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 하나하나가 열리고 전경들이 들어서 길을 열어준다. 무너진 건물의 맨 안쪽으로 장례식의 영구차 행렬이 들어선다. 지진에 의해 허물어진 건물들이 마치 1년 전 모습과도 같다. 호수의 물이 밀려들어와 흙더미를 동반해서 쓰러진 폐허를 덮쳐버렸고, 도처의 빈틈을 메워버려 땅을 1미터 정도나 올려놓았다. 이는 512대지진이 쓰촨성 베이촨(北川)에 남긴 비참한 모습이다.
2009년 4월 22일 오후, 펑샹(馮翔)의 가족들은 지진 당시 사망한 그의 아들과 함께 묻어 달라는 망자의 유언에 따라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로 향했다. 삼엄하게 폐쇄된 베이촨은 이미 죽은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2008년 5월 12일 14시 28분에 발생한 지진은 2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그 중 4천여 명은 아직도 폐허 깊은 땅속에 묻혀있다. 먼 산에서 이곳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그 모습이 흉측하고 등골이 오싹할 정도이다.
그러나 펑샹에게는 이곳이 그의 고향이자,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의 추억이 있던 곳이다.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베이촨현(縣)위원회 홍보부 부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몸소 신(新) 베이촨 건설의 일선에 나섰던 사람이다. 그는 베이촨 각 지역의 최신 소식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당 간부와 취재 나온 언론매체들에게 항상 베이촨의 뼈아픈 추억과 아름다운 미래를 얘기해준다. 그가 편집한 지진 1주년 이야기 <베이촨(北川) 회고록>은 이미 샘플로 인쇄된 적이 있다. 지진 전부터 쓰던 장편 창족(羌族) 소설 <策馬羌寨>도 이미 초고를 완성한 단계이다. 그는 원래 베이촨과 함께 거듭날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진 이후 매일 밤 그가 블로그에 남긴 글들은 온통 아픔과 그리움 뿐이었다. 지진 당시 여덟 살이었던 그의 아들 펑한모(馮瀚墨)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의 아내 징쉐롄(景雪蓮)은 곡산초등학교의 교사였는데, 지진 당시 그녀는 다른 분교에서 수업을 했기에 생명을 건졌지만 중상을 입었다. 펑샹은 2년 전, 전 재산을 투자 해 베이촨에 새 집을 마련했다. (약 18만 위안) 그 집은 무려 60평이나 되는 큰 집으로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지진이 그의 모든 꿈을 산산조각 내 버렸고, 비록 본인과 아내는 살아 있지만 그는 “내 모든 기쁨과 행복, 미래에 대한 동경과 꿈은 지진에 의해 잃어버린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온 세상은 너를 그저 한줌의 모래로 보지만 넌 내게 있어 세상의 전부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고향을 바라보지만 우리 고향의 아름답던 모습은 없고 슬픔만 보인다.” 라고 말했다.
2009년 4월 20일 새벽 2시 그는 그의 블로그에 유서와 같은 두 통의 편지를 남기고 미엔양(綿陽) 집에서 목을 매 숨졌다. 지난 해 자살한 농촌사업부의 동위페이(董玉飛)에 이어 두 번째로 자살한 말단 간부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두 사람 모두 베이촨 출신 관원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살한 날은 쓰촨 지진 1주년을 20여일 앞두고 있었다. 펑샹의 죽음은 슬픔이 가득한 베이촨현의 생존자들에게 더욱 큰 아픔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죽음이 기사화 되는 것을 정부가 통제한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의 죽음에 대한 언론매체의 보도나 평론 등은 중단되었고, 그의 장례식도 단지 쓰촨성 현지와 산둥성의 언론에서만 보도를 하였다. 왜 그의 죽음과 관련한 언론보도를 차단한 것일까? 생전에 그의 블로그에 남긴 많은 내용들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죽음이 지진재난지역의 긍정적인 재건활동에 대한 주요여론과 맞지 않아서일까?
펑샹의 글 솜씨는 매우 훌륭했다. 그는 미엔양 시(市) 작가협회 이사였으며 안현(安縣)의 작가협회 총무를 맡은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블로그에는 좋은 문장과 그의 정답고 푸근한 글이 많아서인지 네티즌들의 큰 호응을 받고 있었다. 4월 20일 새벽 그는 마지막 두 개의 쪽지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나버렸다. 그가 남긴 쪽지의 내용 중에는 “만약 어느 날 내가 죽는다면 내 아들아, 그건 내게 더 없이 행복한 일이 될 거야, 난 네 엄마한테 내 유골을 곡산 초등학교의 나무 밑에 묻어달라고 할거다. 아빠가 너랑 영원히 함께 할 거야…. 만일 어느 날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부디 나 때문에 슬퍼마라. 나의 죽음을 많은 이들이 반길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난 그들의 적이니까….”
부검결과 그는 약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 두 통의 유언 비슷한 글은 네티즌의 열렬한 관심을 끌었고 토론의 장이 생겨나서 270만 명의 네티즌들이 접속을 했다. 펑샹이 왜 자살을 했는지, 아들을 잃은 슬픔 외에 과연 누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그가 애원하던 대상은 누구이며 펑샹을 죽게 만든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내고 싶어 했다.
안창허(安昌河)는 미엔양의 작가이면서 펑샹의 친구이다. 그는 펑샹을 추모하는 글을 통해 펑샹이 수차례 이같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고 밝혔다. “나한테 정부 기관이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과 자신을 늘 괴롭힌다고 말했지만 나는 항상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내게 원망과 불평을 하소연하다고 간주했다. 그런 쓸데없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문학이나 잘하라고….” 안창허는 다소 분노의 찬 목소리로 종종 펑샹에게 “자네는 정부 관직을 맡지 말았어야 했고 홍보부 일도하는게 아니였어. 그게 바로 최대의 실수였어. 자네가 진흙탕 같은 그 정부 조직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이런 비극도 없을 텐데. 자넨 그런 일에 맞지 않았어.” 그러나 안창허는 의리를 잘 지키는 펑샹이 그를 믿어주는 상사의 부탁을 거절할 위인이 못 된다고 말했다. 또 펑샹의 쌍둥이 형은 “동생은 인정이 많고 재능도 많은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용감하고 마음이 따듯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지만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했기에 할 수 없이 그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지진재난 지역은 자살과 이혼, 그리고 재혼률이 높다. 하나 밖에 없던 아이가 죽자 가정의 결속력이 없어져 이혼하는 부부가 부쩍 늘어났다. 한편으로 아이와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실종되어 재혼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지난 해 지진 발생 후 3개월 이내에 재혼한 동창들이 늘어나자 펑샹은 “인간의 사랑은 현실에 약하고 홀로 남겨진 외로움은 영원 앞에서 금새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말했었다.
펑샹 부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려고 아이를 하나 더 갖자고 약속하고 태어날 아이의 이름도 지어놓고, 술 마시는 것도 절제했다고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출처| ‘四川宣传干部冯翔之死幕后’ , 亚洲周刊 2009年5月17日 번역| 차이나 간사ㆍ중국어문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