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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 통권 129호     필자 : 홍성직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2세대 선교사가 그리는 그림
아버지 홍종만 선교사


편집자 주: 한국교회 1세대 중국선교사로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홍콩에서 중국선교를 개척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故) 홍종만 선교사를 회고하며 추모하는 글을 고인의 장남 홍성직 집사(제주영락교회)께서 집필해 주셨습니다. 평북 선천(宣川) 출신인 홍종만 선교사는 해방 후 월남하여 경남 거창고 교감으로 재직하다가 사임하고 총신대에 입학하였습니다. 충현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197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76년 충현교회의 후원으로 예장합동측 파송 선교사로 홍콩한인교회를 담임하면서 중국선교에 전력을 기울이던 중에 1982년에 숙환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친은 1929년 8월 25일 생이니까 살아계셨으면 올 해로 여든 셋이 되십니다. 기일은 1982년 5월 27일이니 만 53년 가까이 이 땅에서 사신 셈이 됩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에도 못 미치는 짧은 삶을 사셨지만 교육자로, 목회자로 최선을 다하셨고 마지막에는 중국선교사로 헌신하시며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친이 선교활동을 하신 홍콩은 당시로서는 중국선교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삼팔선을 넘을 때 하나님과 약속을 하다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선친은 탈북자였습니다. 선친은 복음 전파와 그로 인한 개화가 북한 어느 지역보다 빠르고 왕성했던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셨던 부모님과 위로는 음악을 좋아해 당시 지역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는 형, 아래로는 누이동생이 둘 있는 다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염색공장과 잡화점을 운영하셨는데 당시 집에 피아노가 있고 하니 선친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풍요롭게 사셨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홀로된 아픔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친은 우리에게 고향이나 가족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시지 않았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어머니께 들었는데 어머니도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결혼할 때 편지로 쓴 자기 소개서에서 본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의 물결이 이북 전 지역을 조여 왔습니다. 선친은 당시 선천 신성중학교에서 기독학생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이것이 공산당의 표적이 되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47년 무렵, 열일곱 살의 선친은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혼자 삼팔선을 넘었는데, 이것이 가족과는 영원한 생이별의 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와 가족들에게 생면부지의 서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 해 본 장사가 없었다는 말씀을 종종 농담처럼 하셨습니다. 그런 고생 가운데서도 삼팔선을 넘을 때 하나님께 한 약속이 항상 신앙의 길로 그의 삶을 이끌었고 결국은 목회자와 선교사의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선친은 서울에서 교육학과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주로 월남한 이북 사람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하던 충현교회에 출석하여 20대에 집사가 되었는데 당시 유명한 작곡가 구두회 선생의 뒤를 이어 교회의 제1 성가대인 시온 성가대 지휘를 맡아 봉사하였습니다.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셨던 큰 아버지의 영향으로 피아노, 지휘, 작곡, 트럼펫 연주 등 다양한 음악적 달란트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은 교육과 목회활동에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아버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거창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교감직을 맡고 있을 때에도 때로는 음악을 담당하여 학생을 음대에 진학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음악을 즐기고 교회 음악회며 자선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는 것도 선친의 영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선친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거창에 주둔한 773부대의 대민 홍보 업무를 맡은 문관으로 근무 하면서 거창읍교회에서 봉사 중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거창고등학교 교장이신 전영창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후에는 거창고등학교가 거창에 처음으로 사립초등학교인 샛별초등학교를 세울 때 설립과 운영에 참여 하셨는데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들을 가장 좋아하시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쩌면 그 시절이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선친이 인간적으로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거창고등학교 교감 생활
