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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 통권 231호     필자 : 문영걸 프린트   이메일 
[특집] - 2021년 중국 상황과 기독교를 돌아보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동안 기독교 정책의 변화에 대한 단상

여는 말
1. 이해와 정책 모색 단계
2. ‘거친 탄압’ 
3. 이념에서 정책으로 전환
4. ‘부드러운 탄압’
맺는말



여는 말
노트북을 열고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정작 마음은 개운하지 않다. 원고청탁을 받은 중압감도 있지만, 그보다도 올해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라는 이 역사적 사실과 최근 중국선교 상황의 준엄함이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현실의 답답함 앞에서 막연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을 파악하고, 또 내일에 이루어질 일들을 전망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글은 역사학이나 종교사회학, 특히 선교학적인 학술논문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단지 중국교회를 사랑하고 중국 선교사역에 십여 년 이상을 헌신했던 필자의 제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체득한 바를 중국선교 동역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이론적인 바탕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가설 확립에 목적을 두지도 않는다. 이러한 전제에서 이 글은 먼저 중국공산당이 창당한 이래 100년 동안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정책 변화의 흐름을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문헌과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창립된 이후 100년 동안 기독교에 대해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현실적이거나 합리적 이유를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이렇게 단언하는 근거는 중국공산당이 태동 때부터 유물주의 무신론을 DNA로 한 근본적인 대립과 중국 사회 현실적인 상황에 따른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집과 자기중심적 태도의 설명이나 토론이나 설득이 이루어질 수 없는 ‘대화 불가’의 난국을 저변에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먼저 중국공산당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이해와 정책 수립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이해와 정책 모색 단계  

첫 단계는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부터 1950년대 초반의 집권 체제구축까지로 볼 수 있다. 이 기간은 중국공산당이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착안한 실용주의를 중국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이해로 고정해 가는 단계라고 규정한다. 1921년 50여 명의 발기인으로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그 당시 신문화운동의 반종교(反宗敎),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사조에 편승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하고 대적할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후 중국 상황의 격변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도 현실적으로 변해간다. 

