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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 통권 245호     필자 : 샤오윈창(萧云长) 프린트   이메일 
[차이나 윈도]
중국 제3대 최고 지도자 장쩌민 전 국가주석 사망
-중국을 변화시긴 ‘3개 대표 이론’-


장쩌민(江泽民) 주석이 향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집권 중에 제시한 ‘3개 대표론’은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함으로써 중국공산당 체제를 바꿔 놓았다. 또한 세계무역기구(이하 WTO)에 가입을 통해 중국을 글로벌 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군의 부패 묵인과 군 간부들의 매관매직 등의 혐의를 받았고, 시진핑 집권 뒤 철저히 근절됐다. 하지만 장쩌민 시기에는 강력하게 개혁개방을 추진하였고 자유를 수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지식인과 일반 사람들은 현재가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냉혹한 방역에 반대하는 ‘백지운동(白纸运动)’ 사이트는 즉시 장쩌민의 프로필 사진을 게시했다. 

중국 제3대 지도자의 핵심인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2022년) 11월 30일 백혈병 합병증을 동반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향년 96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쩌민은 1989년 민주화운동 이후 마오쩌둥(毛泽东)과 덩샤오핑(邓小平)을 이은 제3대 지도자로 등극했다. 집권 초기에는 보수적 경제 정책 노선을 채택했지만 1992년 덩샤오핑의 ‘남방 순시(南巡)’ 이후 정책 노선을 변경하고, 세계화·시장화를 강조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심화해나갔다. 또한 3개 대표론을 발전시켜 자본가들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고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에 중대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의 집권 시기에 ‘권력지대추구(权力寻租: 권력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행위)’의 부정부패 문제가 불거졌고, 군이 장사를 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지만 군에서 매관매직이 관행처럼 되어 왔는데 시진핑이 집권한 뒤에는 근절됐다.

장쩌민이 발탁한 저우융캉(周永康) 정치위원회 서기는 그중 가장 부패한 고위 공직자로 꼽힌다. 하지만 장쩌민 시기에는 강력하게 개혁개방을 추진하였고 자유를 수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지식인과 일반 사람들은 현재가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냉혹한 방역에 반대하는 ‘백지운동’ 사이트는 즉시 장쩌민의 프로필 사진을 게시했다.

매우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장쩌민은 기자들의 거친 질문에도 자유롭게 응대하는 성격이다. 미국 CBS 기자 마이크 월리스, 홍콩 기자 장바오화(张宝华)와 서로 교제한 것은 모두 일화로 인용되고 있다. 장쩌민의 공과를 논하기 전에 먼저 그의 지나온 삶을 논한다면 중국의 현대화와 세계화 과정에서 커다란 행적을 남겼음은 분명하다. 

아주주간(亚洲週刊)은 장쩌민이 사망하기 약 2주 전쯤 중국 주요 온라인 플랫폼들은 장쩌민 사망에 대비해, 여론을 선도하고, 부정적 여론을 통제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정도로 장쩌민의 건강 상태가 이미 악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장쩌민은 1987년 지방 관료로 승진해 중국공산당 상하이시 당서기가 됐다. 상하이시의 시장이 됐을 때가 이미 61세였다. 같은 해 58세의 후치리(胡启立)는 이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일반적으로 장쩌민은 후계자가 될 기회가 없었지만 1989년 민주화운동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자오쯔양(赵紫阳) 총서기와 그 계파들은 대거 숙청됐고, 후치리는 중앙위원직만 겨우 유지했다. 반면 장쩌민은 시위를 보도한 ‘세계경제도보(世界经济导报)’를 압수 수색했다. 이로 인해 자오쯔양의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더 평화롭고 온화한 방법으로 상하이학생운동을 진압했다. 그래서 덩샤오핑의 인정을 받아 자오쯔양에 이어 총서기로 승진해 새로운 국가 지도자가 됐지만 상황은 복잡해지자 장쩌민은 자신에게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같다고 말했다.

1989년 민주화운동 이후부터 1992년 덩샤오핑의 남방 순시 기간에는 ‘오직 사회의 안정’을 기하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 강령이 됐다. 1990년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姓社姓资)’라는 논쟁이 불거지자, 덩샤오핑을 대표로 하는 보수파들이 개혁개방 노선을 맹렬히 공격하고, 다시 계급투쟁을 제기했다. 덩샤오핑은 남방 순시에서 “발전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發展才是硬道理)”, “개혁개방은 대담하게 기회를 포착하여 자기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관건은 경제발전이다.”, “중국은 우(右)를 경계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좌(左)’를 방지하는 일이다.”라고 연설했다. 장쩌민 진영은 비로소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하며 경제 건설에 주력했다.

집권 13년, 장쩌민은 “베이징에 입성하여 십여 년 일을 하면서 별다른 것이 없었지만 다음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첫째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확립’, 둘째는 ‘덩샤오핑 이론(邓小平理论)을 당헌에 포함’시킨 것, 세째는 ‘3개 대표론’이 그것이다.

그의 집권 중 2001년 중국은 WTO에 정식 가입하여 탈냉전시대의 세계체계에 참여하게 됐다. 이 기간 중미관계는 두 차례의 대만해협 위기(1996년, 1999년), 1999년 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 폭격사건, 2001년 중미 남중국해상 충돌사건이 반복됐지만 2001년 ‘9.11’사태가 발생하면서 중미 양국은 반테러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미국이 중국의 WTO 가입을 적극 지지하면서 양국관계는 급속도로 완화됐다. 또한 중국 정부가 공인했던 파룬궁 불순 세력을 척결했다. 신화통신은 이와 관련하여 “파룬궁은 중국공산당과 중앙 정부를 반대하고, 유심론, 유신론, 미신 등을 신봉한다고” 발표했다.