선친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69년에 거창을 떠날 때 까지 교육자로서 어린 생명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심전력을 하셨습니다. 당시 거창고등학교는 심훈의 「상록수」가 보여 주는 농촌 계몽운동사상에 기독교 신앙과 교육이 접목된 기독교 농촌계몽 운동가들의 아지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창고등학교의 설립 목적은 농촌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 태어났지만 성실하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찾아 주 안에서 바로 가르쳐 낮은 곳에 처한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친은 교육자로 살던 시절에도 관심은 늘 낮은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아프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온정 때문에 어머니가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한 번은 척추 결핵으로 입원했던 어느 여학생의 병 수발을 어머니께 부탁해, 여섯 아이를 키우며 작은 농장을 돌보는 바쁜 와중에 자주 병원을 다녀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 여학생은 나중 서울의 유명한 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뻔히 갚지 않으려는 의도나 갚을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할 때도, 거절을 못하고 빚을 얻어 도움을 주고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 어머니가 힘들어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없는 살림에 아낌없이 나누려 하시던 아버지로 인해 고생을 제일 많이 하신 분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늘 우리 가족을 따라 다녔지만 우리가 받은 신앙적․정신적 축복은 더욱 컸습니다. 매일 저녁식사 후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고 다과를 나누었는데, 이 예배는 가족 간의 깊은 연대 의식과 신앙적인 교육이 자녀들에게 저절로 전달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정예배는 항상 “예수 따라가며”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는/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지금 생각하니 이 찬송가 가사가 선친의 신앙고백이었고 선친은 그 고백대로 순종하며 살고 가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창에서의 생활은 항시 월급을 가불해야 생활이 유지되는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거창읍 변두리인 묵실에 작은 땅을 마련하여 손수 집을 짓고 사과, 자두, 복숭아, 감, 포도, 딸기, 호두 등 갖가지 과일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그뿐 아니라 토끼, 닭, 돼지, 젖소 등을 키워, 먹을 것이 귀했던 60년대에 우리 집에는 일 년 내내 먹거리가 끊이지 않아 주변에서 부러워했습니다. 새벽에 학교에 가서 영어 수업을 하고 돌아오시면 사과나무 주위에 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주고 전지작업을 하던 묵실 과수원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선친은 거창에서의 교육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신앙적 동지들과 만남을 가지며 정신적 밑거름이 된 사상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거창고등학교에 들락 거렸던 수염 긴 할아버지가 함석헌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혜영 의원의 아버지이며 한국 공동체 운동의 선구자이신 원경선 선생님도 저희 집 마당에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마당에 심은 땅콩 씨앗을 쥐가 먹어 치우는 문제를 원경선 선생님께 상의했더니 심을 때 콜타르를 살짝 발라 심으면 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만들고 운영하신 장기려 박사며 정농회(正農會) 창립자이신 오재길 선생님, 그리고 존경 받는 교육가며 대단한 설교가 이었던 전영창 선생님,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설립하신 김용기 장로님 같은 분들의 삶과 사상이 30대 젊은이였던 선친의 정신세계와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변 모두가 섭섭해 했지만 선친은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여 교육계를 떠났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이러한 결심을 일주일 전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교감의 신분을 버리고, 고등학생부터 젖먹이까지 여섯 명의 아이들을 줄줄이 이끌고 상경하셨습니다. 총신대학 연구원을 다니는 학생이면서 충현교회 전도사로 처지를 바꾸는 이 선택은 본인에게도 고뇌어린 결단이었겠지만 가족들에게는 분명 황당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홍콩을 교두보로 삼아
선친은 1970년에 시작한 목회사역을 내려놓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셨을 때 일본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선교사 비자 발급을 거절하자 홍콩으로 사역지를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후에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76년 홍콩 선교사로 부임한 선친은 홍콩한인교회를 맡아 홍콩의 한인 교포들을 대상으로 목회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홍콩한인교회를 교두보로 삼아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 연변지역에 남아 성경 보내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일에는 충현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중국선교 전문가들 가운데는 이 때 연변지역으로 전달된 성서가 북한으로 들어가서 간접적인 북한선교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친을 두고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개척자이며 첨병’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를 만났던 적도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선친은 당시 중국 내 가정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과의 서신 왕래가 이루어져 그들을 도우면서 교제를 가졌습니다.