중국공산당 창당 이듬해인 1922년 5월에 결성된 중국공산당의 청년조직 ‘중국사회주의청년단(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의 전신–필자 주)’ 창립선언문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공식화하였다. “기독교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가장 세력이 있는 도구이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1) 중국공산당의 정식 문건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언급한 것은 1923년 6월에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제정한 ‘중국공산당 강령’이다. 이 문건에서는 역대 ‘불평등조약’의 취소를 공언하면서 어떤 국가나 외국인이 중국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제한한다고 명시하였다.2) 그리고 1923년 11월에 제3차대회 집행위원회 결의서에 공산당원은 ‘기독교의 교리와 그 조직을 반대’해야 함을 요구하였다.3) 그러나 이 시기 중국공산당은 집권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영향도 미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입장 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공산당이 집권 초기부터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시각을 가진 이유가 이념적인 차원이기보다 서구 열강과 대립 구도가 형성되면서 열세에 처한 상황이, ‘서양 제국주의’를 대적하는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도구로 치부하고 배척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유물주의는 사실 실용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이해가 이념적인 대립보다 현실적인 취사선택임을 드러내는 증거는, 항일전쟁(抗日战争)과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우선 항일전쟁 시기에는 자신의 빈약한 세력의 보존과 증강을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중국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후방에 칩거하면서 기독교마저도 단결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소위 말하는 ‘통일전선’의 정책이 발동된다. 1936년 4월 중국공산당은 ‘항일인민전선선언’을 발표하며 중국기독교 등 기타 조직들을 향해 “주장과 신앙을 구분하지 말고 공동으로 나라의 위기에 힘을 합치자”라고 호소하면서 기독교를 통일전선의 범위에 포함한다고 표명하였다.4) 1939년 5월 당시 중국공산당 이인자 격인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우한(武漢)에서 기독교 인사 우야오쭝(吳曜宗)을 인사차 방문하여 “마르크스주의자는 무신론자이지만 종교신앙자유를 존중하며, 종교계 인사들과 합작하여 공동으로 항일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5) 심지어 선교사를 서양세계와의 유대 혹은 소통의 중요한 통로로 생각하고, 서양의 반파시즘(Anti-fascism)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수립을 위해 선교사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일인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은 1936년 7월 미국 기자 스노(Edgar Snow)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인선교사를 제외한 모든 외국선교사의 권익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6) 그리고 마오쩌둥은 1938년 10월 중국공산당 제6차전당대회 보고에서 “우리를 동정(同情)하는 모든 나라의 중국 체류 교민들과 평화 통상, 선교 등 사업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선언했다.7)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공산당이 현실적인 통일전선정책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바로 1942년 2월 2일 중국공산당 중앙기관지 해방일보의 사설이다. ‘신앙자유의 깃발 아래’라는 제목의 장편 사설은 항일전쟁 중에서 기독교의 활동을 충분히 긍정하고 여러 나라 선교사들을 칭찬하면서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각종 소중한 동정과 원조를 주었으며 적지 않은 노력을 다하였는데 이 모든 것을 중국 인민들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8)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태도가 2차대전이 종결되고 중국 내전이 발발하자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민주자유 진영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우방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 적대세력의 도구로 다시 회귀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기독교 활동은 인정한다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1948년 2월 발표한 ‘중국에 있는 외국인 정책에 관한 지시’이다. 이 문건에는 “일부 외국 선교사가 스파이 파괴활동을 감행할 시, 우리는 법에 따라 구류하고 치죄할 뿐만 아니라 그 범죄 증거를 충분히 수집하여 국내외에 공표하여 그 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 범죄 행위와 합법적인 종교활동은 구분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9)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집권을 선포했지만, 집권 정당으로서 국정정책과 운영 시스템은 1953년에 ‘항미원조운동’에 참전했던 6·25(한국)전쟁이 휴전되기까지는 완전히 구비하지 못했다. 1949년 9월 새 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제정한 임시헌법에 상당한 ‘공동강령’ 제1장 제5조에 종교신앙의 자유를 규정하는 정도로 그쳤다.10) 그 후 5년이 지난 1954년 9월에 제정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3장 제88조에 드디어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문화하였다.

필자가 이 첫 단계에 발표된 문헌적인 사료를 비교적 번거롭게 언급하는 이유는, 그나마 이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은 공식문서나 주요 지도자를 통해 분명한 태도를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태도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 첫 단계에서 집권당이 아니고 재야에 있는 중국공산당의 입장은 오히려 명확하지 않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포괄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집권 초기에도 이러한 입장을 내비치는데, 예를 들면 1950년 5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기독교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종교사상은 유심론이다. 유심론과 유물론이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감출 필요가 없다. 우리는 반종교운동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키는 약속은 교회당에 들어가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종교계의 친구들도 마땅히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지 않는 것이다.”11)

저우언라이 총리의 이 발언은 중국공산당의 집권 철학이 담겨 있는 속내가 발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입장이 이어지는 72년간의 집권 과정에서 일관된 중국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이고 기독교에 대한 정책의 기조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종교자유를 허용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중국공산당 집권에는 현실적으로 위협을 조장하지 못하게 통제하며 더 나아가서는 집권에 협력하게 하는 통일전선에 귀속시키는 것”이다.12)

2. ‘거친 탄압’

두 번째 단계는 1950년 ‘항미원조운동(‘6·25전쟁’ 참전–필자 주)’ 시작부터 1978년 문화대혁명의 종결까지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기간을 중국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거친 탄압’정책의 추진 단계라고 규정한다. 이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은 명확한 기독교정책을 직접적으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한국전쟁에서 적대국이 된 미국에 대한 반발과 중국에 끼치는 영향력을 우려하여 당시 국내 유일한 미국과 연관성을 가진, 즉 교회와 선교사역을 통해 형성되어 있는 기독교를 ‘간접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극좌 혼란의 시기인 문화대혁명 기간까지 이어져 중국 기독교는 유례없는 탄압을 받았다. 

