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설정   사이트맵    사역에 동참하시려면  
    HOME  |  선교회소개  |  교육.훈련  |  중국을주께로  |  중국기도  |  중국어교실  |  자료나눔  |  커뮤니티  |  도서·음반
   
중국을 주께로는
전체보기
이번호보기
지난호보기
주제별보기
  특집/기획
  선교전략
  중국교회
  중국사회와 문화
  지역 및 종족연구
  중국뉴스
  중국어관련
  선교일반
  선교나침반
  중국 기독교
  기획
정기구독안내
해외정기구독안내
HOME > 중국을주께로 > 이번호보기
2022.9.3 통권 241호     필자 : 박제완 프린트   이메일 
[선교현장 이야기]
중국 충칭에서의 대학생선교 (2)

제4기: 2009-2014년
대학성(大学城) 가정교회 개척과 연합 팀 사역 
2006년부터 충칭 도심의 대학들이 대학성으로 본격적으로 이전하게 되자 한국과 여러 지역의 선교사들도 조용히 그곳으로 지경을 넓혀 나갔다. 2007년 대학성에서 예배 모임을 갖기를 바랐지만 선교비의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개척이 미뤄졌었다. 2010년 한 선교사가 안식년을 떠나며 우리에게 3명의 자매들을 맡겼다. 이들 가운데 한 자매가 우리가 대학성 교회를 개척할 때 신실하게 동역해 주었다. 어찌하든 대학성 교회개척을 위해 적절한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열심히 기도하며 주변을 물색하던 중 저렴한 아파트를 임대했다. 비록 협소한 곳에서 부족한 모습으로 출발을 했지만 개척 멤버들과 우리는 함께 기뻐하며 성령으로 충만했다. 아내는 사역을 위해 반 년이 넘게 한인교회에서 철야기도와 새벽기도의 단을 쌓았다. 우리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조심스레 전도를 했다. 곧 20-30여 명의 학생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정말 대학성은 하나님의 황금어장이구나! 할렐루야!’ 잠을 설쳐 가며 학생들의 영육을 위한 식사를 챙기고 부지런히 새벽부터 저녁까지 대학성과 사핑바(沙坪坝)의 가나안교회를 섬기는 중에 선하신 하나님은 대학생교회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국인선교사로서 많은 한계를 절감했다. 또한 현지인 전임 사역자가 있다면 많은 학생들을 보다 견실하게, 적절하게 양육하고 가르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컸다.