중국의 문이 아직 열리기 전이었으나 홍콩으로의 왕래가 가능한 중국인들을 통해 성서 전달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홍콩은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가끔은 돈은 받고 물건이 전달되지 않는 배달 사고도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당시 북한을 왕래하는 연변 교포들을 통해 북한 소식을 알려고 애썼는데 안기부가 이를 문제 삼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첫 안식 그리고 영원한 안식
평생에 앓아누운 것을 보여준 적이 없는 아버지께서는 1981년 초, 치아 치료를 받던 중 잇몸이 낫지 않아 조직 검사를 하셨습니다. 검사 결과 전이가 빠르고 예후가 가장 좋지 않은 암으로 알려진 육종 암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대규모 절제 수술을 받고 잘 회복했으나 일 년이 채 못 되어 재발과 전이 현상이 나타났고, 폐와 뼈 등 온 전신에 암의 전이가 되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비록 암으로 인해 돌아가셨지만 암이 어쩌면 평생을 바쁘게 살았던 그의 인생 중 처음으로 안식할 수 있는 시간,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아버지께 주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수술 후 재발 전 까지 몇 개월은 선교지를 돌아보고 평소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가보지 못했던 곳을 방문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재발 후 병이 점점 깊어지면서 통증이 엄습하면 진통제도 거부한 채 혼자만 계시겠다고 모두를 방에서 내 보냈다고 합니다. 홀로 마지막까지 헌신의 삶을 사시던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또 그렇게 홀로 임종을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보여주신 아버지의 얼굴은 참으로 평안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혼자였지만 아버지 평생에 동행해 주신 하나님이 임종의 순간에도 아버지의 곁에 함께 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당시 저는 전주예수병원에서 인턴 수련의의 제일 바쁜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늘 다른 환자들을 돌보았지만, 정작 병중에 계신 아버지는 임종 후에 장례식장에서 간신히 뵐 수 있었습니다. 임종이 가까웠을 즈음 깊숙이 묻어 두고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얘기를 저의 어머니께 하셨는데, 17세 이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
선친은 2남 4녀를 두셨는데 누님은 고등학교 생물교사로 이제 정년을 앞두고 있고, 첫째 누이동생은 명성교회 성가대 반주자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며, 둘째 누이동생은 국제기구 세계은행에 근무하면서 제3 세계 지원 사업을 하고 있고, 셋째 누이동생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고대 영문학을 전공하고 번역가로 뉴저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내 남동생은 IT 기업의 해외담당 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팔순이 넘었지만 아직 시편 119편을 통째로 암송하시고, 교회의 권사 성가대 대원으로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를 포함해 육남매 모두 아버지가 물려주신 가훈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마음에 간직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며 주 안에서 즐겁고 복되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손들이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믿음의 유산과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들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여유 있게 한 번도 대화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이북에 두고 온 그의 가족 이야기며 자식들에 대한 당부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교육자, 목회자, 그리고 선교사로 살았던 선친은 세상 사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해 줄 만한 족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삶 속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한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삶은 길지 않았지만 복음에 순종하고자 최선을 다한 삶이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웠던 인생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선친에게 말로 삶의 교훈을 전달 받을 기회는 없었지만 그분의 삶 자체가 저에게는 교훈이고 메시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창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한두 살 무렵 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 선교사로 파송 받으셔서 가족 모두는 홍콩으로 갔고, 저는 이때부터 홀로 한국에서 학업을 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전주예수병원에서 외과수련의 과정을 밟고, 광주통합병원 외과과장을 거쳐 제주에 안착하여 종합병원의 외과과장과 제주의료원 원장을 거쳐 외과의원을 개원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동안은 제주의 시골 교회를 중심으로 주일 오후 무료진료 활동을 하다가 많아지는 이주 노동자를 위한 의료지원 네트워크를 만들어 운영했고 지금은 제주외국인평화공동체를 만들어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자를 돕기 위한 센터와 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종종 몽골, 아프가니스탄, 스리랑카로 의료선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이럴 때면 선친이 가졌던 유목민의 피가 내 안에도 흐르고 있음을 종종 느낍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내용도 모르고 아버지의 책꽂이에서 보고 읽었던 「가나안으로 가는 길」,「김교신 전집」,「막사이사이 전기」,「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우찌무라 간조」 같은 책들과 아버지의 삶의 모습이 알게 모르게 지금의 제 생각과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제가 제주에 내려와 외과의사로 사는 것,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것, 제주외국인평화공동체를 만들어 이주 여성과 이주 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 것, 친환경 농업에 관심을 가지며 제주생명농업재단 이사장을 하고 있는 것, 초록생명마을이라는 생태공동체를 꿈꾸는 것도, 다문화 가족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기획하는 것 등의 모든 활동들은 어릴 적 몸소 보여주신 아버지 삶의 궤적들을 따라 가는 일의 연속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홍성직ㅣ외과의사, 제주외국인평화공동체 공동대표, 제주생명농업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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