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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 통권 247호     필자 : 문영걸 프린트   이메일 
[기획]
중국 신문과 잡지 속의 3·1운동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된 국가임과 우리 조선인이 자주의 백성임을 선언하노라!” (기미독립선언문)

올해로 104번째 삼일절을 맞았다. 그때의 3·1운동 독립 만세의 함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중국선교사로 사역하는 중에 틈틈이 1919년 당시 중국인들은 한국의 3·1운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염두에 두고 그때의 신문과 잡지 등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 결과로 〈기독교사상〉 2018년 3월호에 ‘중국 신문 속의 3·1운동’이라는 제목의 글과 다음 해 2월호에 ‘중국 잡지 속의 3·1운동’이라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당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올해로 104번째로 맞이한 삼일절, 본웹진에 이 글들을 다시 한 편으로 다듬어 묶어 싣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다시 한 번 3·1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고 숨을 틔워 줄 생기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Ⅰ. 중국 신문 속의 3·1운동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 일제 식민통치를 반대하고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전 민족적인 궐기가 일어났고 한국 독립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이 3·1운동은 단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1920년 3월에 발간한 〈건설〉 잡지 제2권 제2호의 기사가 평가하듯이 “조선의 혁명(3·1운동)은 세계 혁명의 일부분”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신문과 잡지를 포함한 중국 언론들은 동시적이고 전면적인 보도와 논평을 진행하였는데, 일제에 통제된 한국 언론보다도 그 범위가 넓고 수량이 많았다. 중국의 주요 신문들은 3·1운동을 생중계하듯 그 실황을 보도할 뿐만 아니라 3·1운동에 대한 논평을 통해 한국 국민의 독립운동을 적극 성원하였다. 아울러 중국은 자국의 사회 상황과 국민의 정신 상태를 한국과 비교 분석하면서 중국의 혁명에 대한 성찰을 진행하였고, 이는 곧바로 그 직후에 발생한 중국 5·4운동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1운동에 대한 신문 보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바로 며칠 뒤인 5일 이후부터 중국 신문들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최초로 3·1운동을 보도한 주요 신문들의 보도 일자와 기사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표 1) 
 
 [표1]  중국 신문에 최초로 보도된 3·1운동 기사

 신문 이름

 발행지

 일자

 기사 제목

 〈신보(申報)〉

 상해

 3월5일

 “서울에서 시위행진 (漢城示威游行)”

“고려의 소란 (高麗之騷亂)”

 〈경보(京報)〉

 북경

 3월5일

“한국 국왕 장례에서의 혁명
(韓王葬時之革命)”

 〈신보(晨報)〉

 북경

 3월5일

 “고려인의 혁명 열기
(高麗人之革命熱)”

 〈대공보(大公報)〉

 천진

 3월6일

“고려 시위에 관한 서방 기사
(高麗亂事之西訊)” 

 〈익세보(益世報)〉

 천진

 3월6일

“고려가 참으로 독립을요구하는구나! 
(高麗眞要求獨立矣)” 

 〈민국일보(民國日報)〉

 상해

 3월9일

“조선의 혁명운동
(朝鮮之革命運動)”
 

 〈순천시보(順天時報)〉

 북경

 3월9일

“조선 폭동의 원인
(朝鮮暴動之原因)”
 

 
당시 시대적 여건을 생각해 보면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보도는 매우 신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첫 보도들을 살펴보면 그 출처는 주로 서울(京城) 혹은 도쿄(東京), 오사카(大阪)에서 온 전보들과 로이터 통신, 〈자림보(字林報, North China Daily News)〉, 〈대륙보(大陸報, China Press)〉 등 외신들이었다. 정보 소통이 동시적이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북경, 상해, 천진 등지에 있던 한국인들은 중국 신문 보도를 통해 비로소 독립운동의 발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3월 5일 이후 중국의 주요 신문들은 거의 날마다 3·1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필자가 조사한 3월 초부터 5월 초까지 주요 중국 신문들이 보도한 3·1운동 관련 기사 숫자는 다음과 같다. (그림 1)   



