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대(明代) 역사에서 왕조를 창업한 군주는 주원장(朱元璋) 태조 홍무제이지만 수성한 군주는 제3대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1402-24)라고 전해진다. 영락제의 정치를 재현한 데에서 중국 역사상 빛나는 한 시대로 평가하게 되는 요소 중의 하나는 지속적으로 전개된 대외원정이다. 그는 제위 기간 안남(베트남)에 출병하고 정화(鄭和)를 통하여 남해 원정(1405-1433)과 몽골족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오출삼려(五出三犁)’ 곧 몽골족 토벌을 위해 ‘다섯 차례 친정(親征)하여 세 번 몽골 본거지를 뒤엎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면서 영락제의 몽골 친정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10세기 이래, 북방민족에게 압도되어 온 중국인에게 있어, 영락제의 대외 원정 사업은 한(漢)민족의 영광을 연유한 것이다.
역사적 속에서 황제가 직접 병사를 이끌고 주변 민족을 토벌한 경우 많지 않다. 물론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423-452) 북송의 진종(眞宗,998-1022), 명의 정통제(正統帝,1449), 청의 강희제(康熙帝,1661-1722) 등이 있기는 하나 영락제 예는 실로 보기 드문 일이다.
또한 그는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그곳을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 삼아 명조(明朝)의 기반을 확립하였고, 22년의 치세 기간 동안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해 15세기 초 명나라 중심의 국제 지배 질서 체제 구축에 주역을 담당한 인물이 되었다.
건문제의 제왕 삭번책과 정난의 사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태조 홍무제(재위 1368-1398)는 전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하고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중앙집권정책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구조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분파시킬만한 요소를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홍무제가 취한 제왕분봉책(諸王分封策)이었다. 원(元)을 몰아내고 난징에 도읍한 홍무제는 강남의 곡창지대를 확보하였기에 정치상의 중심지와 경제상의 중심지의 일원화를 달성한 셈이었으나 북방의 군사방어에 대한 문제가 뒤따랐다. 장성의 요지에는 원조의 잔존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대군을 배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북변(北邊) 지역에 군대를 배치한다 해도 난징에 도읍한 홍무제로서는 그 군대를 관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북변 방위군의 통수권을 재지의 장군들에게 위임한다면, 마치 당대(唐代)의 번진(藩鎭)처럼 그들이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홍무제는 북방 군사상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해결하기 위해 북방 및 지방 요지에 자제들을 분봉하는 이른바, 제왕분봉책을 시도했다. 또한 자식들의 제위 계승 싸움을 막기 위한 발상에서도 이 제왕분봉책을 이용했다. 그는 자식들을 측근에 두지 않고 북변이나 지방의 요지에 분봉시켜 이들로 하여금 제국방위의 임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국방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자식들 간의 제위 계승 싸움을 원천적으로 막는 간접적인 효과를 기대했다.
결국 홍무제는 1370년(홍무 3년)에 장자인 의문태자(懿文太子)를 제외하고 둘째 아들부터 모두 각지의 왕으로 분봉하였는데, 1391년(홍무 24년)까지 25명의 제왕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봉지(封地)에 왕부를 두고 거주하였고 주 임무는 국토방위였기에 다수의 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그 병력은 적은 경우에는 3천여 명, 많은 경우는 1만 9천여 명이 주어졌다. 특히 장성을 따라 배치된 제왕은 이보다 더 많은 군사력을 부여받았는데, 이들을 새왕(塞王)이라 하였고, 북변 제일방위선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진왕(秦王), 진왕(晋王), 연왕(燕王)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호위군만을 통괄할 뿐 아니라 지방 일반군대에 대한 감찰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1398년(홍무 31년) 윤(閏) 5월 초열흘에 태조 홍무제가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6일 후에 그의 뒤를 이어 22세의 황태손 윤문(允文)이 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가 바로 혜제(惠帝) 건문제(建文帝, 1399-1402)이다.
그러나 건문제는 즉위 초부터 변방의 제왕들의 강력한 세력으로 인해 큰 문제에 봉착한다. 비대해진 제왕의 세력은 중앙의 황제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중 건문제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숙부 연왕이었다.