신화통신이 발표한 추도문 ‘전당과 전군, 전국 각 민족 인민에게 고하는 글’에서는 장쩌민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가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지략, 핵심 역할, 고도의 정치 지도예술’에 중점을 두고, “전당의 지혜를 집중시켜 3개 대표론의 중요 사상을 확립했으며, 당이 지도사상에서 또 한 번 시대와 더불어 전진하도록 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의 거대한 정치적 용기와 이론적 용기를 구현했다”고 지적했다.

3개 대표론의 중요 사상은 (1) 중국공산당이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2)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3)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의 발전과 진보의 보편적 법칙을 따르고, 시대 발전의 흐름과 우리 사회 발전과 진보의 요구에 부응하며, 전국 각 민족 인민의 이익과 염원을 반영하여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에 기여한다. 

‘부상마, 송일정(扶上马, 送一程)’

2002년 장쩌민은 국가주석과 총서기직에서 물러난 뒤 덩샤오핑이 지명한 후계자 후진타오(胡锦涛)에게 넘겼지만, 그 뒤로도 1년 8개월간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유지하면서 “부상마, 송일정(扶上马, 送一程: 새로운 간부에 대하여 그가 지도적 직무를 감당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뿐 아니라 취임 후에는 또 일정 기간 계발 인도하여야 한다)”으로 불렸다. 실제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温家宝)’ 시기에 장쩌민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군사위원회 부주석 궈보슝(郭伯雄)과 쉬차이허우(徐才厚) 모두 그의 심복이었다. 2008년 쓰촨(四川)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원자바오 총리는 직접 재난 구조를 진두지휘했지만, 군대를 재난 구조에 투입할 수 없었다. 후진타오가 협상하고 직접 최전선에 나선 후에라야 군대를 재난지역에 투입했다. 5월 12일 원자바오 총리는 인민해방군이 현장 진입을 꺼리자 이렇게 호통을 쳤다. “누가 당신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 기억하란 말이다!” 

2008년 말 신화망은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천빙더(陈炳德)의 <원촨대지진 재난구호의 날을 기억하며(忆汶川大地震救灾的日子)>란 글을 게재했는데, 지진 직후 “후 주석과 군사위원회 지도부에서는 속히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대한 빨리, 최단 시간에 피해 상황을 규명할 것을 요구했다”고 언급했다. 또 “한 시간 뒤 후 주석과 군사위원회 수뇌부의 비준을 거쳐 총참모부에서 속히 ‘지진 재해 구호활동 동원명령(关于参加抗震救灾的命令)’을 내렸으며, 또한 3만4천여 명의 병력을 긴급 투입하여 재난구호에 최선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후 주석이란 후진타오를 일컫는 것이다. 군부 수뇌부는 궈보슝과 쉬차이허우를 일컫는다. 

2008년까지만 해도 군대 이동은 여전히 장쩌민 계파의 재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지진 발생 후 4시간 동안 재해 구호를 위해 파견된 병력은 4천4백 명에 불과했다. 이틀이 지난 14일 낮 12시 20분에야 무제한으로 병력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후진타오 집권 중에도 장쩌민의 부하였던 천량위(陈良宇) 상하이시 당서기가 공금 비리 사건에 연루돼 해임됐으며, 군 수뇌부였던 궈보오슝과 쉬차이허우 역시 시진핑 부임 이후 바로 부패 혐의로 구속됐다. 군 관계자들의 매관매직 비리들이 속속 드러났다. 

중국 제4대 최고 지도자 후진타오가 물러날 때 장쩌민의 소위 ‘부상마, 송일정’과는 많이 달랐다. 후진타오 주석은 ‘뤄투이(裸退·벌거벗은 퇴진)’를 선택하고, 다음 후계자인 시진핑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동시에 장쩌민이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도 암시했다. 이에 시진핑은 “인격이 높고 절개가 굳은 분”이라고 후 주석을 추켜 세웠다. 시진핑이 집권한 뒤 그는 장쩌민 파벌로 여겨지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숙청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군부 최고위 큰 호랑이 두 명 외에 또 장쩌민이 직접 발탁한 저우융캉 서기가 중국 최대 부패관리로 지목됐다. 석유라인과 정치법계 계열도 대대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2022년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 계파의 세력은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완전 배제됐다. 

장쩌민은 입담 좋고 개방적이며 친근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종종 기자들의 인터뷰를 수락했으며, 꼼꼼한 일벌레 스타일이면서도 즉흥적인 연설에도 능했다. 또 그는 홍콩을 네 차례 방문하면서 광둥어도 선보였다. 그중 특히 미국 CBS 시사저널 ‘60분’의 월리스(华莱士) 기자와 장바오화 기자와의 에피소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특히 2000년 둥젠화(董建华) 홍콩 행정장관 회담장에서 “내가 어른(長者)으로서 충고한다”며 기자단을 향해 영어로 “너무 어리고(too young), 지나치게 간단하고(too simple), 때로 유치하다(sometimes naive)”고 말하는 영상은 꼭 보아야 할 영상으로 꼽힌다. 





출처 | <亚洲周刊>(2022/12/5-12/11) 49期
번역 | 박성란·중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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