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해방군 상장(上将) 류야저우(刘亚洲)는 (중국)국방금융연구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사형집행유예(死缓)1) 선고를 받고, 동생인 류야쑤(刘亚苏) 소장과 같이 체포됐다. 류야저우의 장모이자 전 국가주석 리셴녠(李先念)의 부인인 린자메이(林佳楣)가 여러 차례 관계 기관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헛수고였다. 군에서 자유주의자로 여겨지던 류야저우가 이제는 금융부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류야저우는 전 국가주석 리셴녠의 딸 리샤오린(李小林)의 남편이며, 그의 아버지 류젠더(刘建德)는 개국(开国)소령이었다. 그의 다섯 형제 중 세 명은 군에 복무하고 있고, 두 명은 미국에 있는데, 현재 국방금융연구회 사건 연루 의혹을 받고 있다.
베이징의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류야저우는 2021년 12월 15일 공군종합병원에서 끌려가 검열을 받았다. 앞서 류야저우가 거액의 자금 문제와 관련해 조사를 받자 리셴녠의 부인 린자메이가 류야저우를 처벌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관계 기관은 그를 면직 처리하여 현역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했으나 류야저우가 “정치적으로 너무 반동적이어서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류야저우가 조사를 받은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국방금융연구회를 주관하여 개최한 것 때문으로 보인다. 2016년 5월 류야저우가 개인적으로 직접 운영하는 국방금융연구회가 베이징에서 설립됐으며, 국방대학, 민정부(民政部), 국가개발은행 등 연구회 관계 기관 회원들의 법정 대표와 개인 회원들이 참석했다.
중국국방망(国防网) 뉴스에 따르면 이 국방금융연구회는 이론연구, 정책분석, 프로그램 설계, 학술교류 등을 통해 국가와 군의 의사결정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군과 민간(军民)융합 방식으로 편성된 전국적, 학술적, 비영리적 첨단 싱크탱크다.
국방금융연구회가 설립된 뒤 국방금융의 기본이론과 응용이론, 최전방 문제 등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국방금융 분야의 중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포럼과 연구토론 활동을 펼치며, 금융수단으로 지원되는 광범위한 응용 전망과 중대한 가치를 가진 기술혁신을 촉진하고, 첨단 신기술의 국방과 군 건설 운용을 위한 전환을 추진하며, 전 사회적으로 국방건설 자원을 흡수, 통합 배치하여 자본적 차원에서 군민의 심도 있는 융합을 추진하게 된다.
중국국방금융연구회에 대한 민정부의 승인 문서에 따르면 이 회의 업무 주관 기관은 국방대학 정치부이다. 이번 류야저우 사건은 국방금융연구회와 직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류야저우는 이 국방금융연구회의 법정 대표자이고 사무총장은 그의 친동생 류야쑤이며, 류아쑤는 전 총참모부 정보부 부군직(副军职) 소장이다.
중국국방망은 류야저우가 지난달에 사고를 당했는데 초기에는 ‘심각한 기율 및 법위반’으로 규정됐는데, 정치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국방금융연구회의 최근 몇 년간의 ‘군민융합’, ‘군민공건(军民共建)’2)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권을 이용한 인수합병으로 국유자금을 유용하거나, 기회를 이용하여 남의 재물을 갈취한 것으로 상대방에게 실명으로 신고된 것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전했다.
류야저우의 본적은 안후이(安徽)성 쑤(宿)현(지금의 쑤저우[宿州])이다. 그의 아버지 류젠더는 개국소령으로 란저우(兰州) 군구(军区) 후방지원부 부정치위원까지 올랐으며, 2000년 향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류야저우의 어머니 천위샹(陈于湘)은 류젠더와 함께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류젠더를 따라 란저우에 정착하고 공상(工商)은행 간쑤(甘肃)지점 노동조합 위원장(주석)이 됐다.
