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기후위기 찾기?
이제 ‘기후위기’는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포괄적 용어(umbrella term)가 되었다. 기업경영에서도 이미 ESG (Environmental(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의 첫 글자를 조합한 단어로 기업의 친환경 경영, 사회적 책임, 투명한 지배구조 등을 의미) 방침에 따라 생태정의를 추구하는 상품생산과 공정 과정을 추구한다. 학교에서도 기후위기와 관련된 생태교육 프로그램들이 방과후 프로그램과 정규수업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또한 국제 문제에서도 탄소배출을 둘러싼 분쟁과 갈등이 주요 화두가 되었다. 평화담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아니라 생태계에 대한 인간 중심적 혹은 지배적 태도를 비판하는 ‘녹색평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종교와 신학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가 인간의 자연지배 담론과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의 원인을 창세기 1:28에 기초한 서양기독교 전통에 돌린 이후로 신학, 특히 성서학 분야에서는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이혼이나 살인과 같은 보편도덕의 문제처럼 직접 성서에서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생태학적 눈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20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하나의 읽기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인간 지배를 정당화하는 본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성서에서 자연의 회복과 피조 세계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본문이 존재하는가? 이와 관련된 수많은 해석학적 질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생태정의행동(eco-justice activity)’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서적 혹은 기독교적 근거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생태정의 활동이 단순히 생태학적 동기에 의해서 출발했다면, 그것은 성서적 행동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생태학적 행동을 성서 읽기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한다면 그것은 왜곡 혹은 아전인수적인 읽기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우리는 성서에 충실하면서 우리의 생태정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생태학적 성서 읽기를 추구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현실 문제와 성서 사이의 어두운 간극(dark interval)을 연결하기 위한 해석학적 다리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위험 요소 제거하기
이러한 다리건설을 위해 먼저, 생태학적 눈을 흐리게 만드는 신약성서 “안”의 위험 요소를 다루어 보자. 최근 많은 신약학자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이 생태학적 담론과 행동이 교회에서 수용되는 데 장애가 되어 왔다는 점에 동의한다. 신약성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하면서 지금 현실의 땅이 불심판(벧후 3:10-13; 계 6:12-27, 8:1-13)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죄악의 땅인 현실 피조 세계를 보존할 의무가 없어진다. 특히 초기 한국교회의 형성 시기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서양선교사로 인해 대다수 한국교회는 생태학적 윤리에 대해 거부하거나 무관심을 보여주었다.
신약성서 안에는 우주적 차원에서의 구원, 즉 창조 세계의 갱신과 화해에 관한 다른 종말론적 본문들이 존재한다(막 1:12-13, 롬 8:19-23, 계 22:1-5). 이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파괴에 관해 언급하는 종말론적 본문을 생태학적으로 읽으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계시록 4-20장에 이르는 ‘일곱’ 시리즈에서 생태계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환상 가운데’ 묘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피조 세계의 파괴는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계시록은 분명히 밝힌다. 말하자면 노아의 홍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과 욕망이 결국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위험 요소는 신약성서 안의 영육이원론의 언어와 개인에게 집중된 구원론이다. 신약성서는 세계이원론[심판받을 현세대와 다가올 구원의 시대-흔히 ‘하나님 나라’로 표현됨]을 근간으로 하는 묵시문학이라는 모태에서 태어났다. 특히 바울서신과 요한 문서는 교회 내의 신앙적인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육이원론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바울과 요한을 포함한 신약성서는 대부분 이스라엘 성서[구약]와 그 신앙 위에서 형성되었으며, 특히 ‘창조신앙’을 그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영육이분법 언어를 쓰더라도 영육일원론과 선한 창조의 기조를 유지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영육이원 구분법은 (현시대의 문제와 모순을 비판하기 위한) ‘기능적’ 이원론이지, 플라톤철학과 같은 ‘존재론적’ 이분법이 아니다. 요한은 ‘육신’적인 것을 강력하게 저항하지만 로고스이신 예수는 오히려 ‘육신’을 입고 나타나며 더욱이 육신을 입고 부활한다. 바울 역시 소위 영육이원론에서 피어난 ‘영적 부활론’과 개인구원론에 빠진 고린도 교인에 맞서서 ‘공동체 갱신’과 ‘몸의 부활’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기존의 ‘세계’와 부활의 세계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 개인에만 초점을 맞춘 구원론은 생태계 보존의 필요성과 그 활동에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개인구원을 넘어, (교회/인간) 공동체의 구원과 회복, 나아가서 우주적인(혹은 생태학적인) 구원과 갱신에 관한 언급이 다수 존재한다(특히 고후 5:17, ‘새 창조’, 롬 8:19-22, 골 1:15-20). 그리고 이 세 층위의 구원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인간의 구원자이지만 인간만의 구원자는 결코 아니다.
