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배경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은 중국 만주 지역에 분포해 있다가 누르하치 시대에 그 세력이 강성하여 명(明)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1616년 누르하치는 자칭 가한(可汗)이라 칭하고, 국호를 금(金)이라 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가 1626년 전사하자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1636년 황태극은 국호를 청(淸)이라 개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청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만주 전역과 조선을 장악하고 청나라 건국의 기초를 명실공이 건립하였지만, 명을 끝내 멸망시키지 못하고 1644년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복림(福臨)이 왕위를 계승하고 연호를 순치(順治)라 하였다. 그가 바로 청 세조(世祖)이다. 그 해 5월 청은 북경을 점령하여 명을 멸하고 청(淸)을 건국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은 원(元) 이후 다시 한 번 이민족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정치가 복잡한 상황에서 천주교 선교사들은 지혜로운 선교정책과 신정부 사이에 원만한 관계를 수립하여 계속 선교정책과 신정부 사이에 원만한 관계를 수립하며 계속 선교 활동을 유지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청초(淸初)의 천주교 선교를 중심적으로 소개한다.
명(明)과 천주교의 관계
명말 중국선교를 개척한 마테오 리치가 사망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예부시랑(禮部侍郞), 심최(沈凗) 등 일부 유교 학자들은 천주교가 중국 전통의 유교와 역학(曆學)을 해친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렸다. 이 결과 1616년 명은 천주교 전도 금지령을 반포하여 모든 선교사들을 마카오로 철수시키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많은 신도들이 수난을 겪어야했다. 후에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남경교난(南京敎難)’이라 칭하였다.
1622년 명은 변방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카오에 있는 라여망(羅如望)과 양마약(陽瑪)을 초청하여 대포를 제조하도록 하였다. 그 후로 전도 금교령은 유명무실하여 선교사들은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사종(思宗)은 선교사들을 더욱 중용하여 교세는 더욱 발전하였다. 그는 등극 후 역국(曆局)을 설치하여 서광계와 이지조를 정부감독으로 임명하고, 탕약망(湯若望, J. Adam Schall Von Bell) 등 다수의 천주교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서양 천문학 등을 번역하도록 하는 등 중국 전통 역할을 개혁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641년 서양 천문학을 기초로 한 신역법 ‘대통역(大統曆)’을 완성하고 2년 후에 정식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듬에 명이 멸망하였기에 정식으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천주교 선교사 탕약망은 역학 뿐 아니라 군사학에도 매우 능통하여 사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사종은 탕약망에게 대로 20포를 제조하도록 하였는데, 시험 결과에 매우 만족하여 50포를 더 제조하도록 부탁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탕약망을 비롯하여 다른 선교사들의 황궁 왕래가 자유로 와지고 환관과 황궁 내실과의 왕래도 빈번하여, 황실 내부의 선교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10여 년 동안 황궁 내에 두 곳의 교회당이 설립되고 여러 차례의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황궁 내의 교인 수는 540명이 넘었다. 탕씨는 사종에게 상소하여 천주교를 신봉하도록 권유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종은 국가의 난세에 직면할 때마다 묵묵히 기도하고, 궁내의 불상 등을 제거하여 군수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1643년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했을 때, 사종은 장렬히 자결하고 잔여 세력은 남으로 도주하였다. 그 때 명은 일부 선교사들을 통하여 교황에게 원조를 부탁하기도 했지만, 교황은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중국선교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중국선교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에서, 명말 천주교 선교사들은 중국이 난세에 직면했을 때 진정한 친구가 되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을 발휘하여 도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명의 고위층을 감동하여 황실 내부에 신도들이 급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은 오래지 않아 멸망하여 중국선교에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청(淸)과 천주교의 관계
1643년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하자 탕약망과 롱화민 등 선교사들은 피난하지 않고 여전히 북경에 남아 교회 재산과 교우들을 보호하였다. 탕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이자성과 그의 측근들은 북경을 점령한지 3일 만에 선교사들을 만나 관대히 대해주며, 계속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순치제와 탕약망 : 1644년 순치(順治) 원년 순치제는 이자성을 물리치고 북경을 점령하여 정식으로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북경을 점령한지 3일 만에 모든 한족들에게 성 밖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탕약망은 교회당 내에 예배용구와 서적들이 너무 많아 3일 만에 이사할 수 없으니 시간을 연장해 달라고 진정하였다. 그의 진정은 청 정부에 쉽게 받아들여졌다. 청은 선무문(宣武門)의 교회당과 성문 밖의 묘지를 남겨두고, 선교사들도 계속 북경에 머물도록 특별한 배려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 주위의 민중들이 함부로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 선교사들을 보호하였다.
