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조약과 치외법권의 허용 가경제의 1723년 금령 포고 이후 120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던 천주교에 대한 청조의 금교 정책은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공식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굴복한 청조는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였다. 전체 1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남경조약’은 영국과 청나라가 향후 영원히 대등한 자격으로 평화와 우의를 지킨다고 앞 조문에서 명시하고 있지만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청조는 광주, 하문, 복주, 영파, 상해 등 5개 항을 개항하고, 영국의 편의를 위해 홍콩섬을 양여하였고, 영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5개 개항장에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사관을 개설하여 영국인 관련된 사항은 영국법에 따라 치리할 수 있도록 치외법권을 허용하였다.
물론 남경조약 조문에 금교령의 해제나 기독교 선교에 관한 구체적인 명시는 없다. 그러나 개항장에 조계지를 개설하였고, 조계지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의 경우 청조의 금령을 통제받지 않고 영국법에 의거하여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인정된 것이며, 조계지를 출입하는 중국인들에게 기독교 선교를 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은 남경조약에서 명시하지 못한 몇 가지 사항에 대하여 추가 교섭을 시도하여 1843년 10월 3일 ‘호문추가조약(虎門追加條約)’을 체결하였다. 여기서는 영국 상인이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을 추가하였고, 영국인의 범죄는 영국 영사가 치리한다는 영사재판권을 재확인함으로써 개항장으로 진입한 영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청조가 통제하지 못하도록 인정하였다. 따라서 남경조약과 ‘호문추가조약’의 내지 여행 허용과 치외법권적 영사재판권의 인정은 청조가 금교 정책에서 이금(弛禁) 정책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평가된다.
망하조약과 선교 이금 남경조약으로 중국의 문호가 대외적으로 개방되자 미국도 청조와 개항 교섭에 들어갔다. 미국은 이미 남경조약으로 중국 시장을 영국이 독점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교섭 특사 케일럽 쿠싱(Caleb Cushing)을 파견하였다. 청조 역시 대외 무역에서 영국이 독주하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는 이점을 주목하여 1884년(도광 24) 7월, 미국과 ‘망하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였다. 미국 무역선은 19세기 초부터 광동항을 통한 중국과 교역을 전개하고 있었고,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무역선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와서 광동 일대에서 은밀히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망하조약 체결 당시 미국의 신교 선교사 브릿지만(裨治文, Elijah Coleman Bridgman, 1801-1861)과 파커(伯駕, Peter Parker, 1804-1888)는 조약을 위한 협상의 장에 통역 겸 서기로 참여하여 영국이 확보한 이권에 준하는 내용으로 조약 협상이 이루어지는 데 기여하였다. 망하조약에서는 개항된 5개 항에서 미국 시민권자들이 거주하면서 땅을 구매하고 교회와 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명기하였다. 이로써 미국인이 개항장에서 선교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고, 미국인들의 중국에서의 치외법권도 확보하였으므로 중국에서는 선교의 자유를 남경조약에서보다 더 구체적 인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황포조약과 선교 이금 프랑스도 1844년(도광 24) 10월, 중국과 ‘황포조약(黃埔條約)’을 체결했다. 중국과 교섭을 맡은 프랑스 특사인 라그레네(拉萼泥, Théodose de Lagrené, 1800-1862)는 천주교도였는데 그의 중국행에는 중국선교를 준비하던 6명의 선교사가 동행했다. ‘황포조약’에서는 프랑스인들이 개항장에서 예배당, 병원, 학교, 묘지 등을 개설할 수 있으며, 중국 내에서 프랑스인들의 안위를 보장하며, 프랑스인과 관련되는 법률적인 문제는 영사재판을 통한다는 치외법권도 명시하였다. 앞서 체결된 영국, 미국과의 조약보다 더 분명히 선교에 대한 청조의 용인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대표 라그레네의 관련 요구를 받은 중국 측 협상 책임자 양광총독 기영은 라그레네의 제안에 근거하여 1844년 12월 도광제에게 상소하여 천주교에 대한 이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외국인이 통상항구에 예배당을 건설하는 것은 허락하되, 내지로 마음대로 들어가서 선교하는 것은 금하여 바로 해당 영사관으로 넘겨 통제하게 할 것을 청원하여 도광제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120여 년 이어진 금교 조치가 풀리는 보다 확실한 계기를 이루었다.
1846년 2월 도광제는 다시 다음과 같은 유지를 반포하였다. “천주교는 사람에게 선을 권하는 종교로서 다른 사교와는 다르므로 이에 대한 금지 조치를 면하여” 중국인이 천주교를 신앙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들이 함께 기도하는 곳을 세워 같이 예배드리고, 십자가와 성화를 내 걸고 경전을 외우고 설교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중국인 교도에 대해서도 악행이나 범죄를 하는 경우만 처벌한다고 하였다.1)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 범위는 통상항구로 제한하고, 내지 진출은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지 선교를 진행할 경우 단속하여 관련 국가의 영사관으로 보내도록 함으로써 중국 선교를 엄금하고 있던 기존의 정책은 느슨하게 운용하는 쪽으로 전환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선교사들로서는 개항장을 벗어나 중국 전역으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도록 중국 상황이 개선되기를 열망하였고, 이러한 염원은 185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조약 체계가 나오게 하는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
미주 1) 이상 中國第一歷史檔案館, 《淸末敎案》 第1卷 (中華書局, 1996), 14쪽 참조.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망하조약 체결→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