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천감 선교 사역의 종식 가경제 치세 후반의 교안 발생과 천주교 금령의 강화 조치는 북경에서 청조에 봉사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를 대신하여 북경에 진입하여 청조에서 필요로 하는 서학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포르투갈 견사회(遣使會) 선교사 페레이라(福文高, Dominicus Ferreira), 히베이로(李拱辰, Jose Ribeiro), 피레이라(畢學源, Cayetano Pires Pireira, 1804-1838), 세하(高守謙, Fr. Verissimo Monteiro da Serra) 등은 교안과 금령의 강화 조치 가운데서도 계속 북경에 남아 흠천감에서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내각에서 번역 업무를 맡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라미오(南彌德, Ludovico Francisco Lamiot)를 비롯하여 일반 학술 영역에서 지원 활동을 하며 북경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교안 처리 과정에서 각지에서 체포된 선교사들과 함께 귀국 조치되었다.
1837년 흠천감 감정으로 일하고 있던 피레이라가 병을 이유로 사직하자, 청 조정에서는이미 서양 역법을 깊이 이해하였으니, 다시 서양인을 고용할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로써 서양 선교사가 흠천감을 주관해 오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북경 교당의 수난 서양 선교사 대부분이 떠나가게 되면서 북경 네 곳에 건립되었던 천주당 역시 변화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북경 서당(西堂)은 옹정제 때인 1723년 견사회 소속 이탈리아인 신부 페드리니(德理格, Teodoricus Pedrini, 1671-1746)가 서직문(西直門) 가까이에 있던 자신의 처소를 개조하여 세운 것인데, 1811년 박해 시에 소속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되고 가장 먼저 몰수 철폐되었다.
동당(東堂)은 명말 예수회 선교사 부글리오(利類思, Lodovico Buglio, 1606-1682)와 마갈랜레스(安文思, Gabriel de Magalhāes, 1609-1677)에 의해 동안문(東安門) 밖 왕부정(王府井)에 세워져서 운영되다가 가경 12년(1807년) 화재로 소실된 후 중수 허락을 받지 못하고 폐쇄되었고, 선교사들은 남당으로 옮겨 갔다.
북당(北堂)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신부가 키니네를 사용하여 성조 강희제(康熙帝)의 학질을 고쳐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문(西安門) 밖의 부지에서 17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 12월에 축성하였다. 이때 강희제는 칙건천주당(勅建天主堂)이라는 명문을 하사했다. 1783년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견사회의 로(N. J. Raux, 羅廣祥) 신부 등도 1785년 북경에 도착한 이후 북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북당 역시 1819년에 프랑스 견사회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가 마카오로 추방되고, 이후 관리를 맡은 포르투갈 견사회 세라(Serra, 高守謙) 신부가 1826년 마카오로 떠나고, 남은 신부 수웨(薛瑪竇, Mattnieu Sué, 1780-1860) 등이 1827년 남당으로 옮겨 가면서 몰수 폐쇄되었다.
남당(南堂)은 명나라 만력제가 마테오 리치에게 하사한 선무문(宣武門) 안의 땅에 만력 33년(1605년) 마테오 리치가 세운 성당에서 기원한다. 아담 샬은 이곳에 ‘남당’을 증축하여 북경교구의 주교좌당이 되었고, 순치제(順治帝)로부터 흠숭천도(欽崇天道)라는 편액을 하사받았고, 1675년에는 강희제로부터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는 편액을 하사받기도 했다. 남당은 뒤에 페레이라(徐日升, Thomas Pereira, 1645-1708)에 의해 서양식 건축물로 개축되었고, 이후 지진으로 두 차례 파괴되고, 건륭 40년(1775년) 큰 화재를 만났으나, 이듬해 건륭제가 통미가경당(通微佳境堂)이라는 편액과 더불어 하사한 은 1만 냥으로 수리하여 북경 천주교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가장 늦게까지 존속하였던 남당도 1838년 몰수 폐쇄되었다.
도광제의 금교정책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1-1850) 재위 기간에도 기존의 금교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도광제 치세에는 앞선 가경제 치세 때와 같은 대구모 교안이 일어나거나 공식적인 금교령이 반포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천주교에 대한 전국적인 단속이 있었고 천주교가 박해를 받는 사건은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사천성에서는 1821년 거현(渠縣)에서 유서정(劉瑞廷) 신부가 금교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뒤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때 그와 함께 체포된 중국인 신도들이 30여 명이나 되었다. 귀주성에서도 1824년과 1839년에 두 명의 천주교 신부가 처형되었다. 섬서성 한중(漢中) 지역에서도 300여 명의 천주 교도들이 단속을 받아 강제로 출교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안(西安) 지역에서도 단속을 받아 체포된 교도들이 몽골 지역으로 추방형을 받기도 했다. 1836년 하북성으로 들어와 선교를 하던 프랑스 견사회 신부 가브리엘 페르브와르(董文學, S. Joannes Gabriel Perboyre, 1802-1840)는 1840년 밀고를 당하여 무한(武漢)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였다.
19세기 전반 가경제와 도광제 치세 기간에 엄한 금교령이 유지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선교가 중국에서 여전히 이어졌다. 19세기 전반기 30년 동안 15명의 선교사가 잇달아 중국의 내지로 들어갔고, 금령을 피해 몰래 선교하는 천주교 선교사가 31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이 시기 선교사들은 중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성직 교육을 받기 위해 마닐라, 마카오, 고아까지 나아가 유럽으로까지 보내어진 중국인 성직 후보자들도 있었다. 1810년에 이미 80명의 중국인 성직 인력들과 선교사가 함께 각종 성사를 거행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1)
미주 1) 于本源, 《淸王朝的宗敎政策》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9), 180-181.
사진 설명 및 출처 | 남당(南堂): 1610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세운 베이징 최초의 천주교회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