위의 통계에서 주목할 바는 동시간대 보도 기사량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민국일보〉가 가장 많이, 그리고 〈순천시보〉가 가장 적게 보도한 것이다. 사실 당시 중국의 주요 신문들은 그 배경이 서로 달랐다. 북경 〈신보(晨報)〉는 1916년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등이 창간하고 이대소(李大釗, 1888-1927)가 첫 주필을 맡았던 개혁 성향의 일간지였고, 상해 〈신보(申報)〉는 1872년에 창간되어 언론자유를 표방하는 일간지였고, 상해 〈민국일보〉는 1916년 중화혁명당이 창간하고 나중에 중국 국민당 기관지로 된 혁명 성향의 일간지였고, 천진 〈대공보〉는 1902년에 강유위(康有爲), 양계초 등의 유신사상의 영향을 받은 영렴지(英斂之, 1867-1926)가 창간한 개혁 성향의 일간지였고, 북경 〈경보〉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소표평(邵飄萍, 1886-1926)이 창간한 혁명 성향의 일간지였고, 천진 〈익세보〉는 1915년 천주교 천진교구가 창간한 천주교 기관지였고, 북경 〈순천시보〉는 1901년 일본 외무성이 발간한 친일 일간지였다. 
 

중국의 주요 신문들은 그 성향에 따라 3·1운동에 대한 관심과 시각이 서로 달랐다. 유일하게 친일 신문, 즉 일본 외무성이 발간하는 〈순천시보〉는 예상할 수 있는 대로 3·1운동에 부정적으로 보도하였다. 한국 3·1운동 전개 상황에 관한 보도는 단 2편에 그치고, 대신 “조선에 대한 과단한 조치”, “조선 폭동 종식”, “조선 점차 평정됨” 등 단신을 통해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이 이미 종결되었다고만 강조하였다. 그리고 “조선 폭동의 원인”, “어떤 나라 선교사의 악랄한 행적”, “재한 미국선교사의 사명”, “조선 독립 음모의 중심” 등 기사를 통해 3·1운동의 발발 원인을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동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과격사상의 방지”, “조선 폭동과 과격사상”, “조선 청년학생에 대한 경고” 등 논평을 통해 3·1운동에서 청년 학생들의 ‘과격사상(당시 중국 언론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을 과격사상이라 칭했음_필자 주)’을 경고하였다. 〈순천시보〉의 이러한 기사 구성은 한국의 모든 언론 기관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검열을 통해 3·1운동의 진상을 축소하고 은폐한 조선총독부의 〈매일신문〉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천시보〉를 제외한 기타 중국 신문에 보도된 기사는 3·1운동에 대한 한국인의 입장과 평화적 시위, 그리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한국인의 저항 및 국제적인 독립청원 등 3·1운동의 전반적인 실상을 공개하였다. 보도 기사에는 외신을 인용하거나 직접 취재한 내용도 있고 혹은 풍문으로 전해지는 정확성이 떨어지는 기사도 있지만 3·1운동 전모를 보여주었다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주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즉 3·1운동 진행 경과에 대한 보도, 일제의 탄압정책과 군경을 동원한 탄압 실상에 대한 보도, 해외 동포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보도, 임시정부의 수립과 파리 평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서의 청원에 대한 보도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평론 등이다. (표 2) 


[표 2]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관련 기사 유형 (단위: %)
 

