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세계관은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조건부 의식(意識)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결국 비인격적인 세계로 귀결된다. 불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음의 번뇌 그리고 현상계와의 인연을 끊고 모든 업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특히 불교의 바탕이 되는 업보는 인격체인 인간을 통제하는 비인격적인 인과응보론적 제도이자 규칙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나 획일주의와 같은 비인격적인 제도 아래서 통제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 개개인은 저마다 고유한 인격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며, 인간 삶에 절대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 희망, 신뢰, 자유 등은 비인격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세계에 적합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인격적인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이며, 불교가 추구하는 비인격적인 세계가 실상은 그들이 부정하는 환각(Maya)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마야(Maya) 부인의 옆구리를 찢고 일곱 걸음을 걸어 나온 뒤에 죽어 가는 어머니 옆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친 것은 비인격적인 세계관을 지향하는 불교의 처음과 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 ‘달라이라마’는 업보(Karma)란 선행을 장려하고 악행을 억제하기 위한 신념 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인과응보론적 두려움과 보상은 결코 인간의 심령과 인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은혜와 용서가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생명이 생명을 잉태하고 인격이 인격을 낳는 절대 법칙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 세계관에서 업보는 다음 생에서 더 나은 삶 혹은 더 열악한 사회적 지위(카스트)와 물질적 환경을 결정짓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 다수의 하위 카스트를 지배하는 소수의 상위 카스트를 제외하고는 비인격적 카스트 제도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하위 카스트는 오랫동안 힌두교의 업보에 근거한 계급사회(카스트) 아래서 잔인하게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다. 더군다나 불교가 말하는 윤회의 법칙에서는 지난 생의 업보가 이번 생을 살아가는 환경에는 영향을 주지만 환생한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실상 지난 생애에서 선업을 쌓아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였다 치더라도 그 환생자가 이번 생에서 더 선한 업을 쌓을지 아니면 악한 업을 쌓을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도덕하고 악한 소수의 상위 카스트(지난 생애에 쌓은 선한 업의 결과)가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하위 카스트(지난 생애에 악한 업의 결과)를 착취하기 위해 삼사라(윤회)를 악용하여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는 수행과 고행을 통해 쌓은 전생의 성품과 인격이 현생의 인격과 성품에 더해지거나 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육체를 갈아입고 태어나는 윤회의 순간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다시 처음부터 수행과 고행을 시작해야 한다. 결국 진화론적 연속성의 인연(因緣) 위에 형성된 불교의 사상이 업보를 말하는 순간에는 스스로 진화론적 인연을 부정하며 불연속성을 말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생을 기억할 수 없고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면, 전생의 내가 어떻게 현재의 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불교는 영속(永續)적인 나라는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단지 조건이 맞으면 윤회를 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윤회하지 않는다는 논리로서 그 전생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연관성을 억지로 주장하지만, 내가 아버지의 신체적 조건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나라는 논리는 통할 수 없고 또 내 자녀가 나의 기질과 성향을 닮았다고 해서 그 자녀가 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동냥하는 장님을 보게 되었다. 제자들이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해 장님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저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 사람도 당신의 영광이 되게 하실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뒤 그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만약 같은 질문을 부처의 제자들이 부처에게 했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제자들에게 하였을까?
마지막으로, 생각 혹은 의식이 현상 세계와 대상을 구성(構成)한다는 불교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현상 세계와 대상에 관한 정보가 있어야 생각을 구성해 낼 수 있다. 즉 대상이 없는 텅 빈 우주에서는 생각을 구성하거나 전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인간에 앞서서 창조하셨다. 마찬가지로 짐승과 같은 인간의 말이 오랜 시간을 거쳐 정교한 언어로 진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어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입에서 발화되는 음성 언어든지, 속으로 되뇌는 내면의 언어든지 실상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생각을 구성해 내거나 전개할 수 없다. 인간 사회에 필요한 여러 법과 제도는 인간이 만든 것인데, 그럼 과연 업보와 윤회의 법칙은 어디서 기원했고, 누가 만들었을까? 부처가 만들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석가모니조차도 500회 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도 결국 힌두교에서 시작된 보이지 않는 업보와 윤회의 창살에 갇혀 살았던 일개 인간이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성경은 말한다. 인격이신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이며 전 우주와 역사 속에서 유일무이한 인간 개개인이 바로 그 인간을 위해 창조된 자연(自然)을 신격화하거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신성시하거나 혹은 타락한 천사(사탄)에 의해 조작된 신을 숭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당신 이전에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었고, 당신 이후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고 윤회(輪廻) 사상을 해체해 버린다. 당신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존하시고 그리고 심판하시는 분은 비인격적인 업보와 유한한 당신의 행위가 아니라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당신의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사 당신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바로 그분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KRV 개역한글) ▦
♣사진 출처 | Wanderlust [https://sanhsu.tistory.com/54] ♣사무엘 |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