류야저우와 리샤오린 1952년 10월 19일 류야저우는 저쟝(浙江)성 닝보(宁波)시에서 태어났다. 1958년 7월 류젠더 부대는 베이징 군구 소속인 산시(山西)성 다퉁(大同)에 주둔했으며, 류야저우는 부모를 따라 산시로 왔다. 그는 일곱 살 때 부친의 영향으로 군간자제학교인 타이위안(太原)시 육영(育英)초등학교에서 공부했다. 1967년 류젠더는 류야저우를 그의 옛 부대인 187연대 ‘영웅 8중대’로 보내 ‘훈련’을 받게 했다. 얼마 뒤 류야저우는 정식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1970년 11월 열여덟 살의 류야저우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71년에 소대장으로 진급했다. 류야저우의 아내 리샤오린은 리셴녠의 딸로서 두 사람은 아버지 대의 관계로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1972년 류야저우는 부대에서 우한(武汉)대학 외국어학부로 파견돼 영어를 공부했으며, 리샤오린과 같은 학과 같은 반에서 다시 만났다. 1983년 류야저우는 ‘제5차 중동전쟁’을 소재로 한 르포문학 《악마 감독의 전쟁》이라는 글을 썼는데, 참신한 소재와 날카로운 필치, 예리한 통찰력으로 중국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국방금융연구회 내부 상황 류야저우의 주도로 설립된 국방금융연구회는 그의 동생 류야쑤와 전 산시(山西) 정법위원회 서기 두위린(杜玉林)의 조카 두페이페이(杜飞飞)가 함께 관리했다. 두페이페이의 화진(华锦) 지주회사는 사실 이 국방금융연구회와 함께 두 개의 간판을 걸어 놓고, 실제로는 하나의 조직으로 이익을 나누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의 많은 공익조직(公益组织)과 비영리조직의 근본적인 접근 방식이기도 하다(예를 들어 학교나 병원을 등록할 때 이러한 비영리조직은 세금을 납부할 필요가 없지만 내부 자금을 배당하거나 인출할 수 없어 공익조직에 기부를 해야함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이 회사가 공익조직의 업무를 인수하여 내부 자금을 분배하는 것이다).
국방금융연구회는 한동안 상장기업 진리타이(金力泰)의 실질적 지배자가 됐지만 이들이 들어간 뒤 주가가 15위안(약 2200달러)에서 5위안으로 폭락해 참담한 손실을 입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들은 상하이의 자본가 류사오린(刘少林)을 찾아가서 그가 양도해 줄 것을 제안했고, 류사오린은 정말 그것을 사들였다. 그러나 류사오린은 주주권을 매입한 뒤 주가는 5위안에서 24위안으로 올랐고, 기업의 시장 가치는 30억 위안에서 100억 위안을 넘어섰다.
일반적으로 거래가 종료되면 손해를 보든 이익을 보든 거래의 각 당사자는 자신의 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국방금융연구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페이페이는 자신의 부하이자 동향인 페이졘(裴剑)을 내세워 류사오린을 위협하고 페이졘이 주주권을 다시 그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페이졘은 상하이 경찰 쉬디(许迪: 쉬디가 처리한 자금조달 사건에서 페이졘은 판결문에서 확인된 자금의 행방 중 하나였으며 두 사람은 이로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를 찾아갔고, 쉬디가 직접 나서서 류사오린을 계속해서 위협을 했으며, 결국 류사오린에게 보유위탁 계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들 지분은 실질적으로 원래 그들을 대신하여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류사오린은 합의서에 서명한 뒤 사기 혐의로 상하이 경찰에 붙잡혔다. 그가 주식을 산 것은 사기라고 말했다. 류사오린 일가는 반격에 나서며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실명을 유관 기관에 고발하며 공개했다. 그중 상하이시 펑셴(奉贤)구 전 부국장과 시공안국 펑셴지국 전 국장탕리나(唐丽娜)는 사건에 관여했다는 고발이 있은 직후 체포됐다.
두 산시(山西) 조직의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도 국방금융연구회는 중국증권감독위원회(中国证券监督委员会)에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 상장기업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을 도와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증권감독위원회는 이를 웃어넘기며 류야저우를 상대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국방금융연구회는 대외적으로 2019년 초에 이미 말소했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두페이페이의 화진(华锦)기업에 간판이 계속해서 붙어 있었다.