▶ 전임 사역자를 보내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
2010년 하나님은 전임 사역자를 보내 주셨다. 그는 동베이(东北) 옌지(延吉)에서 2년간 삼자교회의 전도사로 섬겼고, 기도를 하는 중에 시난(西南)지역 사역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무작정 충칭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찌 알았는지 내 이름과 연락처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중에 필자는 그가 옌지에 있는 한 지인을 통해 나를 소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동역자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그 당시 갑자기 찾아온 그에게 우리는 사례비를 드릴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 일단 숙식할 곳이 필요할 테니 대학성 교회에서 지내며 앞으로의 동역을 생각해 보자고 했다. 사역자인 그가 교회에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과 친해졌고, 어차피 사역자가 필요했던 우리 또한 그와 자연스럽게 동역이 이루어졌다. 몇 주간을 그와 함께하면서 나의 한계가 적잖이 극복되었고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다. 단지 사례비 문제만 해결된다면 동역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무렵 우리 가족도 몇 년째 주 후원교회가 없었던 터였다. 재정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었다. 며칠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한 이사님(당시 중총지역장)이 소개해 주신 우시(无锡)한인교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우시한인교회 A 목사는 과거 신학대학원 시절에 1학년 때 함께했던 룸메이트였고 대학 시절에는 선후배 관계였다. 오로지 주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고민하며 기도하는데 그가 생각났고 확신도 들었다. 이윽고 선교현장에서 25년 만에 복음의 귀한 동역자를 다시 만났다. 우시한인교회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와 A 목사의 은혜로운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서로가 선교의 비전을 재확인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시한인교회와 A 목사는 기꺼이 동역과 헌신을 약속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지난 2년간 대학성 가정교회 개척을 위해 소원을 품고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순종하게 하셨다. 또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귀한 동역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축복하시며 재정적인 필요까지도 놀랍게 채워 주셨다. 할렐루야! 2010년 신학기 대학성 교회에는 매주 3-4명씩의 학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30-40여 명의 학생들은 좁은 공간임에도 기쁨으로 교제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며,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들이 예배 모임 이후 가장 기다리는 것은 식사 시간이었다. 아내와 B 사역자의 사모는 한국과 동베이 음식을 맛있고 푸짐하게 잘 차려 내어놓았다. 그해 추수감사주일을 전후로 3차례 15여 명의 학생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 충칭 가정교회개척 팀 사역과 부흥
2010년 중총 본부는 K 선교총무의 리더십 아래 전전면적인 팀 사역을 단행했다. 충칭의 우리 소속 선교사는 모두 4명이었다. MK 사역을 하는 한 명의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대학생을 통한 교회개척 사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선교사 신분으로 현지인을 목양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자각하고 서로의 은사와 능력을 공유하며 나눌 수 있는 팀 사역의 필요성에 모두가 공감했다. 그리하여 몇 차례의 연합수련회를 가지며 사역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2010년 3월 지부 모임을 갖고 ‘가정교회 개척 팀 사역’을 결정했다. 중국의 뻔한 보안의 위협 속에서도 어떻게 팀워크를 강화하여 교회를 더 많이 개척하고 부흥할 것인가에 대해 수차례 모임을 갖고 기도하며 전략을 짰다. 현지 실정을 감안한 가정교회 개척을 위한 팀 사역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미 성격이 뚜렷한 2개의 개척교회가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6개의 가정교회가 서로 연합하고 상생하며 팀으로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을 하였다.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먼저 사핑바 기차역 인근에 있던 각각의 3개 교회를 한 장소에 통합하였다. 그리고 세 교회의 주일예배는 각기 시간을 달리하여 겹치지 않게 하고 매주 금요기도회와 학생수련회, 연중 절기행사와 지도자훈련은 6개 교회가 함께하기로 하였다. 매주 6개 교회가 연합하여 20-30명의 열심 있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금요기도회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며 부흥의 열기를 이어갔다. 설교는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기도회는 현지인 사역자들이 맡았다. 또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에는 교회마다 다양하게 행사를 준비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생명을 잉태하는 큰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절기 행사 때마다 200-250여 명의 인원들이 모였고 20-30여 명이 결신하였다. 2010년 3월부터 다음 해 12월까지 팀 사역을 하면서 적잖이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너지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로 함께하셨던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 팀 사역의 와해 
충칭 교회개척 팀 사역의 와해는 보안 문제 때문이었다. 2011년 성탄절 연합행사를 며칠 앞두고 공안들은 한 내부 고발자를 통해 우리의 정황을 알게 되었다. 12월 20일경 공안 6명이 L 선교사님 집을 찾았다. 그때 나는 우연히(하나님의 은혜로) 난생 처음 며칠째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L 선교사에게 느닷없는 전화가 왔다. “선생님, 우리 집에 공안들이…,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으세요!” 공안들은 L 선교사를 통해 성탄절 연합행사를 강제 취소시켰고 앞으로 가정교회 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다고 단단히 경고를 했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더 이상 개척 팀워크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보안 문제로 L 선생은 바로 한국으로 들어갔고 사업자 비자로 전향하여 다시 충칭으로 돌아왔다. 이미 K 선생의 가정은 2010년 여름 안식년으로 충칭을 떠나 있었다. 삼엄한 보안 문제로 2012년 우리 가족도 충칭 사역 10년 만에 첫 안식년을 떠나게 되었다.

▶ 현지인 사역자들에게 목양을 이양
보안 문제로 L 선교사는 사업자 비자로 전향하여 충칭에 돌아와 커피숍을 열고 조심스럽게 제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했다. 우리 가족은 캄보디아로 안식년을 떠나면서 대학성에서 함께 동역하던 B 사역자에게 사역을 위임했다. 그리하여 이 무렵 우리 교회의 B 사역자와 L 선교사의 제자인 H 형제도 마음껏 목양하며 부흥을 일으켰다. 2012년 우리 가정이 안식년을 떠나자 5-6월경 대학성 교회의 30여 명 형제자매들은 매주 보안 문제로 몇 차례나 공안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공안들은 그들에게 계속하여 우리 선교사 부부를 찾아오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은 우리를 잘 변호해 주었다. 그들은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어 교사였다고 했고, 실제로 우리는 매주 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 선교사들이 부득불 현장을 벗어나 있는 동안 하나님은 현지사역자들에게 그동안 우리들을 통해 배우게 하신 것들을 독립적으로 목양에 적용하며 리더십을 배양하게 하셨고 자립적으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적절한 계기가 되게 하셨다. 

▶ 대학성 교회의 부흥과 사역의 열매
2013년 안식년을 보내고 돌아왔으나 우리 부부는 보안 문제로 더 이상 대학성 교회에 갈 수가 없었다. 2014년 2월 중국인 사역자(B)에게 대학성 교회를 온전히 위임했다. 하나님은 심히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에게 5년간의 대학성 교회 사역 가운데 많은 열매를 허락해 주셨다. 60여 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셨고 6명의 전임 사역자가 배출되었다. 현재의 대학성 교회는 전임 사역자로 헌신한 리 형제와 그의 아내 친 자매를 통해 계속 개척되고 있다. 이들의 사역을 통해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시길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할렐루야!