 신문 이름

3·1운동

진행경과 

 일제 탄압

  해외동포

 독립운동

 임시정부
관련

 논평

 〈신보(申報)〉

 56

 13

 22

 9

 -

 〈경보〉

 56

 13

 6

 18

 7

 〈신보(晨報)〉

 43

 17

 9

 19

 12

 〈대공보〉

 35

 22

 20

 12

 11

 〈익세보〉

 50

 23

 -

 12

 15

 〈민국일보〉

 29

 30

 13

 13

 15


위의 표를 보면, 신문마다 다섯 가지 유형의 구성비는 약간의 차이는 있다. 〈신보(申報)〉, 〈대공보〉의 경우 이 다섯 가지 유형이 균형적으로 배치되었고, 〈경보〉, 〈익세보〉, 〈신보(晨報)〉의 경우 3·1운동 진행 경과에 관한 보도 기사가 많이 배치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보(申報)〉가 유일하게 ‘3·1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점, 〈익세보〉에는 해외 동포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가 한 편도 없다는 점, 〈민국일보〉가 일제 탄압에 관한 기사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민국일보〉는 “일본이 한국인에 대한 잔인한 탄압”, “일본 군경의 조선인 학대”, “일본인이 한국인을 무차별 체포한 결과”, “일본이 신랄한 수단으로 한국인을 제압”,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참혹한 대우”, “일본의 한국에 대한 고압책”, “일본이 파병하여 조선을 진압”, “일본 정부의 한국인에 대한 학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살육 정책”, “일본군이 한국인에 대한 잔혹한 조치”, “일본이 한국인을 도둑 무리로 치부” 등의 기사를 통해 일제의 참혹한 진압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민국일보〉만이 “이완용이 한국인들에게 한 발언”, “한국의 독립반대자(민원식을 말함, 당시 대동일보 사장, 시사신문 대표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음_필자 주)의 발언” 등 두 개의 기사를 통해 한국 친일파를 매국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상해 〈민국일보〉는 ‘독립선언’ 전문을 게재하여 중국 내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기조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천진 〈대공보〉도 3월 12일에 ‘독립선언서’ 전문을 게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한국 각 도에서 독립을 선포함”이라는 장문의 기사를 연재하여 한국 각 지역의 3·1운동 전개 과정, 참가자 숫자 통계, 일제의 발포 진압 등 내용을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중국 내 한국인들이 3·1운동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에 대한 중국 신문들의 성원
북경 〈순천일보〉를 제외한 기타 주요 신문들은 3·1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 성원하는 심경을 가지고 격정적인 평론들을 게재하였다. 

상해 〈민국일보〉는 “존경스럽고 연민스러운 조선인”, “조선 독립에 대한 동정”, “앞사람이 쓰러져도 뒷사람이 이어가는 한국인”, “조선의 정의로운 외침”, “한국인들의 정확한 반론”, “가장 존경스러운 한국 소학생”, “한국인들이 어찌 쉽게 굴복하랴!”, “한국인의 피눈물의 소리” 등 15편의 논평을 내어 3·1운동을 성원하였다. 

천진 〈익세보〉는 “오호라, 가엽고도 경이로운 고려인이여!”, “조선의 독립”, “잔혹하구나! 일본은 고려인을 모조리 해외로 쫓아내려 하는가?” 등의 논평을 내어 잔혹한 일제의 억압 아래 신음하는 한국인에 대한 동정을 보냈다. 

북경 〈신보(晨報)〉는 “부끄럽구나(惭)”라는 논평을 통해 3·1운동처럼 분발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탄하면서 “조선 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 “조선 독립운동에서의 감상”, “불가불멸의 한국 독립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 정신을 칭송하고 지지하는 논평들을 발표하였다. 

북경 〈경보〉는 “고려의 복흥 및 중국과의 관계”, “대한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보라” 등 논평을 통해 성원을 보내면서 “고려 독립은 과격파의 선동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Ⅱ. 중국 잡지 속의 3·1운동
중국 신문들이 3·1운동에 대하여 동시적이고 전면적인 보도와 논평을 진행하였는데 그 범위가 넓고 보도량이 많아 마치 한국 현지 언론을 방불케 하였다. 이처럼 중국 신문들이 3·1운동의 긴박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는 데 집중하였다면, 중국 잡지들은 3·1운동에 대한 논평을 발표하여 한국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성원하였다. 아울러 중국은 사회 상황과 국민의 정신 상태를 비교 분석하면서 외세 특히 일본에 굴욕적으로 굴복하고 있는 자신들에 대해 반성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 잡지에 발표된 대표적인 논평들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의 3·1운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 아울러 중국 5.4운동과 연관 관계도 살펴보려고 한다. 

