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모리슨 선교사, 중국선교 215년이 되는 해
올해는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Robert Morrison, 马礼逊, 1782∼1834)가 7개월의 긴 항해 끝에 중국(당시 청나라) 광저우(广州)에 도착한 지 215년이 되는 해이다. “중국에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며 그의 중국행을 비꼬는 소리에 “천만에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확고히 대답했다. 아프리카선교사의 꿈을 접고 중국에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시급성과 중국어 성경번역의 절박성에 부응해 중국을 선택했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엄격한 쇄국정책과 철저한 금교령으로 인해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외국인으로서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외국인이 중국어를 배우려는 목적에는 반드시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청 정부는 판단하고 외국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단속했다. 만일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다 발각되면 그 사람은 사형을 면치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비밀리에 광둥어 등 중국어를 배워야 했고, 선생들은 늘 독약을 갖고 다녀야 했다. 발각되면 스스로 독약을 먹고 죽기 위해서였다. 대신 모리슨 선교사는 선교비 대부분을 중국어 학습에 지출해야 했다. 숙식비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 습기 차고 창 하나 없는 방에서 생활하며 배를 곯아가며 중국어 공부에 몰두했다. 영양실조 상태에 이를 정도였다. 서양 여성은 중국에서 거주할 수 없다는 청 정부의 조항 때문에 마카오에서 결혼한 아내와도 강제 별거생활을 해야 했다.
모리슨 선교사는 25년간 사역하며 10여 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했다. 하지만 과로와 병으로 1834년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 고군분투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사도행전(使徒行传)’ ‘누가복음(路加福音)’ ‘요한복음(约翰福音)’(1810년), ‘신약성경(新约)’(1813년), ‘구약성경(旧约)’(1819년), ‘신구약성경(神天圣书)’(1823년) 등을 번역, 출간했다. 말레이시아 말라카에 교육기관인 ‘영화서원(英华书院)’과 인쇄소를 각각 설립해 화교 사회와 중국을 위한 인재 양성과 출판 사역에 몰두했다. 중국인 최초 개신교 목회자인 량파(梁发)를 배출했고, 중국 최초의 중영사전인 ‘华英字典’을 펴냈다. 첫 번째 세례 기독인은 모리슨 선교사의 문서 번역과 출판 사역을 도왔던 인쇄공 차이야가오(蔡亞高)다. 량파의 대표작은 1832년 광저우에서 출판한 ‘권세양언(劝世良言)’으로 총 235쪽, 약 9만 자의 9권으로 이뤄진 책자로 훗날 훙쉬취안(洪秀全)의 태평천국 건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권세양언은 량파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바탕으로 쓰고 모리슨과 밀느 선교사의 성경번역본인 ‘神天圣书’를 발췌, 전재한 것이다. 그는 앞서 자신의 개종과 세례, 전도활동과 종교적 체험 등을 자술한 ‘熟学圣理略论’을 출간했다. 량파는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대부에게 기독교 전단과 책 등을 배포하며 전도하는 데 힘썼다. 1년에 나눠준 소책자가 7만 권에 달할 정도였다.
허드슨 테일러와 티모시 라차드 사역의 융합, ‘다 함께 누리는 행복방정식’의 좋은 실마리
모리슨 선교사 이후 ‘케임브리지 7인’ 즉 C. T. 스터드(1860∼1931), 스탠리 P. 스미스(1861∼1931), M. 비우챔프(1860∼1939), 윌리엄 W. 캐슬스(1859∼1923), 딕슨 E. 호스트(1861∼1946), 아서 T. 폴힐터너(1863∼1935), 세실 H. 폴힐터너(1860∼1938) 등 수많은 주님의 종들이 중국 땅을 밟았고, 온갖 위협과 편견에 시달리면서도 심지어 자신은 물론 아내와 어린 자녀의 목숨까지 잃어야 했지만 끝까지 복음을 전했다. 최후까지 선교사의 본분을 잃지 않았던 초기 중국선교사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엄혹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현재의 중국교회와 중국기독교인들이 올곧게 걸어가야 할 길이 보다 선명해진다. 그런 점에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중국명 戴德生, 1832∼1905)와 티모시 라차드(Timothy Richard, 李提摩太, 1845∼1919) 사역의 융합이 좋은 실마리가 될 것이다. 즉 일반인을 성도, 주님의 제자로 이끄는 허드슨 테일러의 ‘아래에서 위로의 사역’과 자선, 교육 등으로 중국 사회의 좋은 이웃으로 다가가는 티모시 리차드의 ‘위에서 아래로의 사역’이 융합된다면 중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중국인들의 참된 위로자이자 희망의 쉼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혼 구원을 최우선시 했다. 지식 훈련보다는 영적 훈련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 복음에 대한 열정과 중국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낙후한 곳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이들을 선교사로 허입했다. 복음보다 앞선 선진교육은 장려하지 않았다. 성경과 복음 서적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초등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종교와 정치를 엄격히 구분했다. 어떤 핍박을 받아도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 모든 문제를 풀려고 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자신이 설립한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소속 선교사가 58명이나 살해당했지만 피해보상을 요청하지 않아 중국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반면 티모시 리차드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와 일상이 분리될 수 없다고 여겼다. 생활환경 개선을 넘어 선한 행위를 통한 지상천국 건설에 힘써야 한다면서 교육을 통해 중국 사회를 바꾸려고 했다. 