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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3 통권 263호     필자 : 변성래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국공내전》 _신중국과 대만의 탄생
_이철의 / 앨피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국공(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하 국공 내전)은 현재의 중국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국공 내전은 1927년 이후 중국공산당이 당시 중국의 중앙정부였던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상대로 벌인 내란 혹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두고 일어난 내전을 말합니다. 

이 책은 특히 1945~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중국의 패권을 놓고 벌인 내전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전쟁(解放戰爭)이라고도 부릅니다. 공산당과 싸웠던 국민당은 반란을 평정한다는 뜻의 ‘동원감란(動員戡亂)’이라고 불렀습니다. 

국민당과 장제스의 입장에서 이 전쟁은 반란을 평정하고 비적(匪賊)을 토벌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5년 동안 양쪽이 각각 5백만 명이 넘는 병사를 동원했으며, 중국 대륙 전체가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됩니다. 

국공내전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 많이 목격되고, 의문점이 많이 생깁니다. 국민당의 표현으로 비적과 다름없는 무리였던 공산당이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과정, 중일전쟁 때 일본의 점령지에서 공산당이 해방구를 넓혀가고 늘려갔던 과정, 중국 농민들은 왜 공산당을 적극 지지하며 따랐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절 공산당이 지금의 공산당과 같은 것일까? 과연 그들이 끌고 나아가고자 하는 중국은 어떤 모습일까?


국공합작부터 국공내전까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왕조가 붕괴합니다. 1912년 쑨원(孫文) 등이 영도한 혁명당원들은 민족, 민주, 민생주의를 내걸고 광저우(廣州)에 국민정부를 세웁니다.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창립한 공산당은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하여 국민당 대표회의에 참가합니다. 1925년 쑨원이 죽자, 국민당 내 좌우 대립이 격화되어 지주와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는 장제스가 국민당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공산당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던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깨뜨리고 (그 뒤로도 계속) 상하이에서 공산당원과 노조원들을 학살하고 탄압하면서 국공 간 군사 대결이 시작됩니다. 이때 노동운동과 북벌을 통해 세력을 키워가던 공산당은 수많은 당원과 노동자를 잃습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농민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국공합작 시절인 1924년 국민당 선전부장 대리를 맡았던 그는, 농민운동 강습소를 주관하며 농민 조직과 농민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경험을 쌓습니다. 그는 공산당 안에서 농민운동위원회 서기 등을 맡으며 농민운동에 주력합니다.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이 농민을 주목하고, 농민의 환심을 얻게 된 것은 최종 우승의 원동력이 됩니다. 지주와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았던 장제스와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시안사변(西安事變)과 2차 국공합작

일본이 동북에 이어 화북까지 먹어 치우며 중일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장제스는 일본의 침략을 막는 것보다 공산당부터 소탕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장제스 휘하 장쉐량(張學良)과 양후청(楊虎城)이 항전 대신에 내전을 재촉하는 장제스에게 불만을 품고 1936년 말 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킵니다. 결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함께 항일투쟁에 나섭니다. 이때 마오쩌둥이 당 간부들에게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7할은 우리의 발전을 위해 쓰고, 2할은 국민당에 대응하며, 1할은 일본군과 싸우는 데 써야 한다.” 결국 일본의 침략을 위해 쓰는 것은 1할이고 나머지 9할은 국민당과 맞서면서 공산당의 힘과 덩치를 키운다는 것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공산당은 심혈을 기울여 근거지를 확대하고 병력을 보충하며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국민정부의 무능과 부패

국민당의 참패 원인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국민정부의 부정부패입니다. 이 무렵 미국은 국민정부에 엄청난 재화를 쏟아부었습니다. 정치적 이유로 국민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컸습니다. 그러나 국민정부 인사들 사이에서 부패는 하나의 생활방식이 됩니다. 국채와 미국의 차관을 둘러싼 스캔들에는 장제스의 측근까지 얽혀 있었습니다. 유엔 구제부흥기구(UNRRA)의 원조물자는 중국에 전달된 뒤 곧바로 암시장에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전쟁(내전)이 길어질수록 장제스는 자꾸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습니다. 반대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근거지에 뿌리를 내리며 내전에 적응해 갔습니다. 공산당은 국민정부 통치 지역에서 유격대를 설립하여 후방을 교란했습니다. 


민심을 잃는 자 전부를 잃는다 

역사에 ‘만약에’가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만약에 국민당이 이겨서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더불어 전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중국 땅덩어리도 넓은데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을 남북으로 가르던, 동서로 가르던 분할 통치를 했더라면 지금 중국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장제스는 도시, 마오쩌둥은 농촌이 터전이었습니다. 장제스는 난징(南京), 상하이, 베이징(北京), 충칭(重慶) 등 대도시에 근거를 두고 자본가와 지주들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상하이와 난징에서 민주동맹 인사들과 학생들이 내전 반대 시위를 벌여도 장제스는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내전 기간에도 인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족에 대한 대우도 안 좋았다고 합니다. 내전이 종료되면 조선족들을 모두 한국으로 보내겠다고 했답니다. 그 조선족 중 상당수가 6·25 때 중공군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났습니다. 장제스는 3개월이면 비적(공산당)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전황은 혼란스러워집니다. 해방군(공산당)의 소모전에 말려 1백만 명 가까운 국군(국민당군) 병력이 사살되거나 부상을 합니다. 해방군은 국군 포로를 보충병으로 편입시키고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여 갈수록 전력이 증강됩니다. 1947년 6월경 양쪽 병력은 해방군 195만 명, 국군 373만 명이었습니다. 민중들에게 내전은 대재앙이었습니다. 수만 명에서 수십만 대군이 맞붙은 전장과 주변 지역은 초토화하였고, 농사를 짓지 못하여 여러 성(省)에서 수많은 인민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청년들이 군대에 징집되어 노인과 아녀자들이 농사를 맡았습니다.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전선 지원에 동원됩니다. 


신중국(新中國) 탄생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합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마저 함락시켰습니다. 12월 10일 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成都)에서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탈출했고, 12월 2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





▩ 변성래 | 중국을 앞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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