중국 잡지들의 3·1운동에 대한 인식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발한 3·1운동은 며칠 뒤인 5일 이후부터 〈신보(申報)〉, 〈경보〉, 〈신보(晨報)〉, 〈대공보〉, 〈익세보〉, 〈민국일보〉, 〈순천시보(順天時報)〉 등 중국 주요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보도는 매우 신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 신문의 동시적인 보도들은 3·1운동의 전개 과정, 참가인원 통계, 일제의 진압 실상 등을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3·1운동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면, 이와 더불어 발표되는 중국 잡지의 논평들은 3·1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19년 당시 중국에는 약 500여 종의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었다. 하지만 비교적 영향력이 있는 중국 잡지는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이 1904년 상해에서 창간한 〈동방잡지(東方雜誌)〉, 진독수(陳獨秀, 1879-1942)와 이대소(李大釗, 1889-1927)가 1918년 북경에서 창간한 〈매주평론(每週評論)〉, 북경학생구국회가 1918년 북경에서 창간한 〈국민잡지(國民雜誌)〉, 북경대 학생들이 1918년 북경에서 창간한 〈신조(新潮)〉,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이 1919년 장사(長沙)에서 창간한 〈상강논평(湘江論評)〉 등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잡지들을 통해 보여주는 3·1운동에 대한 인식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3·1운동의 발발은 일제의 무자비한 폭정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동방잡지〉는 “조선에서 발생한 폭동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논평을 발표하면서 3·1운동 발발의 원인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1) 조선인과 일본인이 받는 대우가 불평등하다. (2) 정치가 번잡하고 조선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특히 조세 고통이 가장 크다. (3) 언론이 극단적인 압박을 당한다. (4) 강제로 동화(同化)시킨다. (5) 세계 사조(思潮)의 변천에 따라 조선인들의 민족자주사상이 매우 발달하게 되었다. (6) 천도교, 예수교 이 두 부류의 신자들이 선동한 바이다. 사실 3·1운동 발발의 진정한 원인이 일제의 폭정에 있음은 일본 언론도 인정한 것이다. 〈동방잡지〉가 일본 〈동방시사신보(東方時事新報)〉에 발표한 “조선 통치의 현황”이라는 문장을 번역하여 게재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일본의 “조선 통치에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무관(武官)정치의 악폐, 잔혹한 진압수단, 조선인을 총칼로 감행한 교육과 그로 인한 배일(排日)사상, 무자비한 도살, 가렴잡세와 농민들의 고통, 재한 일본인들의 비행(非行)과 법관들의 불공명(不公明)” 등이 악폐라는 것이다. 

둘째로, 3·1운동은 평화시위의 모범이라고 칭송한다. 한국인들은 총칼의 무력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서 오히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민심을 무기로 하는 평화 방식을 취한 것은 세계 혁명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 혁명의 지도자였던 진독수는 〈매주평론〉에 지안(只眼)이라는 필명으로 “조선 독립운동에 관한 생각”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3·1운동은 “위대하고 간절하며 비장하고 명확한 관념이 있으며 민의(民意)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세계 혁명의 신기원(新紀元)을 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에 대해 “찬미, 애통, 흥분, 희망, 참괴(慙愧) 등 많은 생각을 가진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독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오늘처럼 ‘민의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고, 영원히 군인 한 명도 모병하지 않고 총알 하나도 만들지 않으며 전 세계 여러 민족에게 모범”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당시 북경대 학생운동의 지도자였던 부사년(傅斯年, 1896-1950)도 〈신조〉에 맹진(孟眞)이라는 필명으로 “조선 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이라는 논평을 발표하여 3·1운동은 ‘비무장 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무기를 자유를 취득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은 이러한 거동은 오늘에는 비록 성공할 수 없지만,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독립운동은 그 가치에 있어서 사실은 무기를 사용한 독립운동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기가 없는 혁명은 결국 정의의 결실이 되는 것”이라고 3·1운동의 평화투쟁 방식을 극찬하였다. 