선교사의 영적 수준도 중요하지만 중국인들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아야 한다고 했다. 3년마다 선교사들에게 중국 문화, 역사, 법률, 예술, 예의 등에 대해 시험을 보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두 선교사의 길은 자연스럽게 일반 대중 중심과 상류층 중심으로 한 사역으로 나눠졌다. 예를 들어 허드슨 테일러는 1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해 1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을 목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티모시 리차드는 탁월한 1명의 선교사를 파송해 100만 명의 기독교인을 이끌도록 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것이다. 두 선교사의 사역은 서로 상보관계라고 생각된다. 아래에서 위로의 사역과 위에서 아래로의 사역이 각각 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도 해 ‘다 함께 누리는 행복방정식’을 만든다면 또 다른 사역으로 이뤄지고 대안이 될 것이다. 두 선교사가 걸어갔던 길을 중국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중국교회와 중국기독교인의 모델을 만든다면 중국 정부 또한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현재의 어려움에 절망하지 말고 그동안 잠시 미뤄두어야 했던 총체적 복음의 확산을 일상을 통해 구현해내야 한다. 중국에서 비자발적으로 떠나야 했던 한인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이 있는 또 다른 세계에서 사역하려고 애쓸 뿐 아니라 중국교회와 중국기독교인들이 온전한 복음을 모든 일터와 가정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도와야 한다. 아직 중국에는 복음이 전해질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각종 법규들이 실행되고, 더 많이 만들어지겠지만 복음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완벽하게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확산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복음은 완전하게 차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중국 정부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교회와 중국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보여주는 데만 힘써야 한다.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주님을 전하기 위해 중국 인민의 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시름은 그날로 족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믿음의 행진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선교사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인선교사가 가장 많이 사역하고 있던 곳이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기독교인들 가운데 아직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우리에게 중국은 선교적으로 낯선 땅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1913년 11월 3명의 목사를 중국 산둥(山东)성 라이양(莱阳)에 파송, 중국선교를 시작했다.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선교예산이 2만4000여 원(현 화폐가치로 60억 원 정도)일 정도로 중국선교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해방 이후 첫 한국인선교사였던 고(故) 최찬영 목사님이 생각난다. 1955년 4월 장로교단 첫 선교사로 임명된 그를 2011년 초에 만났다. 최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선교사 파송의 양적 성장에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목회 일선에서 낙방한 사람이 선교사로 나간다는 얘기가 들려요.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을 보세요. 우리는 선교사의 상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것,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섬기러 가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선교사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요.” 선교사와 현지인과의 관계를 세례 요한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는 흥해야 하겠으나 나는 쇠해야 하리라’는 요한의 고백처럼 선교지의 모든 사람들을 철저하게 섬겨야 합니다. 선교가 선교사 개인이나 파송국가의 자랑거리가 되면 안 됩니다. 선교의 참된 성과를 하나님이 분명히 계산하고 있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 목사님은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와 영화서원(英华书院)을 예로 들어 부연 설명했다. “모리슨 선교사는 중국 본토에서 선교가 불가능해지자 말라카에서 중국인 인재양성을 위해 영화서원을 세웠어요. 만일 화영서원(华英书院)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어땠을까요. 이름 하나 지을 때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중국 복음화는 외부인이 아닌 중국인의 손으로 이뤄야 했죠. 그에 대한 존중을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교회가 꿈꾸고 있는 선교중국 2030은 중국교회와 중국기독교인들이 건강한 신학과 신앙으로 무장돼 있을 때 이룰 수 있는 비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십자가를 온전하게 짊어질 수 있는 영성, 지성, 감성이 균형 잡혀 있는 사역자만이 선교중국 2030을 일상으로 보여주는 답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교회여, 중국기독교인들이여, 예수님의 사랑과 모범을 따라 스스로 종이 되는 것이 곧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웃, 중국인들에게 다가가는 접촉점이자 종착점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사진 출처 | 바이두→픽사베이 (위에서부터) 왕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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