자녀와 부인 등 나머지 가족은 생활이나 교육환경이 좋은 다른 지역에 두고 사역하는 경우도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비거주선교(사)의 강조가 이런 선교편의주의적(희생을 피하려는) 행태에 힘을 실어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짜 비거주선교사와 편의주의적 비거주선교사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현장에서의 거주와 사역이 자유로와 질 때 비거주 사역은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편의주의적으로 비거주를 선택했던 사람은 여전히 그때에도 비거주 사역을 고집할 것이다(물론 이주자 사역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비거주선교사는 그 상황을 가정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비거주선교의 열매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필자가 사역하는 지역은 중국의 변방 지역이다. 이곳에는 주변 국가에서 혹은 중국 내 다른 지역에서 방문하는 식으로 선교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이러한 비거주 사역을 통해서 선교현장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대부분 현장에 있는 선교사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현장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 부담을 주고 피해를 주는 결과도 있었다. 잠시 방문해서 사역하는 경우는 자신의 사역의 결과가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알 수 없다. 자신이 사역할 그 순간 어떤 성과가 보인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렇게 보고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장기적으로 선교현장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이 점에서 현장에 거주하는 선교사나 혹은 현지인 지도자들이 있다면 비거주사역자는 그들의 조언을 듣고 협력해서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신학적-선교학적 문제 제기로서‘과연 함께 살지 않고 선교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교는 민족을 제자로 삼는 사명이다. 주님께서 제자로 삼으실 때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사셨다.“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5) 제자는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것 같이” (행 20:35)라고 말한 것처럼 함께 살며 본을 보여줌으로써 세워진다. 이처럼 제자 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증거가 말로만 되어 진 것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 된다. 이러한 고백을 한 사도바울이 비거주선교사인가? 혹자는 그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주선교사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대부분 선교지였으며 그는 선교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웠던 유동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비거주선교는 전략적인 대안이지만 거주를 대신할 수는 없다. 결국 거주선교의 보완적 사역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비거주선교는 제자삼기나 교회개척과 같은 장기적이고 삶을 나누는 것이 필요한 사역보다는 리서치, 비즈니스, 훈련, 강의, 의료, 문서, 방송 등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거나 반드시 삶을 함께 할 필요가 없는 사역에 적합하며 비거주선교사는 이러한 분야의 전문성을 개발해야 한다.
비거주선교의 위험성에 주의하고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분명히 비거주선교는 21세기 선교의 중요한 전략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거주선교의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비거주 선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비거주선교의 위험성에 주의하고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앞으로 세계화의 진행과 이주자들의 증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보급, 교통의 발달에 따른 이동시간의 단축 등은 계속 이루어질 것이고 이에 따라 선교에 있어서도 거주와 비거주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질 것이다. 그 결과 선교사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선교지에서의 장기거주라는 표식은 점점 약해질 가능성이 많다.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의 선교’라는 말로 대변되는 글로벌선교의 확산은 비거주 사역을 더 확산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선교지 거주를 포기하고자 하는 선교편의주의의 유혹도 증가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 선교에서는“거주, 비거주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선교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1) 이현모,d 인생의 후반전은 시니어선교사로e, 조이선교회, 2007. p.43. 2) 데이비드 J.보쉬, d세계를 향한 증거e, 두란노, 1993. p.63-64. 3)http://www.inbora.com/ez2k/ezboard.cgi?db=board3&action=read&dbf=2624&page=0&depth=2 4) http://gmp.or.kr/bbs/ 5) 데이비드 게리슨, 『비거주선교사』, 생명의 말씀사, 1994.
한수아 | 선교사, MVP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