연왕은 부왕 홍무제로부터 신임을 받아왔던 인물로, 홍무제가 넷째 아들인 주체(朱棣)를 애써 국방상 요지인 북평(현 베이징)에 연왕으로 봉한 것도 지략과 용감성을 갖춘 그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건문제는 황자징(黃自澄), 방효유 등을 등용하여 그들의 의견에 따라 제왕삭번책 곧 제왕의 세력을 삭감하는 강경 방침을 결정하였다. 우선 연왕의 친동생으로서 카이펑(開封)에 봉해져 있는 주왕(周王)에게 창끝이 향하였다. 이어 제왕(齊王), 상왕(湘王), 대왕(代王), 민왕(岷王) 등의 제왕을 폐하고 서인으로 삼으면서 연왕의 수족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연왕은 자신의 차례가 임박하여 왔음을 절감하고 거병(擧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왕은 조카를 몰아내는 비윤리적 행위로 인한 민심의 향배를 걱정하였다. 이 때 측근의 요광효(姚廣孝, 1335-1418, 법명은 道衍)는 그러한 연왕에게 거병할 것을 부추겼다. 요광효는 궁궐의 간신배들을 제거하는 것은 천도(天道)라면서 연왕에게 거병의 정당성을 제기하였다. 홍무제 소천 소식을 듣고 난징으로 내려가던 중에 건문제가 선왕의 유조를 핑계 삼아 난징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한 일로 인해 불만을 품고 있던 데다가, 더욱 건문제가 그를 견제하려고 삭번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광효의 명분 제시는 거병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에 연왕은 1399년 7월 “군측의 악을 제거한다(淸君側之惡)”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워 거병하였다. 연왕은 홍무제의 유훈(遺訓)에 따라 당시 과격한 정치를 행하는 황자징 등 건문제 측의 간신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군대도 군측의 악(惡)을 제거(靖) 하여 진정시키는 군사라는 의미에서 ‘정난사(靖難師)’라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정난의 사건’이다. 이 싸움은 1399년 7월부터 1402년 6월 난징이 함락될 때까지 4년간 지속되었는데, 병력과 병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정보와 전략에 앞선 연왕이 건문제를 제압하였다. 1402년 6월 13일,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20세였던 건문제는 자신의 궁정에 불을 놓고 분신자살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남쪽으로 도주했다는 설(說)도 있으며 그의 능(陵)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영락제의 몽골 회유정책 건문제를 넘어뜨리고 정난의 사건으로 제위에 오른 성조 영락제(1402-1424)에 대해 강남지방의 민심은 흉융했다. 제위 찬탈자라는 비윤리적인 평가로 인하여 난징은 영락제의 심기가 편한 땅이 아니었다. 더욱이 영락제는 북변 방위의 필요성에 의해서 북쪽 지방을 중요시 하였다.
당시 북변 지방을 보면, 주원장에 의해 멸망한 원조가 멀리 외몽고 지방에서 세력을 폈다. 홍무 3년(1370년) 원(元)의 순제가 응창(應昌, 현 내몽고 多倫 동북지역)에서 죽은 후에 대를 이어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腊)가 몽골제국의 옛 수도 카라코룸(和林, 현 몽골국 哈爾和林)에서 제위에 올라 소종(昭宗)으로서 통치하였다. 역사에서는 이것을 ‘북원(北元)’이라 칭하는데, 소종은 적극적으로 국력을 회복하는데 노력하였으나 내부에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제위는 6대에 걸쳐 계승되었으나 건문 4년(1402년)에 징기스칸의 방계(傍系)인 구이리치(鬼力赤)가 제위를 찬탈하였다. 제위를 찬탈한 구이리치는 ‘元’의 국호를 떼어버리고 국호를 ‘타타르(鞑靼)’로 바꾸고 황제에서 칸(汗)으로 고친 후 중흥을 도모하였다.
이 무렵 몽골 서부 지역에는 신흥 세력인 오이라트(瓦刺) 부족이 대두했다. 그들은 수렵으로부터 목축으로 이행한 삼림의 사람들이었지만 세력을 신장시켜 동부의 타타르부(部)에 대항하였다.
영락제는 몽골 고원의 동쪽 타타르부의 칸 번야시리(本雅失利, 1377-1413, 在位1408-1413)에게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通交)를 유도하고, 나아가 번야시리의 투항을 유도하였다. 영락제는 몽골족으로서 명(明)에 부귀(歸附)하는 각 부족에 대하여는 더불어 금, 은, 의복, 식량 등의 물품을 하사하면서 몽골 각 부족을 회유했다. 경제적으로는 다마호사(茶馬互市), 민간교역, 관방무역 등의 방식을 취하여 몽고 각 부족과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번야시리의 태도는 완강하였다. 영락 7년 4월 번야시리는 타타르에 파견된 명의 사신 곽기(郭驥)를 살해하고 남침을 꾀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 때가지 자중하고 있던 영락제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1409년은 영락제가 연왕에서 황제로 즉위한 후 처음 나선 북경(北境)순수(巡狩)였는데, 이때에 영락제는 창핑(昌平)의 천수산(天壽山)에 능묘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이 오늘날 명십삼릉(明十三陵)이 되었다.
5차례에 걸친 영락제의 몽골 친정 영락 7년(1409) 7월에 구복(丘福)을 정로대장군으로 임명하여 10만의 대군을 출병시켰다. 하지만 이 원정군은 몽골군을 경시하고 진격하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포로의 말만 진격하던 구복의 부대가 번야시리의 매복 부대들은 패배한 것이다.
