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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 통권 231호     필자 : 김종건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명말 중국 천주교회 인물 (6) 풍응경
생애
풍응경(馮應京, 1555-1606)의 자는 가대(可大), 호는 모강(慕岡)이며, 당시 남직예(南直隸)에 속한 봉양부(鳳陽府) 우이현(盱眙縣) 출신이다. 부친은 광동(廣東) 순덕현(順德縣) 훈도(訓導)였으나 풍응경이 여덟 살 때 임지에서 사망하면서 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풍응경은 비록 집이 가난하였으나 모친에게 효도하고 학업에도 힘을 다하였다. 만력 20년(1592) 마침내 그는 38세의 늦은 나이에 임진과(壬辰科)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부(吏部)에 재직하던 중 보바이(哱拜)의 난이 일어나자 진압책을 건의하였고, 호부(戶部) 주사(主事)로 재직할 때는 부국강병을 모색하면서 《호부직장(戶部職掌)》, 《경무고(經武考)》 등을 찬술하였다. 병부(兵部) 주사로 있던 중 왜란이 일어나자 사재를 동원하여 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1600년 이후 호광첨사(湖廣僉事)로 재직 중에는 세감(稅監) 진봉(陳奉)의 만행에 대하여 10대 죄목을 지적하며 상소를 올려 의법 처리하는 의기를 보였다.

풍응경이 처음 관직에 나아가게 된 시기를 전후해서 죽을 때까지 그의 사상의 중심은 오로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었다. 대표적 경세치용을 지향한 저술로는 《사민월령(士民月令)》을 새롭게 해석하고 증보한 《월령광의(月令廣義)》, 사시(四時)에 따라 펼쳐지는 뜻과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을 정리한 《경세실용편(經世實用編)》 등이 있다. 서광계는 《농정전서(農政全書)》를 편찬할 때, 특히 풍응경의 《경세실용편》 가운데 있는 〈국조중농고(國朝重農考)〉편을 선택하여 권수(卷首)를 엮으면서, 황제와 관리들이 농업생산과 농민을 중시하도록 강조하였다. 

풍응경과 서학
풍응경은 실용 학문에 뜻을 두고 동림사우(東林師友)들의 도덕과 절조를 계승하면서도 서학(西學)에서 정신적 의지와 심리적 공감을 찾으려 하였다. 그는 명말 경세학과 서학의 상호 교류라는 새로운 전형을 보여주었다.

만력 29년(1601), 그는 진봉과 치열하게 투쟁하는 가운데 사상적 변화를 보였다. 그해 정월 초하루와 초파일에 <《천주실의(天主實義)》서(序)>와 <각(刻)《교우론(交友論)》서(序)>를 잇달아 써내면서 서학과 유학의 절충을 통하여 시폐(時弊)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마테오 리치는 남창(南昌)에 머물다가 그 뒤 남경(南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풍응경은 이때 중국 수학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제자 유연천(劉燕泉, Leuiuenciun)에게 남창이나 남경으로 가서 마테오 리치를 찾아뵙고 스승으로 섬기라고 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는 이미 북경(北京)으로 떠난 뒤였다. 이후 풍응경은 마테오 리치가 편찬한 《교우론》과 《천주실의》(초본) 그리고 오중명(吳中明)이 남경에서 출판한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 등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자세히 읽고 연구했다. 마테오 리치의 〈산해여지전도〉와 그에 대한 오중명의 해설은 모두 《월령광의》 수권(首卷)의 〈도설(圖說)〉에 수록되어 있다. 

풍응경은 《교우론》, 《천주실의》에 나타나 있는 인륜을 초월한 서방인들의 우정과 “무릇 선한 자는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에 깊이 접근하게 되었다.

풍응경이 쓴 <각《교우론》서>에서는 그의 서학에 대한 주목할 만한 변화상을 보여준다. (1) 마테오 리치의 교우의 도리에 대한 충심에서 우러나온 탄복과 스스로 부끄러워 마지않는 자세. (2) 서방의 교우의 도리에 대한 영향을 받아 원래 오륜의 마지막에 위치하던 붕우관계를 오륜의 으뜸 자리로 올리고, 다른 네 가지 덕목을 모두 붕우관계를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한 점. (3) 《교우론》의 정수(精髓)를 꼼꼼히 살펴본 뒤 서학과 유학이 심리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 등이다. 