신약성서의 생태학적 영성
신약성서의 중요한 제자도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고전 11:1). 그러나 1세기 지중해 문화권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남성으로 살았던 예수는 모든 윤리 영역에서 직접적인 ‘행동 모델’이 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행동 안에서 담긴 행동의 동기, 특히 신앙적 동기를 추적해야 하며 그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영성은 인간행동과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power)’이다. 특히 기후위기가 현대사회의 문제라는 점에서 신약성서 안에서 ‘생태학적 영성’을 찾아, 그것을 생태정의 행동을 위한 동기로 설정해야 한다. 첫 번째 신약성서 영성은 하나님 나라의 영성, 즉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며 거기에 참여하는 영성이다. 예수는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자연현상을 비유로 제시한다. 예수의 청중이 대부분 1세기 갈릴리의 농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익숙한 자연현상과 자연에 대한 인간 경험을 비유로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막 4:3-9par), 스스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막 4:26-29), 겨자씨 비유(막 4:30-32par), 무화과나무 비유(막 13:28), 나무와 열매의 비유(마 7:16-20/눅6:43-45), 가라지 비유(마 13:33) 등이 있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 중심적인 구원,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도구적’으로 활용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 속에서 자연 세계와 하나님 나라를 ‘비유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예수는 자연 세계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듯이 자연 세계 역시도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린다(롬 8:22). “만약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구원자 예수님을 환영하는 만큼 피조물들도 간절히 구원자 예수님을 기다리며, 그를 찬양하는 ‘목소리(Earth’s Voice)‘, 자기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cf. 시 69:34; 96:11-12; 98:7-8).
두 번째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영성은 ‘가난의 영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의한 구조로 인한 비자발적 가난과 ‘제자도’에 따른 자발적 가난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를 거부해야 하지만 후자는 신약성서 제자도의 핵심이다(눅 14:33). 따라서 가난의 영성은 ‘자발적 가난’을 통해 오직 하나님에게만 충성하며 맘몬의 지배를 통해 구조화된 탐욕과 착취의 경제를 거부한다(마 6:24/눅16:13).
‘공중의 나는 새’(마 6:26)와 ‘들의 백합화’(마 6:28-29)라는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예수는 의식주보다 하나님 나라가 우선됨을 강조한다(마 6:33). 그러나 이것이 의식주 혹은 물리적 피조 세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예수는 자연 질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한다. 문제는 ‘내일의’ 의식주에 대한 염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거나 거부하는 맘몬에 충성하는 인간 탐욕의 결과이다. ‘만나 경제’와 마찬가지로 ‘가난의 영성’은 ‘오늘의 양식’(마 6:11/주의 기도)에 만족하며, 내일의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린다. 생태학적 눈으로 본다면 가난의 영성은 나의 필요, 사실상의 필요 이상의 소리를 거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인간의 풍요로움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가난은 물질의 문제이지만 이웃의 가난은 영적인 문제이다’라는 샤를르 드 푸코의 말을 생태학적으로 전환하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창조 세계가 우리의 풍요로움으로 가난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생태학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문제가 된다.
바울 역시도 ‘헌금’ 사역과 관련해서 이 가난의 영성을 이야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 그리스도의 ‘자발적 가난’은 ‘균등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 역시 자발적 가난을 통해 이웃의 가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고후 8:13)라고 헌금사역의 목적을 설명한 뒤 이에 대한 두 번째 근거로 바울은 균등의 ‘만나 경제’를 제시한다(고후 8:15). 물론 바울의 1차 독자는 고린도 교인들이지만 이 본문을 가난의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어낸다면, 우리의 탐욕적 소비와 착취의 경제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가난해진 창조 세계를 위해 더욱이 ‘생태적 균등’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자발적으로 가난해져야 하고, 생태정의를 위한 “다른 형태의 헌금 사역”을 해야 한다.
인간만이 풍요를 누리고 그 넉넉한 삶을 위해서 모든 창조 세계가 희생, 착취당하고, 가난해지는 ‘풍요의 경제’는 출애굽의 만나 경제의 영성, 예수의 ‘일용할 양식’의 영성, 바울의 헌금사역 영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발적 가난을 통해 생태적 균등을 이루고, 나눔을 통해 사랑해야 할 이웃은 인간을 넘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생태계로 확장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9-37)에서처럼 이웃사랑은 그 대상 선정보다 ‘사랑의 행동’이 우선된다. 곧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우리에게 이웃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사랑할 대상을 먼저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웃인 창조 세계가 우리의 궁핍한 처지를 보고 나서서 도와주었다면 그는 우리의 이웃이다. 이제 우리가 우리로 인해 상처 입은 ‘창조세계’를 사랑해야 한다.