구복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락제는 마침내 북변 몽골족을 치기 위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하기를 결심하였다. 몽골세력의 확장을 막고 화이(華夷) 질서의 확립을 위해서라도, 제위 찬탈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라도 그는 몽골 원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능력 있고 믿을만한 장수들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영락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게 되었다.
영락8년(1410년) 2월 1일, 그는 그 장손 주첨기(朱瞻基)에게 베이징을 지키도록 하고, 호부상서 하원길로 하여금 보필하도록 한 후, 4일 명의 사신 살해와 변경 침입을 성토하면서 친정 조서를 반포하였다. “대(大)로써 소(小)를 격파하고, 순(順)으로 역(逆)을 취하고, 치(治)로써 난(亂)을 공격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원정의 당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몽골 토벌의 여론을 조성하였다.
동년 2월 10일,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베이징 더승먼(德勝門)을 출발하여 정식 친정에 나섰다. 이 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때 타타르의 번야시리는 대부대로 편성된 명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으로 철수하였다. 몽골군의 아로대(阿魯台)도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서 명군의 예봉(銳鋒)을 피했다.
1410년 몽고족을 정벌하고 난징으로 돌아오던 중 영락제가 총애하던 권현비(權賢妃, 1391-1410, 또는 1412)가 20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조선의 여인으로서 18세에 공녀로서 명 궁정에 들어간 그녀는 자태의 아름다움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녀가 부는 옥피리 소리는 신선의 경지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는 시문에도 뛰어났기에 영락제가 늘 함께 대동하고 다녔는데, 이 때 영락제와 함께 몽골 원정에 참여하였다가 귀경 중에 궁녀의 시기로 독살 당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묘가 오늘날 중국 산둥성(山東省) 짜오좡시(棗庄市)에 ‘첸페이무(權妃墓)’로서 남아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냥냥펀(娘娘墳)’이라 부르고 있다.
1차 원정으로 타타르부의 세력이 약해지자 이번에는 오이라트부의 세력이 대두하였다. 이에 1414년(영락 12년) 3월 영락제는 50만 군의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친정에 나섰다. 당시 후에 선덕제로 즉위한 황태손도 종군하였다. 다섯 차례의 원정 가운데 가장 격렬한 전쟁이었던 이 출정을 통해 손실도 막대하였다.
대 원정을 위해서는 막대한 국가 재정의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 차례 출정 때마다 대략 미곡(米穀) 20-30만석이 소요되었고 이것을 전장으로 운반하는 데만도 3만대의 운반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쟁 기피 풍조가 고양되어 도망병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벌 원정에 대하여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국가 재정의 부족을 들기도 하고, 군사를 동원하는 일도 무리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안남 지역에도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발동시킨 상태였기에 남북에 동시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웬만한 국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호부상서 하원길(夏元吉),병부상서 방빈(方賓),형부상서 오중(吳中) 등 육부상서와 한림학사들까지도 3차 친정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영락제는 반대하던 장관과 한림학사들을 옥에 가두고, 1422년에 3차 몽골 친정을 감행하였다. 이후 1422년부터 1424년까지 매년 감행한 원정에서는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저 사막을 배회하는 정도에 그쳤다.
영락제는 5차 원정에서 귀환하던 도중에 7월 18일 유목천(楡木川, 현 내몽고 자치구의 多倫의 서북쪽)에서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영락제의 몽골 친정은 끝을 맺었다.
몽골원정의 의의 장기간의 친정은 명조 측에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입혔다. 이것은 이후 인종, 선종의 정치에도 영향력을 주었다.
5차에 걸친 몰골원정 가운데 실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영락 1410년의 제1차 원정과 1414년의 제2차 원정뿐으로, 제3차 이후는 거의 직접적인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행군하면서 영락제의 친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었다. 원정에 투여된 재정을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얻은 성과는 별로 없다는 지적도 있다. 더욱이 영락제가 최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음을 맞이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락제가 몽골 원정을 감행한 것은 그 목적이 북방 민족의 제압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내부의 정치적 목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했다는 비윤리적 사건이 발생한 이후, 자신을 불신하는 여러 세력들을 멀리 몽골 고원까지 원정시킴으로써 그들의 반항심을 잠재우고, 더불어 자신의 정치체제에 순응시키려는 내적 정치적 의도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1421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한 것 역시 정난의 사건 이후 불안정한 정국을 해소하고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를 꾀하고자 함이었다.
정난의 사건으로 인한 정국의 불만과 반(反) 영락 세력의 대두 가능성이 있던 당시에 이루어진 수도 천도와 대외원정은 영락제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몽골세력 타도라는 기치아래 전시 비상체제를 구축하여 국내의 거국일치의 통일정책을 펴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몽골 친정으로 몽골 부족을 명에 복속시킴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통합한 화이 질서의 통합자가 되고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그의 의도가 5차례의 몽골원정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전순동| 본지 집필위원· 충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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