<《천주실의》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목할 점이 있다. (1) 서학이 육경을 인용하여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있는 바, 실학을 논하는 유학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 점. (2) 《천주실의》에 유가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내용이 열에 아홉이라고 한 점. (3) 마테오 리치는 천상(天象)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그가 주장하는 신학 이론을 이해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시도할 만하므로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한 점 등이다.

그의 두 편의 서언(序言)은 서학이 붕우를 중시하고, 성명(性命)과 천상 등 다양한 분야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유가들이 듣지 못한 것 혹은 실천해보지 않았던 학설과 문인·학자들이 마음으로부터 깨닫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실천해야 하는 것이 적지 않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는 마테오 리치가 강조하는 교우의 도리와 천상의 원리를 통해 전통 유가 윤리의 규범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가 깊이 인식하게 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옥중에서 선교사들과 교류
풍응경은 진봉과 투쟁 중에 오히려 진봉의 무고 상소로 강등 좌천되었다가 이후에 체포되어 무창(武昌)에서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도 풍응경은 잊지 않고 선교사들과 교류를 계속 유지했다. 그는 앞서 마테오 리치를 만나보도록 남경으로 보내기도 했던 제자 유연천에게 다시 마테오 리치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삼고 자신의 형편을 알게 했다. 마테오 리치는 풍응경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그를 찾아가 만나면서 우의를 확인하였고, 풍응경이 옥중에 있던 3년 동안 시종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의를 지속해 나갔다.

풍응경은 만력 30년(1602) 여름과 가을 사이에 마테오 리치의 부탁을 받아 교의문답 초고(첨삭한 《천주실의》)를 받아 읽고 의견을 보태었다. 만력 32년(1604)에는 풍응경이 〈중각이십오언서(重刻二十五言序)〉도 집필하면서 이 책의 내용이 실로 하늘의 가르침에 근본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주실의》와 《이십오언》의 출판 보급은 풍응경의 동의에 따른 것이었으며 출판 비용 역시 그가 담당하였다. 이외에 그는 마테오 리치의 《세계여지이소도(世界輿地二小圖)》, 《사원행론(四元行論)》과 기타 수학 소개 서적을 판각 인쇄하였다. 

만력 31년(1603)에는 〈여지도서(輿地圖敍)〉도 남겼다. 이 글은 이응시(李應試)의 요청으로 마테오 리치가 증보하여 완성한 더 크고 더 새로운 세계지도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의 도면 위에 풍응경은 ‘후학’의 입장에서 쓴 서문이다. 여기서 그는 대명일통(大明一統)의 천하 세계관 대신 세계가 대동(大同)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는 간절함을 드러내었다. 

풍응경은 3년의 옥살이 중 두 가지 문화와 두 가지 신앙이 그 자신에게 충돌 없이 공존하며, 조화롭게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옥중에서 《역경(易經)》과 주자학을 강의하는 한편 《교리문답》 등 여러 책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교의를 깊이 학습하여 감옥 밖의 자신의 가족들까지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는 매일 마테오 리치가 보내준 성자 그림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예배하고, 경건한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경세실용편》을 편찬하여 불교와 도교 등 허무한 것을 탐하고 현실을 무시하는 폐단을 실용으로 되돌리려 애썼다. 또한 〈중각이십오언서〉와 〈여지도서〉를 잇달아 찬술하여 서방 종교와 지리, 과학에 관한 저서 출판을 통해 서학을 통해 앞길을 열고자 하였다. 

풍응경이 비록 이들 출판물의 서문에서 열정적으로 기독교를 찬양하고, 평소에 마음 깊이 기독교 교의를 연구하며 매일 성자상 그림을 향해 예배를 드렸을지라도 그의 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영세를 받을 수는 없었다.

석방된 후
풍응경은 만력 32년(1604) 9월에 석방되었다. 그의 출옥을 기다리던 마테오 리치는 기회를 보아 서둘러 그에게 영세를 베풀고 기독교에 귀의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만력 34년(1606) 정월 풍응경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풍응경은 영세를 받지 못하였다. 

풍응경이 입교하는 데 있어서의 장애 요소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장애 요소는 첩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출옥 이후 풍응경은 선교사들의 바람과는 달리 부득이 봉건 종법 사회 속에 안주하였기에 새로운 종교로 귀의하는 결단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응경은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활동 가운데 특히 주요 출판물의 간행과 배포에 실질적인 후원자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명말 중국 천주교회의 기반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사진설명 | 풍응경 초상
사진출처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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