필자가 ‘간접적이고 거친 탄압’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중국공산당은 일부 친정부 기독교 인사들을 조종하여 ‘삼자애국운동’이라는 새로운 교단을 규합하게 하여 기독교 내부적인 분열과 내부 충돌을 일으키고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간접적인 탄압이라고 하는 근거이다. 둘째로, 눈앞에서 유혈을 수반한 파괴와 핍박이 일어나는 현실에서도 중국공산당이 직접 정책을 발표하거나 공식 법규를 제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자행된 핍박의 역사가 곧 거친 탄압이라고 하는 근거이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특별히 인용할 정책적 가치가 있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문헌 자료가 별로 없다. 단지 특별히 언급할 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64년 4월 21일 일간지 〈문회보〉의 사설이다. ‘종교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처리하자’라는 제목의 이 사설은 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종교는 정신적으로 노동인민을 독소로 해를 끼친다, 계급사회에서 종교는 줄곧 착취계급이 피착취계급을 마취시키고 기편(欺騙)하는 도구이다.” “통치계급은 항상 종교를 애써 지지하고 발전시켜 노동인민의 투지를 마취시키고 자신들의 반동통치를 유지하는 데 종교를 이용한다.” “종교는 인민을 마취시키는 아편이다. 종교는 사람들이 객관세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인민의 생산투쟁, 계급투쟁과 과학실험을 방해하며, 결국 사회의 발전을 저애한다.”13) 이 글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동안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고 폄훼하는 강도가 가장 높은, 중국공산당 문헌에 기록되는 유일한 문장일 것이다. 이 사설만으로도 문화대혁명 기간에 자행된 기독교 등 종교에 대한 ‘거친 탄압’을 느낄 수 있다.

3. 이념에서 정책으로 전환

세 번째 단계는 개혁개방을 선언한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차 대회로부터 2013년 2월에 개최된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기간은 앞 단계에서 저지른 기독교에 대한 탄압에 대해 실책을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극좌 경향의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평가하면서 포괄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선은 중국공산당의 정식 문건으로 정책적 규명을 하지 않고 상투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 점을 시인한다. 1980년 6월 14일 인민일보는 국무원 종교국장 샤오셴파(蕭賢法)의 기고 글 ‘당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을 정확히 이해하고 관철하자’를 게재한다. 이 글은 “린뱌오(林彪), ‘四人幇(사인방)’의 역행과 악행으로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오해받게 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의 진실성을 의심받게 되었는데, 지금 반드시 철저히 해명하고 밝혀야 한다”고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책임은 중국공산당의 책임이 아니라 문화대혁명을 통해 만행을 저지른 린뱌오, 사인방 등 개인적인 죄책이라고 방어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를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종교신앙자유 정책을 실행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종교신앙자유 정책과 국가의 종교활동 관리의 관계”를 설명할 때 “우리는 종교활동에 대하여 관리를 진행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14)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역사적인 단계에 들어와서, 상기의 기조를 확정적으로 공식화한 것은 바로 1982년 3월 3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발표한 ‘중국 사회주의 시기 종교문제에 관한 기본 관점과 기본정책’이라고 하는 문건에서이다.15) 일반적으로 이 문건을 ‘중공중앙 19호 문건(이하 19호 문건)’이라고 부른다. ‘19호 문건’은 중국공산당 창당 이래 종교 문제에 관한 입장을 체계적으로 밝힌 첫 번째 공식 문서라고 볼 수 있다. 이 문건은 사회주의 단계에서 종교 존재의 장기화 문제, 종교자유(불신앙의 자유도 포함)의 보호, 정치적 경제적 이익의 일치라는 기반에서 종교와 단결, 공산당원의 무신론 입장 강화, 종교적 대립이 발생하더라도 인민 내부 모순으로 규정, 법과 규정으로 정부가 종교사무를 관리, 독립 자주의 원칙으로 해외 세력의 종교 침투를 배척, 종교계 인사들에 대한 포섭과 단결과 교육, 애국 종교단체들의 역할을 충분히 활용, 새로운 애국 종교 사역자들을 계획적으로 양성, 국가가 정상적인 종교활동은 보호하고 종교를 이용한 위법활동을 제재, 공산당의 ‘지도와 이끎(領導)’을 강화하는 것이 종교 문제 해결의 근본 보장 등 12가지 주제를 다루었다.
 