그 해 9월 일식 현상이 나타났을 때 중국 전통의 역법과 회회력(回回曆: 원∙ 명 시대에 중국에 전래된 아라비아의 천문서-편집자 주)은 정확한 시간을 산출하지 못하여 많은 착오를 일으켰지만, 탕약망은 서양 역법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의 일식 시간을 매우 정확히 산출하여 역법의 우수성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청 정부는 서양 역법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를 정식 국가의 역법으로 채택하였으며, 탕약망을 흠천감(欽天監: 천문대장)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이후부터 청의 도광(道光) 황제 때까지 거의 200년 동안 흠천감의 감독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담당하였다. 탕씨가 제정한 신역을 ‘시헌역(時憲曆)’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청 정부의 중요한 역법이 되었다. 청이 이토록 쾌히 서양 역법을 채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역법의 우수성 뿐 아니라, 이 기회에 명의 잔여 세력들을 제거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좋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탕약망은 중국의 정권이 바뀌는 복잡한 상황에서, 서양 역법을 통해 선교사들이 계속 북경에 머물러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획득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청은 또한 역법 개혁의 구실로 구세력을 무리치고 신정부의 새로운 면모를 확신하는 절호의 정치적 계기를 갖게 되었다.
순치제는 탕약망 등 서양 선교사들을 특별히 총애하였다. 1646년(순치 3년) 탕약망에게 태상사사경(太常寺沙卿)이라는 관직을 하사하고 9년에는 선무문 동쪽의 땅을 하사하여 새로운 교회당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 교회당이 완공되었을 때 순치는 ‘흠숭천도(欽崇天道)’라는 편액을 하사하였고, 또한 그 이듬해 ‘통현교사(通玄敎師)’라는 호를 탕에게 하사하였다. 순치제가 서양 선교사들을 얼마나 중용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도하여 1650년(순치 7년)에 예수회 신도들의 수는 15만을 능가하였다. 이는 명말 1636년 신도의 4배가 되는 수이다.
제2차 교난 : 1661년 순치제가 죽자 8세의 강희제가 그 뒤를 이었다. 왕권이 바뀌는 기회를 이용하여 전에 흠천감에서 물러난 중국의 관료들은 선교사들을 시기하여 서양 역법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제기하였다. 이로써 선교사들은 다시 한 번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구 관료 중에 양광선(楊光先)은 벽사론(闢邪論)을 제기하여 서양 역법과 천주교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사교(邪敎)가 민중을 현혹하여 중국 전통 예법을 해친다는 것. 둘째, 선교사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하여 마카오에 군사와 무기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셋째, 서양 역법이 너무 황당하여 이를 채용하는 것은 국가의 수치라는 것 등이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흠천감이 영친왕의 장례 일자를 잘못 택하여 순치제가 죽었다고 억지 상소를 올렸다.