언론은 국방금융연구회와 류사오린 사건을 주목해왔으며, 중국 비즈니스저널(中国经营报, China Business Journal) 하오청쩡(郝成曾) 기자는 오랫동안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보도 이후 경성(京城)의 한 여성 언론인이 국방금융연구회 ‘공공관계(公共关系: 기업이 경쟁과 생존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취하는 방책과 행동으로 기업 경영 관리 수단의 하나)’에 뛰어들며, “주가 변화를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라는 이런 황당한 질문을 언론 주관부문에 고발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시진핑, 장사한 군에 엄중 처벌 이번 국방금융연구회 주식 투기 사건으로 류야저우가 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진핑(习近平) 총서기 취임 이후 일찌감치 군의 장사(상업) 행위를 철저히 청산하고, 많은 군수품을 재등록해 정비했으며, 많은 군대의 제3산업이 모두 중단됐다. 반면 류야저우는 국방대학 명의로 공개적으로 자금을 모아 주식 투기를 하고, 주식 투기에 실패한 뒤 다른 기업인들을 불법적으로 박해하는 등 숙청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의 지위에 대한 논란 이번에는 그의 정치적 문제도 거론됐다. 류야저우는 스스로 “자유사상의 순교자가 되겠다”고 주장했다. 지지자들은 그가 군부 내에서 민주적 사상과 정치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군부의 장래 희망으로 여겼다. 지지자들은 류야저우를 군부 내에서 드물게 위기의식이 강한 장군으로 꼽았다. 그는 《진먼전투회고(金门战役检讨)》를 저술하여 1949년 10월 진먼구닝터우(金门古宁头) 전투에서 9천여 명의 인민해방군이 국민당에 섬멸당한 아픈 역사를 회고했다.
반대론자들은 류야오저우의 글이 미국 정치인에 대한 찬사와 미국의 군사력을 선전하고 중국을 폄훼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반대자들은 그의 정치적 견해가 새롭지만 탁상공론인 ‘당대 자오쿼(当代赵括)’3)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중국 군인 사회에서 국방대학은 ‘중국군 장성의 요람(中国军队将官摇篮)’으로 불리며, 류야저우는 국방대학 정치위원회, 당위원회 서기를 맡아 군구의 정식 직책을 맡고 있다.
미국 전략안보위원회 평가보고서는 류야오저우에 대해 “1980년대에는 새로운 군사 변혁을 묘사한 전쟁 작품으로 유명했다”고 했다. “중국 장성 중 소장파의 힘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중국 군부 고위층의 전략 사상가이자 이론의 펜대”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군기율위원회 서기였던 이 펜대는 살짝 부러졌다.
역자 주 1) [약칭] 사형집행유예: 중화인민공화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 사형을 판결함과 동시에 사형의 집행을 2년간 유예하고 강제 노동에 의한 노동 개조를 실시하여 그 태도를 평가한 뒤 무기 징역으로 감형함. ‘判处死刑、缓期二年执行’의 준말. 2) [약칭] ‘军民共建社会主义精神文明’(군부대와 지역 주민들이 상호 협력하여 사회주의 정신문명 활동을 벌이다)의 준말. 3) 조괄(赵括)은 중국 전국 시대 조(赵)나라의 명장 조사(赵奢)의 아들이라서 어려서부터 많은 병서를 익혔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도 병법에 더 밝았다. 그러나 조괄은 이론에만 뛰어났을 뿐 실전에서 대군을 지휘할 만한 재목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론에만 강하고 실전에 약했던 조괄을 빗대어 한 말.
사진 설명 | 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류야오저우(위) → 중국국방금융연구회, 국방대학 문건 압수[사진: 린윈쩌(林云泽) 제공] 출처 (사진 포함) | <亚洲周刊(아주주간)> (2023/5/8-5 19期) 번역 | 하늘브릿지·자원봉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