19호 문건의 입장은 곧바로 1982년 12월 4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 심의 통과한 개정판 〈헌법〉(1982년)에 반영된다. 1982년 개정판 헌법에는 기존 1954년 헌법에 명시한 종교신앙자유 조항 외에 세 가지 세부 내용을 새롭게 추가하였다. 제36조 제2항에 “어떠한 국가기관, 사회단체와 개인도 공민의 종교를 신앙하도록 혹은 신앙하지 않도록 강제해서는 안 되며, 종교를 신앙하는 공민과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 공민을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된다.”, 제36조 제3항에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한다. 어떠한 사람도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공민의 육체 건강을 해치며 국가교육제도를 방해하는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제36조 제4항에 “종교단체와 종교사무는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었다.16)

주목해볼 바는 덩샤오핑(鄧小平)이 그 시대의 실질적인 일인자로서 종교에 관해 공식적으로 언급을 한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은 그나마 종교정책에 관련한 공식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장쩌민이 1993년 11월 7일 전국통전공작회의에서 한 발언인데,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 집행에서는 의미가 있을까 회의적이기도 하다. 그 발언의 골자는 한마디로 다음과 같다. “적극적으로 종교를 인도하여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시켜야 한다.” 그는 이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한다. “공산당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을 관철하는 것도 좋고, 법에 따라 종교사무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는 것도 좋고, 그 목적은 종교를 인도하여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적응’이라고 함은, 종교계와 종교를 믿는 군중들에게 종교신앙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옹호하며, 공산당의 영도를 옹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회주의 사회와 적응하지 못하는 종교제도와 종교 교리를 개혁하고, 종교 교리, 종교 법규와 종교 도덕사상 중 일부 적극적인 요소들을 이용하여 사회를 위해 봉사하게 해야 한다.”17) 

장쩌민의 뒤를 잇는 후진타오(胡錦濤) 역시 10년이라는 집권 기간 동안 종교정책에 관련한 공식 발언들이 적었다. 2006년 7월 10일 후진타오도 장쩌민과 마찬가지로 전국통전공작회의에 참석하여 중요한 담화를 발표했다고 하지만, 그 골자는 역시 “종교를 가진 군중과 종교를 믿지 않는 군중 그리고 신앙이 다른 종교 군중 간의 관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처리해야 하며, 종교를 적극 인도하여 사회주의 사회와 적응하게 해야 한다”이다.18) 이미 2004년 11월 30일에 국무총리 원자바오(溫家寶)의 서명으로 ‘종교사무조례’를 발표하였다.19) 이러한 배경에서 한 후진타오의 이 발언은 기독교 내지는 종교에 대한 분명한 정책으로 독해하기 난이하다. 심지어 지방 종교 관련 공무원들도 각자의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행정적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로 보인다. 후일의 일이지만, 결국 2004년에 공표한 이 종교사무조례는 2017년 8월 26일에 다시 수정되어 발표되었고,20) 2018년 2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된 빈약한 문서로 평가된다.

4. ‘부드러운 탄압’ 

네 번째 단계는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출범한 2013년 2월부터 현재까지로 볼 수 있다. 제2단계는 기독교에 대한 거친 탄압의 단계이고, 제3단계는 애매모호한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고 대처할 정책을 모색하는 단계라고 본다면, 시진핑 이후의 이 시기는 ‘부드러운 탄압’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부드러움’과 ‘탄압’은 속성이 정반대인 단어임에도 필자가 ‘부드러운 탄압’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상의 어떠한 국가 정부나 사회도 ‘법치’를 정상적인 통념으로 삼고 있다. 제2단계는 법치를 제쳐놓고, 심지어 법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소멸시키려 했던 ‘거친 탄압’임이 분명하다. 이와 달리 이 시기는 종교, 특히 기독교를 주요 타깃으로 삼아 다양한 법과 규정을 제정하여 소위 법치라는 양태로 탄압에 가까운 정책을 자행한다. 그래서 필자는 일단 부드러운 탄압이라고 규정한다.