1665년(강희 4년) 이를 받아들인 청 정부는 천주교 전도 금지령을 내렸다. 이 결과 70세 고령의 탕약망이 체포되어 능지처참의 사형 언도를 받았고, 20여 명의 서양 선교사들도 감금되었다. 그리고 중국인 신도중에 관원들은 모두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을 역사가들은 ‘제2차 교난(敎難)’이라 칭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탕약망 등의 형을 집행하기 전날 밤 북경에 큰 지진이 일어나자, 청 정부는 하늘이 노한 징조라 하여 탕약망 등을 석방하고 그 외의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추방하였다. 탕약망은 석방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또다시 양광선을 중심으로 한 구 관료들이 흠천감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2년 후 역법 산출에 많은 착오를 일으켜 서양의 시헌역이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양광선은 무고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나이가 많은 관계로 산동으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강희제는 탕약망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융중하게 제사하도록 특별히 배려하였다. 또한 그는 축출되었던 10여 명의 관료들을 다시 복귀시켰는데, 특별히 서양 선교사 남회인(南懷仁, Ferdinandus Verbiest)을 흠천감 감독으로 초빙하여 시헌역을 계속 사용하게 하였다. 이로써 제2차 교난은 일단락되었고, 천주교는 강희제의 보호 아래 다시 한 번 부흥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강희제와 남회인 : 교난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마카오로 추방된 20여 명의 선교사들은 여전히 선교의 자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회인은 누차에 걸쳐 강희제에게 상소하여 금교령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강희제는 조정의 많은 대신들이 여전히 반대한다는 이유로 좀 더 기다리라고 안위하였다. 황제는 천주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남회인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역사가들은 이들의 관계가 순치제와 탕약망의 관계를 훨씬 능가했다고 평한다. 강희제는 남회인이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자기와 항상 함께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어쩌다 기분이 나쁠 때도 남회인만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고 하니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교난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1670년(강희 9년)에 드디어 금교령이 해제되었다. 마카오에 있던 20여 명 중 생존한 19명의 선교사들도 본래의 선교지에 돌아가 계속 선교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남회인은 흠천감 감독으로 있으면서 「영년역서(永年曆書)」32권을 저술하였고, 또 강희제의 명을 받들어 수백 대의 대포를 제조하여 황제의 신임을 돈독히 받았다. 강희제는 남회인에게 흠천감 감독과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 등 정2품 고위관직을 주어 승진시키고, 그가 죽은 후 근민(勤敏)이라는 시호까지 하사하였는데 이는 전에 없던 유일한 대우였다. 1692년 3월 17일 강희제는 공문을 반포하여, 천주교는 사교가 아니며 선교사들이 민중을 현혹하는 일은 결코 없으니, 각처의 교당을 잘 보존시켜 주고 민중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아편전쟁 이전에 청 정부가 천주교를 인정한 유일한 관방 문서였다.
1687년(강희 26년) 남회인은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희제는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하며 그를 위해 비석을 건립하여 널리 기념하도록 하였다. 남회인은 강희제 집정 초기 20여 년 동안 교난을 극복하고, 천주교를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후에 역사가들은 마테오 리치, 탕약망, 남회인을 명말 청초 천주교 3대 거두(巨頭)라 칭하였다.
강희제는 천주교 뿐 아니라 서양 근대 수학, 의학, 천문학과 지질학 등에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이를 습득하기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남회인 외에도 스페인 선교사 서일승(徐日昇, Ferdinand Verbiest), 프랑스 선교사 백진(白晉, Joachin Bouvet) 등을 황궁으로 초청하여 서양 과학 지식을 습득하고, 그들로 하여금 서양 과학에 관한 서적들을 번역하게 하였다. 또 백진과 덕마(德瑪, Romain Hinderer) 등에게 전국 각성을 측량하여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도록 명하였다. 그들은 10년의 노력 끝에 지도를 완성하였고, 강희제는 이를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라 칭하였다. 이것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경도와 위도를 사용하여 작성한 지도이다. 강희제와 천주교 선교사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천주교는 전에 없는 발전을 하게 되었다. 아래의 통계는 그 당시 천주교의 발전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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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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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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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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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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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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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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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88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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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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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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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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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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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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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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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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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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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지 거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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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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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3
|
1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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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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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78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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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시대의 천주교 신도수>
예의지쟁(禮儀之爭)의 발생 : 명말 청초에 천주교 포교 활동을 주요한 단체는 예수회, 도미니크회와 방지거회인데, 위의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수회는 신흥 단체여서 그 전도 방법이 혁신적이며 관용적이었고, 주로 문화적인 방법으로 상류층에 접근하여 전도하였다. 이들이 서양의 과학 지식을 전도의 매개체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신학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미니크회와 방지거회는 젊은 층과 빈민선교를 강조하였다. 또 그들은 구원론을 중시하여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죄의 문제를 강조하였으며, 문화를 통한 우회적 전도보다는 단도직입적인 전도 방법을 채택하였다. 직접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차이는 이후 천주교 내부에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어 어렵게 개척한 중국 천주교 선교를 또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예의지쟁(禮儀之爭)’사건이다.
