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조약과 북경조약 1856년 시작된 제2차 아편전쟁은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 관원의 홍콩 선적의 애로호에 대한 해적 혐의자 검색이 영국 국기를 모독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영국이 중국으로 출병하였고, 프랑스도 광서성(廣西省) 서림(西林)에서 샵들렌느(A. Chapdelaine) 신부가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삼아 중국으로 출병하였다.
영불연합군 함대는 광주만, 장강 하류를 공격한 다음 북상하여 천진(天津)으로 진격하였다. 수도 북경이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한 청조는 천진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각국과 맺은 ‘천진조약’은 북중국과 내륙 지역으로 개항장을 추가하여 중국 통상의 문호를 더 크게 열었고, 중국 내지에서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보장하는 획기적인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천진조약은 청조 수구파에 의해 묵살되어 비준되지 못하면서 선교 허용의 조문은 시행되지 못하였고, 재개된 전쟁으로 영불영합군이 북경 자금성을 점령한 뒤 각국과 맺은 ‘북경조약’으로 비준받게 되었다.
이로써 1724년 이후 유지되던 천주교 금령은 중국 전역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조약을 체결한 나라의 선교사들은 중국 각 지역으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중국 각급 지방관은 선교사들을 보호할 의무를 지게 되었고, 특히 프랑스는 금교 기간 이전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산(토지와 건물)을 회수 또는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선교 역량의 획기적 개선이 이루어졌다. 비로소 천주교와 기타 서양 기독교 각 종파의 중국선교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확보되었다.
1860년 이후 중국선교는 기존의 영국과 프랑스에 중심이던 상황에서 미국 각 선교단의 활동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와 데이비드 생키(David Sanky, 1840-1908) 등이 이끄는 왕성한 신앙부흥운동이 자극제가 되어 감리회, 침례회, 북장로회, 성공회 등 각급 선교단체의 중국선교 열기가 크게 높아졌다.
1860년 이후 19세기 말까지 중국 개신교회 선교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국성공회의 사무엘 슈헤레스체프스키, 대영침례회 소속 티모시 리처드, 중국내지선교회를 조직하여 이끈 허드슨 테일러 등을 꼽을 수 있다.
사무엘 슈헤레스체프스키 사무엘 슈헤레스체프스키(Samuel I. J. Schereschewsky, 施約瑟, 1831-1906)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리투아니아 타우라게(Taurage) 태생의 유대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대 랍비 교육을 충실히 받았고, 19세 되던 해에는 독일(현재의 폴란드) 브랏슬라(Wratisla)대학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1854년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뉴욕에 거주하면서 처음에는 침례회에 소속하였다가 장로회로 이행하였고, 피츠버그 신학원에서 공부하였고, 뒤에 미국성공회로 개종하여 뉴욕의 성공회신학교(Gener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였다. 또 1859년 5월 3일 해외선교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선발되었고, 7월 17일 뉴욕의 성조지교회(St. George’s Church)에서 윌리엄 분(Willam Hones Boone) 주교로부터 안수를 받고, 그와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여 그해 12월 21일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1860년 10월 28일 분(Boone) 주교로부터 상해교회 부설 선교학교 보임을 받았고, 1861년경부터 성경 번역 사역을 전개하였다. 시편을 먼저 상해어로 번역하였고, 존 버든(John Shaw Burdon) 선교사와 함께 일반 기도서를 북경어로 번역하였다. 1862년부터 북경으로 옮겨 번역 사역에 헌신하였다. 1874년에는 구약전서를 번역 출판하였는데 매끄러운 문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번역 성경은 1878년에 북경위원회에서 번역한 신약전서와 합하여 영국성서공회를 통해 출판되어 이후 40여 년간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는 건강 문제로 1875년 상해 주교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복귀하였고, 미국에서 중국의 교육 선교를 위한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879년 성요한대학(St. John's College; 뒤에 St. John's University로 개명)을 개교하였고, 1883년까지 상해 주교로 일하였다. 건강이 나빠진 그는 주교직을 사임한 이후 성경 번역 작업을 이어 나갔고,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신구약 전서에 대한 중문 수정본을 완성하였다. 이 성경은 1902년에 미화성경회(美華聖經會)를 통해 공개적으로 간행하였다.
만년에 그는 일본에 건너가서 지내다가 1906년 10월 15일 일본 동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장 위대한 중국어 성경 번역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사진 설명 및 출처 | 사무엘 슈헤레스체프스키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