후진타오를 이어 중국공산당 일인자가 된 시진핑은 2016년 4월 22-23일 처음으로 ‘전국종교공작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하였는데, 관방언론인 신화사(新華社)는 ‘시진핑: 새로운 형세에서 종교공작 수준을 전면적으로 제고하라’는 뉴스 타이틀을 정하였다.21) 이 제목만으로도 시진핑 시대 종교정책의 기조를 읽어낼 수 있다. 소위 ‘수준’을 제고하라는 뜻이 바로 법치정책이라고 판단된다. 그리하여 시진핑 시대에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동안 가장 수량이 많고 세분화한 종교 관련 법과 규정이 산출되는 기간이 되었고, 이러한 법과 규정에 따라 기독교도 그 어느 때보다 제약을 받고 결과적으로는 부드러운 탄압을 받는 시련에 직면하였다.

부드러운 탄압정책으로 제정된 주요 법과 규정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종교활동장소 재무감독 관리방법(시행)〉(2010.1.11.),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 실시세칙〉(2010.11.29.), 〈국가 종교사무국 공작규칙〉(2013.10.29.), 〈종교계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활동을 전개 시에 관한 의견〉(2016.4.18.), 〈종교사무조례〉(2017.6.14.), 〈종교 임시활동장소 심사비준 관리방법〉(2018.6.1.), 〈인터넷 종교정보 서비스 관리방법(토론안)〉(2018.10.9.), 〈종교단체 관리방법〉(2019.11.20.), 〈중화인민공화국 경내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 실시세칙(토론안)〉(2020.11.18.), 〈종교 교직원 관리방법〉(2021.2.9.) 등이다. 예상컨대 앞으로도 종교 관련 법규가 지속적으로 제정되고 실행될 것이다.

나가는 말

무거운 주제인 중국공산당의 100년간 기독교 이해와 정책의 변화 과정을 평이한 글로 정리하려고 하니 어떤 학술논문을 작성하기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파악이 실천적 삶이 우선되어야 하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이 작업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싶었다. 