제5기: 2013-2015년
난핑공상대학(南平工商大学) 가정교회 목양
공상대 가정교회는 2011년 대학성 교회에서 졸업한 1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충칭 도심지에 취업하여 함께 동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교회로 개척된 사례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3년간 목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생활 초년생들이어서 직장이 불안정했고 이직이 잦았다. 우리 집도 공상대 교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이 불편하여 매주 30분 넘게 택시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이 모임에 참석하던 공상대 학생들도 먼 곳을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다소 불편했다. 공상대 교회에서 사역할 때도 매년 졸업생들은 떠나갔다. 결국 현지에 남아 있던 직장인 형제자매들도 떠나기 시작하자 다시금 ‘대학생선교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중국 전역으로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진 형제자매들을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복음의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꽃을 피우며 열매 맺게 하실 것을 소망하며 위안을 삼았다. 무성한 잎과 열매를 모두 떨군 겨울 나목(裸木)은 앙상한 가지만 남듯이 선교사들도 때로는 그러한 고독을 느끼고는 한다. 물론 절망감이 찾아올 때도 있다. 또 선교는 물질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빈번히 재정적인 부담을 안고 학생들을 만나야 할 때가 많았다. 개성과 기호가 분명하고도 다양한 개개의 젊은이들과 문화를 넘어 충분히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과 아울러 가급적 넉넉하고 성의 있는 식사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사역을 위한 아내의 부지런함과 성실한 동역은 헌신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내는 그 역할을 묵묵히 감당했다. 물론 어린 세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일도 아내의 몫이 훨씬 컸다.


제6기: 2014-2018년
은혜가정교회 목양
어느새 충칭에서 대학생을 통한 교회개척을 목표로 선교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감사하게도 충칭을 떠나지 않고 꿋꿋이 남아 있던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안식년을 떠날 때만 해도 가나안교회의 몇몇 청년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었다. 하지만 모두의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B(중국인) 사역자를 위임하고 공상대 가정교회를 맡겼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얼마 못 가 이런저런 이유로 흩어졌다. 우리가 충칭으로 돌아오자 이들은 다시 목마른 사슴들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2년여간 주일 오전에는 공상대 가정교회에서 예배 모임을 갖고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가나안교회 식구들과 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이름도 새롭게 ‘은혜교회’로 바꾸었다. 은혜교회 성도들 중 몇몇은 10년에 가까운 돈독한 친분을 쌓고 있었다. 20대 초반 풋내기 시절 예수님을 영접했고 아내가 차려 준 한국 음식을 먹으며 신앙이 성장한 학생들이었는데 이제는 의젓한 30대 초반의 직장인들이 되었다. 2016년 은혜교회에서 3명의 형제자매들이 배우자들을 전도하여 세례를 받고 결혼도 하였다. 이들로 인해 교회가 많이 부흥되리라고 기대를 했다. 이들이 십일조만 잘해도 가정교회의 자립은 어려움이 없었다. 이 무렵 은혜교회의 예배 모임도 새로운 아파트로 옮겼다. 주일이면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들이 너무도 대견스러웠고 고마웠다. 이들은 우리가 추방될 때까지 든든히 교회를 지켰다. 


제7기: 2015 – 2018년
시난대학 은헌(西南大学 恩献)가정교회 
2015년 5월 우리가 충칭을 떠나게 되는 또 하나의 위기가 닥쳤다. 어느 날 쓰촨외대 한국어과 학생에게 전도를 했는데 그만 나를 공안에 고발한 것이다. 교수들은 대책회의를 열고 나를 찾았다. 피난처 되신 하나님은 이 장맛비도 피해가게 하셨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평소 보안의식이 철저했던 나와 성이 같은 다른 선교사님을 조사하였는데 그분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껏 쓰촨외대에서 유학생 비자를 발급받았던 나는 더 이상 비자를 발급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충칭 시내의 여러 다른 대학으로 급히 가서 비자신청을 해 보았으나 이미 우리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비자발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기도 중에 충칭 도심 북부지역인 베이베이(北碚)지역에 있는 시난대학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우연히도 미국 한인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대학 내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한 장로님을 만났다. 사정을 말씀드리자 장로님은 주임교수와 사업적으로 이야기가 잘 된다면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곧 사업가 장로님을 앞세워 시난대학 담당교수를 만났다. 그 교수는 장로님의 예측대로 비자를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비자 만기를 며칠 앞두고 우리 가족은 또 하나의 위기를 넘겼다. 