셋째로, 3·1운동의 주체를 학생들과 기독교인으로 보았다. 〈동방잡지〉에서 3·1운동의 발발 원인은 “천도교, 예수교 이 두 부류의 신자들이 선동한 바”라고 규정하였고, 진독수는 “이번에 조선에서 활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주로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다”고 전했다. 특히 〈동방잡지〉 제17권 제2호는 존오(存吾)가 기고한 “고려 기독교와 이번 독립운동의 관계”라는 글을 발표하여 3·1운동의 “애국지사들은 모두 기독교에 헌신하는 이들”이라고 단정했다. “예수는 세상을 위해 피를 흘리셨고, 국민들은 마땅히 나라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지상(至上)의 신조로 삼아 “국민들에게 혁명사상을 주입”시켜 “교회가 혁명의 발원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사년은 “조선 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에서 아예 3·1운동을 ‘단순한 학생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번의 조선 독립운동은 다른 부류의 역량을 조금도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일반 학생들의 자각심만을 의지했기에, 참으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광명한 거동이다”라고 칭찬하였다. 

3·1운동에 대한 중국 잡지들의 성원
신문의 실황보도와 달리 잡지들은 3·1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 성원하는 심경을 가지고 격정적인 평론들을 게재하였다. 당시 발표된 3·1운동을 적극 성원하는 대표적인 논평에는 다음 [표 3]과 같다.

[표 3]  중국 잡지에 발표된 3·1운동 성원 논평들

 잡지 이름 및 권호 사항

 발간 일자

 저자 및 글 제목 

 〈매주평론〉제14호, p.2. 

 1919.3.23.

  只眼(陳獨秀),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감상
(朝鮮獨立運動之感想)” 

 〈신조〉제1권 제4호, pp.137-138.

 1919.4.1.

 穗庭(陳兆疇),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감언
(朝鮮獨立運動感言)”

 〈신조〉제1권 제4호, pp.136-137.

 1919.4.1.

  孟眞(傅斯年),

“조선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
(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 

 〈국민잡지〉제1권 제4호, pp.3-4. 

 1919.4.1.

 楚僧(許德珩),
“가히 경이로운 조선인
(可敬可佩的朝鮮人)” 

 〈흥화잡지(興華雜誌)〉제16권
제45호, p.30.

 1919.4.1.

  저자 미상,

“고려인들은 절망 중에서 오히려
여망이 있다
(高麗人絶望中猶有餘望)” 

 〈상강논평〉제3호, p.4.

 1919.7.24.

 모택동,
“동방 대사건에 대한 논평
(東方大事述評)”



위의 글 중에서 독자들의 심금을 가장 울린 것은 당시 북경대 5·4운동의 지도자였던 허덕형(許德珩, 1890-1990)이 〈국민잡지〉에 초승(楚僧)이라는 필명으로 기고한 “가히 경이로운 조선인”이라는 글이다. 그 전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위의 글 중에서 독자들의 심금을 가장 울린 것은 당시 북경대 5·4운동의 지도자였던 허덕형(許德珩, 1890-1990)이 〈국민잡지〉에 초승(楚僧)이라는 필명으로 기고한 “가히 경이로운 조선인”이라는 글이다. 그 전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민족 자결(自決)의 외침이 우리 아시아에까지 전해져 온 이후, 저 2천만의 자유를 모조리 빼앗기고 고통 속에서 죽기를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하늘과 땅에 넘치는 기쁨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파리평화회의에 편지를 보내고 각 나라에 전보를 보내어 자신들이 일본에 탄병(呑倂)된 이후 참으로 이 천하에 있을 수 없는 각종 가혹한 학대와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고 탄원하였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조선인들은 죽음으로 서로 흩어졌고 인생의 즐거움이 전혀 없었다. 현재 그들은 깃발을 세워 들고 자신의 일들을 강행해야 하지만 그 강도 우두머리와 같은 자들이 말하는 공리(公理)와 정의는 전부 다 코 막고 입 삐뚤어진 말로써 그 누구도 공평한 판단을 주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로지 피 흘리고 살 뜯기면서 목숨을 걸고 자유를 쟁취하고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고 있다. 지난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서울, 평양, 진남포(鎭南浦), 안주, 중화(中和), 강서, 선성(宣城), 성천 및 기타 각지에서 많게는 수천 명, 적게는 수백 명의 남녀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하고 독립가를 부르고 찬송시를 읊으며 함께 모여 강연을 하고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으리라(不獨立毋寧死)”,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멈추지 말고 피를 흘리자” 등의 구호를 높이 불렀다. 

