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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3 통권 235호     필자 : 변성래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성문 앞에 선 이방인들 문화의 충돌》- 1830∼1850까지 근대 중국의 형성 2
_A.J. 브룸홀 / OMF Rodem Books 원제 : The Shaping of Modern China

아편전쟁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인 1830∼1850년은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기록되는 영국과 중국(청나라)의 아편전쟁이 겹쳐진다. 당시 영국은 사자로, 중국은 용으로 상징된다. 영국과 중국 사이에 우발적인 사건들이 거듭되면서 상호 양보할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인 교섭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뿌리 깊은 의심이 자라게 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용이나 사자는 강요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만주 지배층을 ‘부패한 제국주의자들로 이루어진 거만한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중국인들은 서양인들(특히 영국인들)을 향해 ‘야만인들의 본성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이 보내는 상품은 그 가치가 의심스러운 것들뿐 중국에 보탬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중에 아편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았다는 것이 문제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옹정제(雍正帝) 초기인 1729년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아편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옹정·건륭제의 통치기, 이른바 3대의 황금기는 끝났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중국인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 도피와 쾌락을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천 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약 4만 상자로 늘어났다. 이것을 무게로 환산하면 300만 톤에 육박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부터 떠도는 유민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점점 더 중독에 빠져가고, 도덕은 심하게 타락해가며, 나라의 해안 안보가 위협당하고, 아편값을 대느라 은금을 모조리 빼앗기고 있는 경제 상황을 보고 도광제(道光帝)는 질겁했다. 아편 문제는 사회적인 차원을 벗어나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면서 중국과 영국의 불가피한 충돌로 이어진다.

아편전쟁 전후 선교사들의 사역
이러한 중국과 영국의 긴장감 속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어떤 몸과 마음의 자세로 그들의 사역을 감당했는가가 이 책의 주제이다. 의사이자 선교사인 찰스 구츨라프(독일인)와 허드슨 테일러가 그 주역으로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마땅히 이동할 배가 없었기에 아편 밀매업자들의 배를 얻어 타고 중국 내지로 들어가게 된다. 구츨라프는 이러한 현실에 갈등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그 후 한참이 지난 후에 영국의 기독교 신도들의 헌금으로 선교사들의 배가 마련된다). 

아편과 성경이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선교사들에게 중국과 영국의 전쟁은 ‘양날의 검’이었다. 1842∼44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난 뒤 영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南京條約)은 이후 서양 세력들이 홍콩에서도 활약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아주었다. 

중국인들은 1844년에 미국과 프랑스와 조약을 맺으면서 모든 외국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여야 했다. 프랑스가 고집했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자유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박해 칙령들은 폐지되었고, 선교사가 조약 시 개방한 5개 항 바깥에서 발견되면 그저 자국의 영사들에게 인계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약의 이행은 지방 관리들의 태도에 크게 의지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조약을 무시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 
‘영원히 계속될 중국인의 교회’를 만들려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찰스 구츨라프가 들었던 횃불이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에게 건넬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조부모인 존 테일러와 메리 셰퍼드는 존의 아버지 제임스의 담대한 사역을 이어 받았다. 그들은 모든 남는 시간에 설교하고 성경공부를 지도하였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욕설을 듣고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세게 때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거나 맞아라!’고 할 때 그것을 칭찬으로 여겼다. 존과 메리는 8명의 자녀를 철저히 감리교의 신념에 따라 키웠다. 둘째인 제임스 2세는 로더럼의 한 ‘화학자요 약제사’의 도제(徒弟)로 지내다가 약사(혹은 처방 약제사)가 되었다. 제임스는 웨슬리파 벤자민 허드슨 목사의 딸인 아멜리아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약혼을 했다. 그리고 1831년 4월에 결혼하여 함께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쓰실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같은 마음으로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첫 태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아이가 태어난 1832년 5월 21일부터 몇 달이나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라고 지었다. 

그들은 살아생전에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받는 모습뿐 아니라 아들이 기초를 세운 선교사역이 성공적으로 자라가는 것까지 직접 보았다. 부부는 아들이 복음을 위해 중국의 문을 여는 일에 어떤 역할을 감당하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노련한 선교사가 될 때까지 자신들이 한 기도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도 않았다. 허드슨 테일러는 대단한 진보와 변화의 시대에 살았다. 그가 두 돌이 지났을 무렵 대영제국의 모든 노예들이 해방되었고, 카리브제도 농장들과 관계를 둔 감리교 사회와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 노예들은 해방 전날인 1834년 7월 31일에 축제를 벌이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존 테일러가 사망했는데 허드슨 테일러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것들 중 하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과 그 몸의 감촉이었다고 한다. 어린 허드슨에게 삶과 죽음의 엄숙함이 깊이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여리고 병약한 아이여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는 지나친 실내생활과 운동 부족 탓인지 호리호리하고 창백했으며, 결국 학교를 다니던 몇 달 동안도 감기를 비롯한 가벼운 병들 때문에 결석하는 날이 많았다. 그 이후 19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한나절 이상 심각하게 앓은 적이 없었다는 그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도 그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다. 아무래도 사실보다는 이전 저자들의 해석 때문에 이런 전설이 만들어진 것 같다. 집안의 종교적 분위기는 유달리 강렬했다. 책의 저자는 허드슨이 그 어린 나이에 영적 소화불량이 걸렸던 것이 아닐까 기록한다. 그 이유는 15살이 되면서 허드슨의 영적 생활이 시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다. 자신이 믿던 것에 의심이 생겨 괴로움에 빠진다. 그러나 엘리야의 겉옷은 극적인 상황 속에서 그 후계자에게 떨어지게 된다. 구츨라프가 23년 만에 유럽을 방문하려고 준비 중이던 1849년, 허드슨 테일러는 여전히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허드슨을 향한 주님의 시선은 멈추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상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허드슨은 읽을거리를 찾아 아버지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한 권의 소책자를 집어 들었다. 심드렁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 읽어 가다가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여인의 이야기(허드슨은 그전부터 성경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대목에 허드슨의 영혼이 흔들렸다. 회심의 순간이었다. 그 후 그는 중국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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