네 개 단계로 정리되는 중국공산당의 기독교 이해와 정책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즉, 현실 파악 -> 억제 내지는 탄압 -> 현실 재파악 -> 재억압 내지는 탄압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창당 100주년이 되고 집권 72주년이 되는 중국공산당은 사실 이념집단으로 보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이익집단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그리하여 중국 내 혹은 국제 정세에 따라 배척과 포용을 판단하는 실리적인 통치정책을 취하면서 집권 초기에 허망한 이념을 전제로 저질렀던 거친 탄압에 대해 반성하고, 이제는 소위 명분이 있는 법치를 내세워 부드러운 탄압을 실행하는 추세이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중국공산당의 100년 기간 중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이것 역시 중국공산당의 기독교 이해와 정책의 변화에 반사적인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우선 첫 단계에서는 중국공산당은 존립 자체가 풍전등화인 상황이었기에 기독교 세력과도 단결하려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중국교회와 직접적인 영향은 무시할 정도로 미미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거친 탄압을 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와 직접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선교를 유대로 미국과 가장 큰 연계가 있는 중국 기독교를 소멸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세 번째 단계는, 개혁개방을 국책으로 삼은 중국공산당이 더 이상 미국과 단절된 고립 상황을 타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두 번째 단계의 거친 탄압 속에서 중국교회가 ‘지하교회’로서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국 선교 세력과 단절된 상황에서 더 단단한 신앙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미처 예상치 못한 요소도 있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식 ‘공산주의 이념’에서 덩샤오핑식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22)로 전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집권 유지에 이해득실을 판단할 탐색 기간도 필요했다고 보인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 즉 부드러운 탄압은 현재 진행형이다. 중국 종교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특히 중국 기독교회의 부흥에 대해 인지한 중국공산당은 미국과 ‘G2’ 대립 구도에서 또다시 경계하고 억제와 통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지 이제 소위 법치라고 하는 명분으로 세부적이고 광범위한 종교 관련 법과 규칙을 제정하여 목적성 있게 실행을 추진하면 중국 기독교와 중국선교는 노골적인 거친 탄압보다 더욱 험난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글을 마치면서 전임 중국종교관리사무국 국장 예샤오원(葉小文)이 1997년에 발표한 글이 생각난다. 예샤오원은 ‘현재 중국의 종교 문제’라는 글에서 ‘종교의 다섯 가지 속성론’, 즉 종교의 장기성(長期性), 군중성(群衆性), 민족성(民族性), 국제성(國際性)과 복잡성(複雜性)을 재차 제기하면서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종교 상황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관찰에서 나온 인식이고, 마르크스주의 종교관을 사용하여 중국의 종교 문제에 대해 도출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인식이다”라고 강조하였다.23) 입장을 달리하여 중국 기독교와 중국선교의 시각으로 볼 때 이 ‘다섯 가지 속성’을 다른 의미의 동일한 표현으로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공산당의 집권이 계속되는 한, 중국 기독교와 중국선교가 나아가야 할 길도 장기간의 분투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대상은 모든 민족과 계층의 민중이 되어야 할 것이며, 중국을 포함한 국제적인 시국의 복잡한 변화 속에서 지혜와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미주    
1) 〈中國社會主義靑年團一大決議案〉, 中共中央文件選集(1), 中共中央黨校出版社, 1989. p.206.
2) 〈中國共産黨黨綱草案〉, 中國共産黨歷代代表大會數據庫, http://cpc.people.com.cn/GB/64162/64168/64555/4428212.html
3) 〈中共三屆一中執委會決議〉, 中國共産黨第一次代表大會前後資料選編(1), 人民出版社, 1985. p.44.
4) 〈爲創立全國各黨各派的抗日人民戰線宣言〉, 中共中央文件選集(13), 中共中央黨校出版社, 1986. p.18.
5) 〈紀念周恩來同志誕辰八十一週年〉, 《文匯報》, 1979.3.5.
6) 《毛澤東文集》(第2卷), 人民出版社, 1991. p.394.
7) 〈中共六中全會報告〉, 《中共中央文件選集》, 中共中央黨校出版社, 1986. p. 617.
8) 陶飛亞, 《基督敎與近代中國》, 上海古籍出版社, 2005. p.118.
9) 〈關於對待在華外國人的政策的指示〉, 中共中央文件選集(17), 中共中央黨校出版社, 1991. p.38.
10)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 《建黨以來重要文獻選編》(第26卷), 中央文獻出版社, 2011.
11) 《周恩來統一戰線文選》,人民出版社,1984. p.185.
12) 일부 학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을 “사회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종교말살정책”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전개할 수 있는 논리에 불과하고, 실제 중국공산당 집권 과정을 고찰하면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실용성만 추구하는 중국공산당을 이념집단으로 과대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에 대하여서는 필자가 다른 글을 통하여 연구결과를 밝히도록 하겠다.
13) 蕭賢法, 〈正確認識和處理宗敎問題〉, 《文匯報》,1964. 4. 21.
14) 〈正確理解和貫徹黨的宗敎信仰自由政策〉, 《人民日報》, 1980. 6. 14.
15) 〈关于我国社会主义时期宗教问题的基本观点和基本政策〉.
16) 〈中華人民共和國憲法〉, 1982. 12. 4. 
17) 江澤民, 〈在全國統戰工作會議上的講話〉(1993. 11. 7.), 《歷次全國統戰工作會議槪況和文獻(1988-1998)》, 華文出版社, 1998. pp. 163.
18) 胡锦涛, 《关于政治领域和社会领域五个方面的重大关系--在全国统战工作会议上发表重要讲话》(2006年7月10日), 胡锦涛文选-第二卷, 인민출판사, 2016.
19) 〈中華人民共和國國務院令第426號(宗敎事務條例)〉 (2004. 11. 30.).
20) 〈宗敎事務條例〉 2017.8.26.
21) 〈习近平:全面提高新形势下宗教工作水平〉, 新華網, 2016.4.26.
22)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수정 자본주의”로 평가하는 평가가 있음을 부언한다. 
23) 葉小文, 〈當前我國的宗敎問題〉, 《世界宗敎文化》 1997년 제1호, pp.2-10.








문영걸 | 美道중국선교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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