여러분 보시라, 그리고 말씀해 보시라, 이야말로 얼마나 문명한 거동이고, 얼마나 위대한 정신인가! 우리가 이들 조선인들에 대해 얼마나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까? 또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할까? 저 살기등등한 일본 경찰은 손에 총과 칼을 들고 눈을 감고 양심을 버리고 무차별하게 죽이고 때리고 있다. 왜 알지 못할까, 살육을 하면 할수록 때리면 때릴수록 조선인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에 또 일어나고 더욱 분발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조선인들은 참으로 피를 흘리고 참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조선인에 대해 온몸을 땅바닥에 던질 정도로 경의를 표한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나는 일본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그 총은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당신의 마음은 또한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저 2천만의 기개가 있는 이들은 당신이 모조리 죽일 수 있는가? 가령 전부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전 세계 모든 이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가? 당신의 양심마저 던져버린 수단과 야만적 행위는 참으로 세계에서 가장 하등(下等)의 민족이고 인류의 공적(公賊)이다. 당신은 지금 의기양양하지 마라. 당신과 같은 이러한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자는 2, 30년이 지난 후 아마 조선에 비교할 수도 없이 뒤떨어져 있을 것이다. 

듣자 하니 현재 조선은 이미 공화국가를 세웠다고 하고, 이당휘(李唐輝, 성재 이동휘를 잘못 적은 것임_필자 주) 박사를 총통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이 내각은 모두 학식이 깊고 의력(毅力)이 있는 이들이다. 이는 참으로 우리 동아시아의 가장 통쾌한 일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또 듣건대 일본은 이미 우리나라에 공문을 보내 조선인들을 체포하라고 했고, 우리 정부는 거기에 아부하여 두세 사람의 조선 지사(志士)들을 체포했다고 한다. “토끼가 죽으면 여우도 비참해 진다(兎死狐悲).” 나는 권하노니, 우리는 기뻐하지 말라, 아부하지 말라. 이 몇 해 동안의 소행을 보면 우리가 조선에 비길 수 있는가? 

이처럼 3·1운동을 통해 보여준 한국인들의 절개와 결의를 극찬하면서 한국 독립의 성공을 지지한 이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특히 당시 중국 지식인 혁명가들은 거의 전부 다 3·1운동에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흥화잡지〉 제16권 제45호는 저자 미상의 “고려인들은 절망 중에서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논평을 발표하여 한국 독립의 희망을 기원하였고, 당시 북경대 신조(新潮)잡지사 창립 회원 중 한 명인 진조주(陳兆疇)는 혜정(穗庭)이라는 필명으로 〈신조〉 제1권 제4호에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감언”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조선의 금번의 독립운동은 격랑에 격랑을 더하듯 하고 용맹하기로 전에 비할 바 없다. 어제의 중국 신문에는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으로 4,50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독립운동은 시종 식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나는 이러한 독립정신을 가진 민족은 결코 타인의 콧바람 밑에서 오랜 기간 구차하게 연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조선이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 우뚝 설 것을 우리는 두 눈을 닦고 그 결과를 지켜 보면 될 것이다. (…) 조선인들이 시종 끊임없이 자유를 쟁취하고 이제 광명한 천하에 또 하나의 자유국가가 생긴다면 이 또한 우리의 밤낮 기도하고 축원하는 바이다. 아울러 진조주는 한국인들의 독립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나는 일본 조야(朝野)가 이 일에 있어서 하나의 근본적인 각오가 있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즉 조선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결사적으로 대적하는 것으로써 결국에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것이다. 조류처럼 밀려오는 추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일본이 지금 병력으로 조선의 궐기를 평정할 수 없다. 설령 일시적으로 평정했다고 할지라도 해방을 위한 운동은 이미 20세기 인류 공동의 추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약소한 민족, 약소한 나라만이 강대한 민족, 강대한 나라에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소한 계층도 강대한 계층에 대해 해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있다. 오늘날 이러한 억압받는 약소한 민족, 약소한 나라, 약소한 계층들은 후일에 반드시 서로 연합하여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대항할 것이다. 그때 가서 일본은 또한 어떻게 조선을 대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20세기에는 타인의 운명을 조종하려는 민족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조선 독립은 조만간 반드시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고, 일본의 허용 여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진독수도 “조선민족 독립자치의 영광이 곧 실현되리라 믿는다”는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가령 즉각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조선에 주둔한 군경을 감축하고 조선인들의 정당한 자치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 우선 이번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해 일절 형벌을 내리지 말고 이로써 일본인의 문명 정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번 독립운동은 조선인들의 정당한 권리이고 또한 일본의 국체(國體)를 침범하거나 일본국의 안녕한 질서를 교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 독립의 대의와 영혼이 풍부한 일본인들이 조선의 이번 비장한 실패에 대해 모두가 동정의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택동은 자신이 창간하고 주필인 〈상강평론〉 7월 28일 제3호 “동방 대사건에 대한 논평”에서 3·1운동에서 보여준 한국인의 불굴의 정신을 칭송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다음과 같이 확신하였다. 3월 1일 이후, 서울, 개성, 평양, 중화(中和), 황주, 수원, 의주 및 모든 조선반도 각처에서 하나 된 독립의 목소리로 빈주먹을 높이 들고 국기(태극기_필자 주)를 휘날리며 그 무정(無情)한 검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일본 군경의 간섭, 체포, 총검의 찌름, 총칼의 내리침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독립의 외침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 나중에 일본 군경의 진압을 당하여 표면적인 독립운동은 비록 잠시 멈추었지만, 조선인들의 이러한 불굴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조선 독립이 실현될 날이 올 것임을 가히 단정할 수 있다.

