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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3 통권 252호     필자 : 쉬안쥔위안(禤骏 프린트   이메일 
[차이나 윈도]
중국 사람들은 왜 ‘관시(关係)’를 중시하는가

서양 사람들은 중국 사회가 ‘관시(关係)’를 중시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공평(公平)’을 중시하는 서구 사회와는 다르다. 하지만 사실 중국 사람들 간의 관시는 실용(务实)1)과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백세 생일을 맞은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중국 사람들은 상호 신뢰를 중시하기 때문에 관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중국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면 관시는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어라고 말할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관시는 무엇일까? 

사회학자 페이샤오퉁(费孝通)은 관시를 “개인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라고 했다. 서구 사람들은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고, 정정당당한 승부(fair play)에 치중하는 서구 사회와 친분을 중시하는 ‘관계사회(关係社会)’의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는 서구 사람들의 문화적 우월감이기도 하지만 중국 역사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 것이다. 근대 중국 사람들이 관시를 중시하게 된 역사적 이유는 급격한 대규모 인구 이동과 관련이 있다. 

1차 아편전쟁 뒤 창장(长江) 하구 이남지역의 5개 연해도시, 즉 광저우(广州), 푸저우(福州), 샤먼(厦门), 닝보(宁波)와 상하이(上海)는 통상 항구가 됐다. 많은 중국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이들 도시로 아주 먼 길을 달려왔다. 상하이와 우한(武汉)과 톈진(天津)과 같은 지역의 인구는 이로 인해 크게 증가했으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은 물론 신뢰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못됐으니, 이는 이들이 관시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향우회 그리고 고향 사람으로 구분된 각 지역의 상인단체의 조직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인맥을 구축하고, 협력자를 물색하며, 사업적 기회를 넓히는 데 중요한 경로가 됐다. 

민간단체 또한 관시를 맺고 이를 발전시키기에 좋은 곳이다. 상하이와 광저우 등 새로운 통상도시에서 민간단체의 역할은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데 협조하는 것 외에 소방교육과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비축하여 재해를 방지하는 등 다중의 역할을 맡고 있다. 외지를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꾸리는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단체에서 일함으로써 서로 돕고 보살피며 살아간다. 이로 인해 이들은 그 지역에 대한 소속감을 갖는다. 

중국 사람에게 있어서 관시는 친밀함과 친숙함의 의미를 초월하여 같은 선조, 같은 종족과 같은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상호 신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방이 낯선 사람인 환경에서 관시는 사람들이 위험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전장치이며, 고대 중국 정권의 경우 관시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열쇠이기도 했다. 중국은 영토가 넓어서 정부는 향진(乡镇)의 치안을 유지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그 지역의 귀족[乡绅]과 촌장과 가문의 지도자들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관시의 실질적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다국어 민족이다. 중국 내에서 사용하는 방언은 300여 개가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것은 순리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관시에 의존하는 것은 중국 사람들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전략과 발견적 고안(heuristic device)이며, 실용주의(pragmatism)이지 어떻게 족벌주의(nepotism)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대 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관들은 거의 모두가 관시를 잘 이용했다. 장사를 위해서 인재를 뽑거나 동맹을 모집함에 있어서 그들의 인맥과 파벌은 모두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관시는 좋은 것을 선별하는 도구이다. 관시는 우승열패의 과거제도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역시 이 때문에 중국 역사 속에서 관시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과거제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데 시험 감독관과 응시생의 관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벼슬길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다. 이로 인해 조정의 시정(施政)과 역사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 한인신하[汉臣]의 우두머리인 증국번(曾国藩)이 걸었던 정치의 길이 가장 좋은 예가 된다. 

관시를 잘 이용할 줄 알았던 증국번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고 상군(湘军)을 조직한 청 말의 관료였다. 그의 제자와 친구들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었고, 관료 사회에서 그의 세력은 막강했다. 그는 또한 양무운동(洋务运动)의 주동자로서 지방의 실업(实业) 설립을 적극 지지하여 중국이 현대화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게 했다. 그러나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관시를 잘 활용하지 않았다면 역사를 바꾼 인물이 아닌 평생 무명의 관료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증국번은 27살 때 세 번째로 회시(会试: 명청(明淸) 시대에 향시(乡试)에 합격한 ‘举人’들이 치는 3년마다 한 번 실시한 과거 시험_역자 주]에 응시하여 마침내 중간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엘리트 기관인 한림원에 들어가기에는 성적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인맥을 동원하여-자기보다 아홉 살이나 위이고 같은 진사(进士) 출신이며, 후난(湖南)성 고향 사람인 노숭광(劳崇光)에게 도움을 청했다. 노숭광은 증국번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창사(长沙)사람이어서 노숭광은 만주족(满族) 군기(军机: 청나라 군정권을 총괄했던 어전 관서)대신인 목장아(穆漳阿)에게 증국번을 제자로 추천했다.

목장아는 관료 가문 출신으로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며 도광제의 마음을 잘 파악하는 데 뛰어났다. 그는 응시생들이 꿈에 그리는 한림원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일찍이 다섯 번의 과거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은 조야(朝野)에 퍼져 있었는데 그들을 ‘목당(穆党)’이라고 불렀으며, 노숭광은 바로 ‘목당’의 일원이었으며, 당시 그는 공교롭게도 회시의 주요 시험 감독관이었다. 그는 노숭광의 추천을 받은 뒤 증국번의 시험지를 한번 자세히 훑어보았는데, 그중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관직에 있는 자는 성공이나 재부를 구해서는 안 되며 헛된 명예를 추구해서도 안 된다.” 모든 일을 조용히 처신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목장아의 이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목장아는 신하로서 놀라운 일을 성취하여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도와 근심을 덜어주는 것이 바로 ‘신하’로서의 직분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도광제의 신뢰를 얻게 된 이유이다. 

목장아의 지원 아래 증국번은 한림원에 들어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광제를 접견했다. 이후 증국번의 관직의 길은 점점 더 순조로워졌다. 7품의 한림원에서 2품의 예부우시랑(礼部右侍郎)에 이르기까지 한족이 출세하는 기적을 일궈냈으며, 훗날 위대한 업적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 모든 것은 스승 목장아의 도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대 중국의 관청을 거대한 관시망(关係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50년 도광제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함풍제는 목장아에게 여러 죄명을 씌운 조서를 내렸다.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그의 권력은 사라졌으며, 그의 노년은 처량했다. 후손들은 더 가난해졌다. 증국번은 직예총독(直隶总督)으로 있을 때 특별히 그를 방문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그를 위해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었다. 이는 사제 간의 우정일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의 ‘관시예술(关係艺术)’이기도 하다. 


미주  
1) ‘务虚务实’는 이론학습에 힘쓰고 구체적 사업 수행에 노력한다는 뜻이다. [‘虚’는 정치·사상·이론을 연구·토론하는 것이고, ‘实’는 생산·기술·실무 따위를 행하고 연구하는 것을 일컫는다. 1957년에서 1958년까지의 ‘整风运动(정풍운동)’ 때 쓰이던 말이다.


* 본고의 내용은 웹진 <중국을주께로>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출처 | <아주주간> 2023/6/19-6/(25호)
사진 출처 | 바이두
번역 | 하늘브릿지·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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