명말 마테오 리치가 중국선교를 개척할 때 주요 선교 대상은 상류층의 유교 지식인들이었으므로, 마테오 리치는 조상과 공자 숭배에 관해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그는 이러한 유교의식이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조상들을 기념하는 중국 고유 전통의 행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국의 천주교인들이 이러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리치의 이러한 선교 정책이 주효하여, 천주교는 중국 전통의 유교문화와 별다른 충돌 없이 순조롭게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33년 푸젠(福建)에 와서 전도한 도미니크회 선교사 모라레스(Morales, 馬拉來斯)는 예수회의 이러한 선교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는1643년 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열일곱 항목의 반대 성명서를 선교회에 제출하여 예수회를 공격하였다. 선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토론하고 그 결과를 교화에게 보고하였다. 1645년 교황은 예수회의 선교 금지령을 발표하였다. 1651년 예수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말티니(Martini, 衛匡甫)를 교황청에 보내 충분히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교황은 이에 지지하여, 1656년 교황청은 이를 허락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처럼 교황청도 이 문제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1700년 예수회는 강희제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여 황제의 의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는 그것은 종교행위가 아니며 조상을 섬기는 중국 교유의 미풍양속이라고 명확히 답변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측들은 종교 문제를 세상의 황제에게 제기한 데 불만을 품고 교황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1704년 교화은 다시 예수회의 선교를 금지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토울논(Charles Maillard de Tournon, 多羅)을 중국에 파견하여 청과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황청의 강력한 입장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이듬해 토울논은 사신 자격으로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였다. 강희제는 매우 호의적인 태도로 그를 영접하였고, 직접 열다섯 차례에 걸쳐 궁중에서 진지하게 이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토론하는 과정에서 사신이 그와 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음을 알고, 토울논을 북경 밖으로 추방시켰다. 토울논은 남경에 와서 교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교적(敎籍)을 박탈시키겠다고 강력한 입장을 표하였다. 1706년 강희제는 토울논을 마카오에 감금시키고, 정부에서 발행한 인표(印票)를 소지하지 않은 선교사는 중국에서 전도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토울논은 얼마 후 마카오 감옥에서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교황청과 강희제 사이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어 서로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비록 교황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유럽인들은 중국의 예절을 토론할 자격이 없다.”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한 강희제의 마음을 끝내 돌이키지 못했다.
강희제에 이어 등극한 옹정(擁正)황제는 더욱 보수적이어서 흠천감에서 근무하는 소수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 모두 추방시키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등 전면적으로 선교를 금지하였다. 이에 1775년 교황청은 예수회를 해산시켰다. 이로써 중국선교는 다시 한 번 길고 깊은 동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론
결과적으로 보면 예의지쟁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중국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중국을 연구하는 등 한 때 유럽에서 중국학이 유행하여 유럽인들의 중국 이해에 다소의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하여 감당해야 하는 대가가 매우 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의지쟁은 매우 복잡하여 몇 사람의 의견과 토론으로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교황과 강희제 사이에 이성보다는 감정이, 이해보다는 고집이, 사랑보다는 권력이 더욱 심하게 작용했던 것을 본다. 오늘날 중국선교를 감당하는 우리들이 이와 같은 역사의 과오를 재현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예수회의 상류층 선교도 깊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에 왔을 때도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거쳐야 했지만, 불교는 일찍이 일반 민중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선교의 기초를 세웠기에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중국인들의 종교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강인규∥타이완 중위안대학(中原大學)교수.중국교회사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