Ⅲ. 중국 5.4운동의 기폭제가 된 3·1운동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한국의 3·1운동은 5월 4일로 곧 이어지는 중국 5·4운동의 온양(醞釀(어떤 생각을 가슴속에 은밀히 품고 있음), 발생, 진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손문(孫文, 1866-1925)이 당시 주장한 것처럼 “중국과 한국은 본래 형제와 같은 이웃으로서 (…)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중국은 더욱 마땅히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閔石麟, 《中韓外交史話》, 南京: 東方出版社, 1942, pp. 26-27.). 중국 5·4운동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3·1운동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적극적인 성원을 보냈다. 이와 동시에 불굴의 의지로 궐기하는 한국인들과 외세의 억압에도 소심하여 침체되어 있는 중국을 비교하면서 중국인들도 한국처럼 항쟁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사실상 이러한 논조는 3·1운동에 곧 이어지는 5.4운동의 발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매주평론〉은 5.4운동의 선두주자인 진독수, 이대소가 창간하고 주필인 주간지이다. 진독수는 3월 23일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성찰”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위축되어 일말의 반항심마저 없는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을 질타하고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선 민족 활동의 영광이 있기에 우리 중국 민족의 위축된 수치감을 더욱 볼 수 있게 된다. 공화국 체제가 이미 8년이 지났지만 일반 국민들은 단 하루의 명확한 정의(正義) 의식의 활동도 없었다. 국민과 정치는 천길만길 격리되었다. 자국과 외국의 군벌이 아무리 연합하여 핍박하여도 일말의 반항의 마음마저 감히 갖지 못하고 있다. (…) 이번 조선인들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무기가 없다고 반항하지 못하고 주인공의 자격을 포기하고 제2인자로 전락하였는가? 우리는 조선인에 비교하면 참으로 숨을 곳이 없도록 부끄럽구나! (…) 현재 중국의 학생과 기독교도들은 왜 모두가 이렇게 죽음의 기운으로 우중충해 있는가?

〈국민잡지〉는 북경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북경학생구국회가 창간하고 북경대학교 학생운동 지도자인 등중하(鄧中夏, 1894-1933)가 주필인 잡지이고, 5·4운동의 주된 나팔수 역할을 하였던 잡지이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북경대 영문과 학생이었고 국민잡지사 발기인이었으며 ‘5·4선언’의 집필자이고 5.4운동 학생수령인 허덕형은 〈국민잡지〉에 기고한 “가히 경이로운 조선인”이라는 글에서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으리라!” 혹은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자,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등의 구호를 외치는 한국인들에 대하여 “이러한 행동은 얼마나 개명한 것인가! 이러한 사상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우리는 그들을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 앞에 부끄럽지 않는가?”라고 감탄하면서 외세 열강에 굴복하는 북경 정부에 대하여서도 비판하였다. 

