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설정   사이트맵    사역에 동참하시려면  
    HOME  |  선교회소개  |  교육.훈련  |  중국을주께로  |  중국기도  |  중국어교실  |  자료나눔  |  커뮤니티  |  도서·음반
   
중국을 주께로는
전체보기
이번호보기
지난호보기
주제별보기
  특집/기획
  선교전략
  중국교회
  중국사회와 문화
  지역 및 종족연구
  중국뉴스
  중국어관련
  선교일반
  선교나침반
  중국 기독교
  기획
정기구독안내
해외정기구독안내
HOME > 중국을주께로 > 이번호보기
2022.9.3 통권 241호     필자 : 김종건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천주교 금교(禁敎) 시기 (1)

중국 천주교 금교 시기
17세기를 지나며 중국선교의 성과는 30만 명으로 늘어난 천주교도를 통해서 확인된다. 그러나 17세기 말엽 강희제(康熙帝) 치세 후반에 선교사 내부의 의례 논쟁은 강희제의 금교령 반포라는 예기치 못한 난관을 자초하였다. 

강희제는 금교 조치를 통하여 중국 전통 한족 문화의 보호자를 자임하며 만주족의 청조(淸朝) 통치를 유지하는 한편, 선교사 가운데 청조에 필요한 과학 기술을 가진 인물들을 초빙하여 기용하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정책 기조에 근거하여 비록 공식적인 선교활동은 금하였으나 선교사나 신도들에 대한 강력한 처형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중국 청조의 표면적인 금교 조치는 이후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가경제(嘉慶帝), 도광제(道光帝), 함풍제(咸豊帝) 시기까지 이어졌고, 제2차 아편전쟁을 공식 마무리하는 1860년 북경조약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해제되었다. 

1721년 강희제가 천주교를 전면 금지한 뒤 1860년까지 140여 년 동안의 중국 천주교의 역사는 ‘금교(禁敎) 시기’로 일컬어진다. 금교 기간에 일부 선교사들은 중국 조정의 단속을 피해서 개별 선교를 진행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금교령을 위반한 선교가 발각되거나 교안이 일어나 단속되기도 하였다.
   
옹정제(1723∼1736)의 금교 조치
강희제 말년에 시행한 상대적으로 온건한 천주교 금령은 옹정제 즉위 후 명실상부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옹정제가 천주교를 엄격하게 금하는 조치를 시행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그것은 바로 옹정제가 선교사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불만이 있었고, 청조에 대한 교황의 대처를 불쾌하게 여겼으며, 천주교가 아닌 라마교와 샤머니즘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강희제와 달리 서양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선교사와 천주교의 중국 진출과 확산으로 인한 외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는 등이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선교사와 천주교를 받아들인 황족 중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옹정제와 즉위 전에 경쟁 구도를 가진 것이 옹정제 즉위 이후 천주교 금령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1700년 중국에 온 포르투갈계 예수회 선교사 모라오(穆敬遠, Joannes Morao)는 청 조정에서 번역 업무를 담당하면서 강희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친분이 깊었던 강희제의 아홉 번째 황자 윤당(胤禟)을 황태자로 삼자고 상소하였다가 이루어지지 않자 천주교를 신봉하는 만주 황족 소노(蘇努)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여덟 번째 황자 윤사(胤禩)를 황태자로 옹립하는 무리수를 감행하였다. 강희제의 네 번째 황자 옹정제는 즉위 뒤 바로 모라오를 체포하여 서녕(西寧)으로 유배 보냈다. 옹정 4년(1726) 포르투갈 국왕은 특사와 80명의 수행원을 많은 예물과 함께 중국으로 보내 모라오의 석방을 청원하였으나 옹정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모라오는 서녕에서 독살을 당하였다. 