세 번째로 신약성서에 드러난 영성은 ‘공동체 영성’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신약성서는 개인 구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 공동체, 모든 창조 세계를 포함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이 신약성서가 포괄하는 구원 영역이다. 더욱이 신약성서의 공동체는 인간공동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1세기의 교회는 남녀,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성별, 민족, 계급을 뛰어넘는 하나 됨을 보여주는 공동체였다(갈 3:26). 그러나 에베소서의 저자는 만물의 창조-중재자(이신 ‘우주 그리스도(cosmic Christ)’를 언급하면서 교회 역시 우주적으로 확장한다(엡 1:21-23).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있고, 그가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만물, 다시 말해서 모든 창조 세계가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창조 세계가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유기체적 창조 세계’ 이해는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린 화이트가 지적했던 자연 지배적인 태도, 인간 중심주의적인 자연의 착취는 성서 본문(특히 창 1:28)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이 본문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서 출발한 것이다. 전체적인 성서는 인간 역시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창조 세계에 속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것은 로마서 8:19-22에서도 알 수 있다.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피조 세계’는 탄식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들의 나타남이 피조 세계가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는 ‘구속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야기와 계시록의 종말환상에서는 인간의 죄악과 타락으로 인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심판을 받는다. 모든 창조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으로 생태계가 탄식한다면,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지만 동시에 인간 역시도 생태학적 종말을 심판으로 되돌려받는다.
우주적 교회는 인간공동체로 한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노아계약(창 9:8-17)에서는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체로 확장된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창 9:9-10)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롬 8:22). 그리고 이 하나님의 구원계약 위에 세워진 교회에는 모든 창조 세계가 포함된다. 만물의 창조-중재자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담론은 이러한 공동체 영성에 위배될 뿐더러 더욱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영성의 근간을 이루는 신약성서 영성의 핵심은 ‘창조신앙’이다. 신약성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경험에서 출발한다. 바울이 이야기하듯, 창조와 부활은 다르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이다(롬 4:17).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면, 신약성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분명 ‘선한 창조 세계’이다. 따라서 기독교신앙은 이원론을 거부한다. 이원론을 언급하지만 요한과 바울 모두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인 ‘창조신앙’, 특히 ‘선한 창조’를 근간으로 한다. 인간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피조 세계가 썩어짐에 복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요한과 바울은 ‘선한 창조’의 기조를 유지한다. 특히 세상(cosmos)에 대한 요한의 태도는 ‘저항’과 ‘사랑’ 사이에서 증폭하기 때문에 본문의 전체 맥락에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이 저항하고 있는 ‘우주(세계)’는 현실 세계 자체가 아니라 죄악으로 인해 그들의 우주적 구세주(the Logos)를 거부한 세계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 우주적 구원자는 ‘자기 백성’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요 1:3) 세계 자체(요 3:16)를 사랑하고,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세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요 1:14).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세계” 안으로 파송된다.
또한 요한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원론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천상적 존재’인 예수는 생태학적 언어로 신적 정체성과 사역을 표현한다. 소위 ‘나는 ~이다(ego eimi)’ 말씀에서 예수는 자신을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생명의 빛’(8:12), ‘양의 문’(10:7), ‘부활/생명’(11:25), ‘길/진리/생명’(14:6), ‘포도나무’(15:1)(cf. 선한 목자[10:11])로 묘사한다. 특히 요한에서 생명은 인간의 삶을 뜻하는 ‘비오스’가 아니라 생태학적 생명인 ‘조에’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의 구원론이 ‘우주적 차원’의 갱신과 회복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조신앙에 근거해서 ‘구속’을 다시 본다면, 우리는 창조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묵시종말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히려 신약성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것이 완전히 파괴된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탐욕으로 파괴된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만물의 구원, 만물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엡 1:10)는 시작되었고 따라서 창조 세계를 거부하고 ‘지구를 탈출하는’ 구원론에서 우리는 탈출해야 한다. 이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라는 주의 기도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
피조물의 탄식에서 생명의 원무(dancing around life)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우리로 인해 파괴된 이 창조 세계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리스도인이 ‘죄’와 더불어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인 생태계를 파괴하는 죄, 우리의 탐욕적 소비를 충족하기 위해 이웃을 착취하고 가난하게 만드는 죄,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맘몬의 방식으로 ‘풍요롭게 사는’ 죄, 이러한 생태학적 죄와 더불어 살 수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넉넉함을 위해 가난해진 것처럼 우리도 이제 ‘자발적인 생태적 가난’으로 우리의 생태적인 제자도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생태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이제 우리의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 ‘생태적 십자가’를 지고 나갈 차례이다. 그렇게 될 때 만물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요 1:3)를 향해 모든 피조물이 ‘자기 목소리(Earth’s voices)’로 웅장하게 부르는 찬양을 듣고,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즐겁게 뛰어 도는 ‘생명의 원무’에 참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유효민 | 부산장신대 신약학 박사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