〈신조〉는 북경대 5·4운동의 지도자인 부사년 등이 창간하고 채원배(蔡元培, 1868-1940), 진독수, 호적(胡適, 1891-1962), 전현동(錢玄同, 1887-1939), 이대소 등 교수들이 직접 지도하였던 잡지이고, 이 역시 5.4운동의 주요한 나팔수였다. 부사년은 〈신조〉에 “조선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창조”하는 조선인들을 다음과 극찬하였다. (3·1운동은_필자 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하는(是知其不可而爲之)” 혁명이다. 체약한 민족은 매번 중대한 사건에 직면하면 필히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묻게 되고, 역량이 부족하면 좌고우면하게 되어 결국에는 아무 일도 성사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사실 대중이 소원하는 사안이고 대중이 희망하는 사안이라면 불가능이 없으며 역량이 부족할까 염려할 것도 없다. 최후의 성공은 이르고 늦은 문제는 있겠지만 부정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하는” 것을 “반드시 될 줄로 알고 굳이 하는(知其必可而爲之)”으로 바꾸어야 한다. 조선인들의 불굴의 정신을 찬양하면서 부사년은 중국인들의 정신 상태를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이 시각의 중국이 가장 우려해야 할 현상은 바로 사회 일반인들이 개혁사업에 대하여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천천만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정해준 것이다. 모두가 하지 않으면 어찌 가능할 수 있으랴? 모두가 한다면 어찌 가능하지 않으랴? 조선인들의 견고한 의지를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숨을 곳이 없을 정도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중국을 되돌아 생각하면 참으로 가탄스럽다. 일반적으로 자각이 없음은 말할 나위가 없고 설령 자각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아직은 심기가 박약하기 그지없다. 입으로는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_필자 주)을 이야기하지만, 손에는 금반지를 끼고 있고 볼펜은 의지의 연마와 인격의 독립을 발휘하는 글을 쓰고 있지만 몸은 늘 권력에 붙어있다. 

부사년은 결국 복지부동의 중국 청년 학생들을 향해 원망하면서 일어나 분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일반 고급학교(대학교_필자 주)의 학생들은 더더욱 목숨을 걸고 관료(官僚)를 배우고 정객(政客)을 배우고 있다. 현재의 학생들이 이러하니 장래 사회는 가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관료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학생들을 원망하며, 혼미하여 가련한 노후(老朽)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말과 속마음이 다른(口是心非)’ 새 세대들을 원망한다. 이뿐만 아니라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은 자신이 창간하고 주필인 〈상강평론(湘江評論)〉7월 28일 제3호 “동방 대사건의 논평”에서 “일본 군경의 진압으로 인하여 독립운동은 표면적으로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조선인들의 불굴의 정신이 살아있기에 조선 독립은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고 한국 독립을 응원하였다. 이와 같이 5·4운동의 지도자들은 3·1운동의 발전을 주시하면서 한국인들의 독립 투쟁에 성원하고 감탄하였고, 한국인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에 깊은 자극을 받았으며, 일제의 잔인한 제국주의 야망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동시에 열강들의 침탈을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동일한 삶의 자리에 처해 있다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3·1운동에 대해 관심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5·4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삼았다. 







문영걸 | 목원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사(Ph.D.)와 북경대학교 철학과에서 종교학(Ph.D.)을 전공하였다. 12년간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현재는 제주반석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중국 지식계층의 기독교 이해〉, 〈벽사위정-한중 반기독교 비교 연구〉, 〈서광계의 조선선교계획 전말〉, 〈6.25전쟁과 중국교회〉, 〈조선 남감리회의 시베리아 선교(1920-1931)〉, 〈중국 지식계층의 루터 이해에 대한 고찰〉 등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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