하나님이 이렇게 멀리 나를 시난대학으로 보내신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실 것이다. 이 대학에서도 교회를 개척하고 영혼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마침 6월경 우시한인교회 P 장로님이 선교지를 돌아보기 위해 은혜교회를 찾아오셨다. 그래서 P 장로님께 우리가 시난대학에서 비자를 발급받게 된 경위와 대학 부근에서 가정교회를 개척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장로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매월 2천 위안을 후원하기로 약정하셨다. 이리하여 시난대학 은헌교회가 시작되었다. 할렐루야! 그러나 생각했던 대로 이런저런 모양의 난관은 많았다. 일단 거리상의 문제였다. 매일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왕복 4시간 이상을 소요하며 오가야 했다. 또한 삼엄한 보안 속에 아는 학생 한 명도 없이 학생들에게 직접 전도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선교사로서 신분은 충분히 노출된 것 같았다. 전도를 위해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교제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급히 보내주신 후원금으로 집을 임대하여 한국어 학습반을 개설했다. 감사하게도 8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한 학기 동안 이들을 가르치는 중에 3명의 학생들이 결신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충칭 선교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 있던 현지지도자들의 리더인 한 목사님을 통해 현지인선교사훈련생 자매를 동력자로 보내주셨다. 그 자매는 목사님의 제자로서 선교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사역훈련을 하며 머물 곳이 필요했다. 우리도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상주하며 눈이 띄지 않게 학생들을 살펴 줄 동력자가 필요했다. 

은헌교회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놀라웠다. 우리는 은헌교회를 통해 소수민족인 모수족(摩梭族) 천 자매, 투자족(土家族)인 바이 자매와 마오 형제, 콩나물을 재배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황 형제의 가족 3명을 끝까지 섬길 수 있었다. 2년간의 한국어 교실과 몇 차례의 아가페(전도만찬)로 복음을 전하여 개척한 사례이다. 이들 중 신학에 관심이 있던 천 자매는 한국으로 나가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천 자매가 사역자가 되어 모수족에게 일평생 전도하는 헌신자가 되길 기도하고 있다. 2017년 여름 동력자가 떠나고, 2018년 이들도 졸업하고 황 형제의 가족만 남았다. 그리고 후원도 끊어졌다. 그해 시진핑(习近平) 정부는 강화된 종교법으로 가일층 가정교회를 핍박하고 선교사들을 대거 추방했다. 어쩔 수 없이 은헌교회도 남은 성도들을 가까운 다른 교회로 보내고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음전파의 황금기는 지나가 버리는 듯했다. 핍박이 가속화하자 성도들도 적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이제는 라오 형제의 가정과 어우 형제의 집을 열어 예배드릴 수밖에 없었다. 가정교회는 온전히 현지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운명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모든 것이 일장춘몽 같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든 무리들이다. 그렇기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믿고 나아갈 수 있다. 

충칭에서 지나간 만 15년 동안 대학생 가정교회의 개척을 위해 복음을 전했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교회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그동안 무익하나마 하나님께 드려진 눈물과 헌신을 주님은 기쁘게 받으셨으리라 믿는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잠시 흩으시고 새롭게 훈련하실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흩어졌으나 영광의 부활을 목격하고 주님께 다시 헌신한 것처럼, 하나님은 흩어진 열매들을 통해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용하실 것을 믿는다. 

이제 중국선교가 아니라 선교중국을 위해 한국으로 유학 온 중국인 대학생을 중심으로 선교를 구상하고 있다. 중국 대학생선교를 통한 교회개척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하신 주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채우는 분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도 마음이 든든한 것은 전임 사역자로 헌신한 6명의 사역자들과 끝까지 예배 공동체로 함께해 온 10여 명의 형제자매들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 모두는 주님 곁을 슬며시 떠났지만 부활의 주님이 다시 그들을 부르실 때 성령충만한 역사로 능력 있는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고 온전히 헌신하였다. 중국 대학생선교를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도 반드시 주님의 때에 활짝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기대한다. 
 
“가서 제자 삼으라”(마 28:16-20). 못내 아쉬운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시간에 더욱 충성을 다하여 제자 삼는 사역에 열정을 쏟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늘도 새로운 소망 중에 그들을 위해 새 영으로 기도드릴 것을 거듭거듭 다짐해 본다. 






사진 출처 | (위) 知乎(바이두)/(아래) 픽사베이 
박제완 | 전 중국선교사
       인쇄하기   이메일보내기   
   
110-812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29길 25, (명륜3가 명륜빌딩 202호)   Tel : 02)745-0780~2, 070-8236-1270   Fax : 02)745-0786    E-mail : sinim@chol.com
Copyright 중국어문선교회 All Rights Reserved.     Product by gmgl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