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회사최종.jpg) 선교 성과의 명암
16세기에 천주교가 중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한 이후,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 실정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선교 노선을 수립하여 이행하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 대상은 중국 사회에서 지도력을 가진 상층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면서 궁극에는 황제의 관용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선교 방법으로는 중국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서방 과학 지식 전수를 병행하면서 천주교에 포함한 서학 전반에 대한 학술적 친화력을 높이면서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하는 선교의 질적 성과를 올려 나갔다. 교리적으로는 유교와 천주교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채택하여 중국에서 천주교 전파가 비교적 순조롭고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해 나갔다.
한편 양적인 실적에 치중하여 기층민을 대상으로 직접 포교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각지로 들어가 노방전도를 하고 교당을 짓고, 형편이 되는 대로 미사와 각종 종교의식을 적극 거행하면서 신도 수를 늘리는 것을 중심 과제로 삼는 선교단과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 결과 1636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국 천주교 신도는 38,200명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고위관리(高位官吏) 14명, 진사(進士) 10명, 거인(擧人) 11명, 생원(生員) 300명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들을 제외한 절대다수는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외래문화로 그 교리와 의식이 중국 전통사상이나 풍습과는 전혀 달라서 선교사들이 민간으로 바로 들어가 활동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오해와 불만 등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선교사들을 배척하고 선교를 반대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루지에리(羅明堅, Michele Ruggieri)가 조경(肇慶)에 들어간 1582년 이후 남경교안(南京敎案) 이 발생하는 1616년 이전까지 크고 작은 ‘교안’ 54건이 일어났다.1) 천주교에 반대하면서 불거진 사건인 교안은 대체로 유가사상, 불교, 도교 등 중국 전통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었고,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천주교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을 펴거나, 심지어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도(邪道)라고 하고, 조정에 반역한다는 등 근거 없는 모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경교안 1616년 남경교안역시 현지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만력 44년(1616) 5월 8일 남경 예부시랑(禮部侍郎) 심각(沈㴶)이 〈원이난입도문암상왕화(遠夷蘭入都門暗傷王化)〉라는 첫 상소를 올리면서 남경교안의 단서가 열렸다. 절강(浙江) 오흥(吳興) 사람으로 당시 저명한 승려 연지(蓮池)의 제자였던 심각은 상소에서 홍무강(洪武岡)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 알폰소 바뇨니(王豊肅, Alfonso Vagnoni) 등의 선교활동을 공개 비판하였다.
그는 바뇨니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멋대로 집회와 종교의식을 진행하고, 신도들의 집에서 신주를 제거하고 천주의 상을 바꿔 걸게 하고, 구제를 명분으로 신도들에게 돈을 나눠주며, 배신하면 죽는다고 협박하고 있어 염려된다고 하였다.
심각은 8월과 12월에도 잇달아 상소하여 천주교를 공격하고 선교사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요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와 도교는 전해진 지 오래되었기에 유교의 가르침과 함께할 수 있으나, 천주교는 새로 만나는 것으로 중국 전통을 이어가는 데 해가 되므로 무지한 백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엄단하는 것이 만세 치안의 계책이라고 했다. 둘째, 선교사들이 전통 역법을 부정하여 치국(治國) 기강을 허물어뜨리고 있으므로 허황되고 불경한 논리가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천주만 받들면 천당에 간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불효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치국의 전통인 효제(孝悌)를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넷째, 선교사들이 입교자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등 소은(小恩)과 소혜(小惠)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매수하고 주술로써 백성을 기만하고 거짓을 일삼고 있으므로 이를 금해야 한다고 했다. 다섯째, 선교사들이 신도들을 널리 불러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고 역모를 꾀하는 혐의가 있으며, 스페인이 선교를 구실로 필리핀을 탈취한 사건이 그 실례(實例)라고 지적하면서 선교사들의 배후에 훨씬 더 큰 정치적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여섯째, 천주를 근거 없이 받들고 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고 있다면서 천주교 교리 자체가 가르침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심각은 만력 황제에 상주문(上奏文)을 올리는 동시에 예부상서(禮部尙書) 방종철(方從哲)의 지시에 따라 남경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체포도 주도했다. 7월 21일 순성어사 손광유(孫光裕)는 그의 명에 따라 선교사 알폰소 바뇨니, 알바로 세메도(德昭, Alvaro Semedo), 중국 신도 14명과 아동 5명을 체포하였고, 8월 14일에는 중국 신도 종명례(鐘鳴禮)와 장채(張寀) 등 8명을 체포하였다.
12월 28일 만력 황제는 선교사를 서양으로 돌려보내어 지방을 안정시키도록 명하였다. 1617년 심각은 친히 알폰소 바뇨니 등을 심문한 뒤 광주로 압송했다. 홍무강의 교당과 선교사 처소는 모두 철거되었고 효릉위(孝陵衛)의 화원은 매각 처분되었다. 또한 1613년에 이미 사망하여 매장한 실바(林斐理, F. da Silva) 선교사의 관을 파내어 시신을 조사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남경교안 이후 남경교안 발생 이후 중국 천주교 신도들은 경건한 신앙심과 교회를 지키려는 열정을 보였다. 많은 신도들이 살아남기 위해 잔꾀를 부리거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고, 기꺼이 고문을 받고 오직 신앙으로 고통을 감내하였다. 야오(姚如望, Jean Yao)라는 한 신도는 노란색 작은 깃발 4개를 만들어 이름과 고향, 직업 등을 써서 머리에 꽂은 채 스스로 주님을 위해 순교하겠다고 했다. 남경성에서 떡을 팔던 33세의 신도 하옥(夏玉)은 붙잡힌 뒤 감옥에서 죽어 중국 천주교 사상 첫 ‘순교자’가 되었다. 체포된 신도들은 심문을 받은 뒤 대부분 변방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로 인해 신앙을 등진 사람은 없었다.
사대부 출신 천주교도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 선교사를 숨겨주거나 혹은 황제에게 상소하여 시비를 가려줄 것을 청원하는 등 구명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서광계는 심각의 첫 번째 상소문을 보고 바로 유명한 〈변학장소(辨學章疏)〉를 올렸는데, 여기서 그는 첫머리에서 자신이 바로 천주를 믿는 사람 중 하나임을 시인하면서 심각이 선교사를 공격한 상주문을 정면 반박하였다. 서광계는 선교사들이 마음에 관한 일에만 몰두할 뿐 별다른 의혹이 전혀 없고 실제로 모두 성현에 속한 인물들이라 변호하였고, 천주교 교리도 유교 학설과 충돌이 없을 뿐 아니라 유교를 보완하고 불교를 바꾸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광계의 〈변학장소〉는 남경교안의 발발을 지연시키기는 하였으나 끝내 막지는 못했다.
선교사 추방이라는 황제의 유지를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서광계는 판토하와 우르시스 신부 등이 남쪽으로 피신하도록 도왔다. 남경교안 당시 고우(高郵)의 도대(道臺)로 재임 중이었던 이지조(李之藻)는 잇달아 남경의 지인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선교사들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했다. 양정균도 카타네오(郭居静, Lazzaro Cattaneo),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 트리고(金尼閣, Nicolas Trigault), 삼비아소(畢方济, Francesco Sambiaso), 롱고바르디(龍華民, Nicholas Longobardi), 스피레(史惟真, Pieter van Spiere) 등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화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미주 1) 曾德昭, 《大中國志》(何高濟 譯, 李申 校, 上海古籍出版社, 1998), 215쪽; 晏可佳, 《中國天主敎簡史》(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1.4), p.60 참조.
사진설명 | 서광계의 〈변학장소(辨學章疏)〉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