옹정제는 소노 일가에도 보복성 처벌을 내렸는데, 옹정 2년에 소노의 여섯째 아들 륵십형(勒什亨)과 열두 번째 아들 오이진(烏爾陳)을 서녕으로 유배 보냈다. 또 77세의 소노를 북경에 있던 자손 39명과 함께 우위대(右衛隊)로 유배 보냈으며, 다른 아들들도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들의 가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옹정제의 불편한 심기를 바탕으로 즉위하던 해(1723)부터 민절총독(閩浙總督) 만보(滿保) 등 천주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들이 이어졌다. 복건 복안(福安)을 기반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스페인 국적 도미니크회 선교사 시에라(Biaz de la Sierra)와 오슬로(Eusebio Oslot)가 예수회의 선교정책을 반대하며 중국 신도들이 조상 제사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엄금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고발이 있자 총독 만보는 천주교가 사교이므로 모든 선교를 금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북경 흠천감(欽天監)에서 일하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 쾨글러(戴進賢, Ignatius Kögler, 1608∼1746), 예수회 선교사이자 궁정화가였던 카스틸리오네(郎世寧, Giuseppe Castiglione), 도미니크회 수도사 무노스(Munos) 등이 나서서 사람을 보내어 만보를 설득했지만 그의 뜻을 굽히지 못하였다. 상소를 접한 예부는 북경에서 조정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선교사를 마카오로 보내고, 천주당(天主堂)은 몰수하고, 교인들은 신앙을 금한다는 지침을 세워 황제에게 올렸다. 

옹정제는 1724년에 정식으로 예부의 건의를 비준하여, 각 성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중국인들을 모두 천주교 신앙을 버리게 하고 거부하는 자는 처형하게 했다. 그리고 서양인 선교사들은 모두 마카오로 철수하고 반년 내에 중국을 떠나게 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천주교 선교활동은 전면 금지되었다.

1725년 교황 베네딕트 13세는 옹정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중국으로 파송하여 광동(廣東)에 억류되어 있는 페드리니(德理格, Pedrini)를 비롯한 신부들의 석방과 천주교 선교활동의 재개 허용을 요청하였다. 이에 옹정제는 잡혀 있던 선교사에 대해서는 이듬해에 석방을 지시하였지만 금교령을 해제하지 않았다.

이러한 옹정제의 확고한 의지로 인해 각 지방 관료들은 계속해서 금교 조치를 강력하게 시행하였고, 북경의 천주당을 제외한 전국의 300여 개소의 교회당도 모두 몰수하였다. 예를 들어 항주(杭州)의 천주당은 천후궁(天后宮)이 되었고, 남경(南京)의 천주당은 곡물창고가 되었으며, 상해(上海) 천주당은 관제묘(關帝廟)로 바뀌었다. 

1732년 302명의 선교사가 광주(廣州)로 압송된 뒤 귀국 조치되었고, 고집스레 몰래 남아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도 속속 마카오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전국 각지의 30여만 명의 신도들은 순식간에 목자 잃은 양이 되고 말았다. 

옹정제의 금교 조치 이후
금교 조치가 엄격히 지켜지는 가운데서도 일부 선교사들은 비밀리에 중국으로 잠입하여 선교를 진행하였다. 옹정제의 재위 기간(1723∼1736)에 모두 20∼30여 명의 선교사가 중국 내지로 숨어들어 선교를 이어갔다는 보고가 있다. 

중국의 선교 사역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이탈리아 나폴리에 ‘성가학원(Collegio dei Cinesi)’이 세워져서 중국인 출신 선교사가 양성되었다. 북경에서 선교하다가 1723년 귀국한 마테오 리파(Father Matheo Ripa, 1682∼1745?) 신부는 귀국할 때 중국인 신학생 네 명과 한 명의 한문 교사를 동반했고, 그가 세운 이 학교는 1732년 학생 모집을 시작한 이래 1888년 정부에 의해 폐교되기까지 106명의 중국 학생을 교육하였다.1) 

금교령 이후, 북경 조정에서 복무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옹정제에게 관용을 요청하였다. 옹정제는 파르냉(巴多明, Dominique Parrenin, 1665∼1741), 마이야(馮秉正, Mailla, 1669∼1748),프리델리(費隱, Xavier Ehrenbert Fridelli, 1673∼1743)와 대화에서 천주교와 선교사에 대해 반감이 없음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옹정제는 선교사들이 모든 중국인을 천주교도로 만들려고 한다며, 그렇게 되면 장차 중국이 서양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도 있음을 염려하기도 했다. 강희제는 천주교와 유학이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옹정제는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이것이 즉위 이후에도 천주교 금령을 유지한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미주      
1) 沙百里, 《中國基督徒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8), 182쪽.








사진설명 | 옹정제(雍正帝)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인쇄하기   이메일보내기   
   
110-812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29길 25, (명륜3가 명륜빌딩 202호)   Tel : 02)745-0780~2, 070-8236-1270   Fax : 02)745-0786    E-mail : sinim@chol.com
Copyright 중국어문선교회 All Rights Reserved.     Product by gmgl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