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인가? 최찬영 목사님이 지난달 26일, 미국에서 9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찬영 목사님은 1956년에 우리나라 1호 선교사로 태국에 파송을 받은 분입니다. 최찬영 목사님은 ‘최초’라는 기록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최 목사님은 2011년 4월 3일부터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한 달 가까이 연재하셨는데 “내 이력에는 유난히 최초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다. ‘해방 후 첫 한국인 선교사’ ‘아시아인 최초의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 ‘1978년부터 92년 은퇴할 때까지 아시아인 최초의 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총무’ 등 이 모두가 능력에 비해 분에 넘치는 광영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난 부족한 사람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일생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라면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라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최 목사님은 30여 년간 성서공회연합회에 소속된 선교사로 사역하시면서 성서 반포를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가 총무로 있는 기간에 성서공회연합회는 약 15억 권의 성경을 배포했습니다.
최찬영 목사님은 무엇보다도 중국의 성도들이 성경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길을 여신 분입니다. 말하자면 중국복음화 사역에서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한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달 ‘발행인 통신’에서는 그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애덕기금회 인쇄공장을 건립하다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 이 분야에서 일하던 분들이 가장 애쓰던 것이 중국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대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세아방송(FEBC)에서는 중국어방송 시간대에 중국의 성도들이 성경을 받아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속 편성해서 송출했습니다.
오픈도어선교회는 1981년 6월 18일 밤에 중국 남부 해안에 성경 100만 부를 밀반입시켰습니다. ‘진주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고 화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홍콩을 방문하고 있었던 저는 그것을 생생하게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중공으로 보낸 하나님의 밀수꾼》(생명의말씀사, 1983년)을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졌습니다.
최찬영 목사님은 중국에 성경을 효과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1984년 1월부터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서 중국기독교교회협의회 딩광쉰(丁光訓) 회장 등 교회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냉대를 받았지만 실망하지 않고 계속 접촉한 끝에 기독교협의회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하는 한원자오(韓文藻) 부회장에게서 성경 10만 권을 찍기 위한 종이 100톤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성서공회 지도자들의 협력을 얻어 10만 불의 예산을 마련하여 그들이 요청한 종이 100톤을 그들이 원하는 날짜에 공급해 주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내친김에 큰 인쇄공장을 세워 성경과 교회의 인쇄물들을 찍으면 어떻겠냐고 제의했습니다.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최 목사님은 줄기차게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종이 공급 약속을 지킨 일로 신뢰관계가 형성되자 인쇄공장 건립 문제도 진전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건립된 것이 바로 애덕인쇄소입니다.
애덕인쇄소 건립에 대해 협의할 때 성서공회는 어떤 소유권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면서 대신 인쇄소의 우선순위가 성경을 찍는 데 있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소유권을 포기하면 손해만 보는 것 아닌가?” “성경을 찍지 않고 공산당 선전물을 찍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산당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최 목사님은 흔들리지 않고 이 일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애덕인쇄공장은 1986년 11월 8일 기공식을 가졌고, 8개월 만인 87년 7월 7일에 완공되었는데 건축비로 50만 불, 인쇄기 설치에 500만 불이 들어갔습니다. 인쇄기는 성능이 아주 뛰어난 영국제품이었습니다. 그해 12월 5일부터 이 공장을 통해 성경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93년 한 해에만 160만 권의 성경이 인쇄됐습니다.
중국어 성경뿐 아니라 소수부족 언어 성경도 인쇄했는데 그 가운데는 재중동포(조선족)를 위한 한글 관주성경 9만 권과 찬송가 9만 2천 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는 관주성경전서의 필름을 보내 이 일을 도왔습니다. 성경 발간 시작 이후 10년이 되는 2008년까지 6000만 권의 성경이 애덕인쇄공장에서 인쇄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일을 통해 <중주> 가족들께서는 최찬영 목사님이 중국복음화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인가 하는 것을 잘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중국은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곳이지요” 저는 최찬영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대한 일이 몇 번 있습니다. 1980년대에 중국 사역과 관련된 일들로 홍콩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그때 성서공회 사무실을 찾은 일이 몇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중국 동북지역에 전화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애써도 연결이 되지 않기에 최 목사님의 사무실을 방문한 길에 목사님께 하소연을 했더니 중국인 여비서를 불러 “당신네 언어로 신청하면 잘되지 않을까?” 하며 도와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80년대 초의 중국 전화 사정이 매우 열악해서 비서가 애를 썼어도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친절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인가는 상하이(上海)식 요리로 저녁을 대접하면서 중국선교를 위해 애쓴다고 격려를 해 주신 일이 있는데 그때 중국 단둥(丹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야기를 하시며 중국은 유난히 애정이 가는 곳이라고 하신 말씀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최 목사님은 1926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는데 두 살 때 단둥으로 이주해서 방계성 목사님의 신앙지도를 받았습니다.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공산당 치하에서 살 수 없어서 월남을 했습니다.
2013년 6월 27일에 ‘2013 선교중국대회(2013 Mission China)’가 2박 3일의 일정으로 전주대학교에서 열렸는데 당시 국내에 계시던 최 목사님이 강사로 오셨습니다. 저도 한 강의를 맡아 내려갔다가 오래간만에 최 목사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2013 선교중국대회’에는 3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는데 참석자의 70% 정도가 국내 거주 중국 성도들, 특히 유학생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태도가 한없이 진지했는데 최 목사님도 이것을 보시고는 중국 사역의 변화를 실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최 목사님은 사모님의 병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가셨고, 이렇게 부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삶의 거의 대부분을 타향과 외국에서 보내셨는데, 이제 영원한 고향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으며, “목사님, 하나님께서 ‘참 수고 많이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고 계시지요?” 했습니다.
11월호의 특집 제목은 ‘2021년 중국 상황과 기독교를 돌아보다’입니다. ‘2021년 중국 상황과 선교중국의 길’ 그리고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동안 기독교 정책의 변화에 대한 단상’ 두 편의 글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중주> 가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으며 필자들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감사의 달 11월입니다. 두 배의 감사를 〈중주〉가족들에게 드리며 회복되는 일상생활 가운데 즐거움과 활기가 넘치기 바랍니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바이두, 국민일보(위에서부터)
유관지 | 중국어문선교회 고문 겸 웹진 〈중국을주께로〉 발행인, 용산감리교회 원로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