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여 년 전 구한말, 암흠 속에 잠긴 우리 민족에게 전파된 기독교 복음은 구습에서 탈피하여 변혁을 꾀하며, 학교와 교회, 병원 등을 통해 백성을 섬기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했다.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과 구별된 ‘대조적인 공동체(a contrast community)’가 되어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 주는 등대가 되었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사들의 노고1)와 선각자들의 올바른 반응으로 민족과 역사와 사회 전반에 소망의 빛을 던져 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지 25년 만에 민족과 사회에 빛을 밝혀 주는 등대와 같은, 세상에 빛과 소금과 같은 교회가 되었다. 그 결과 일제 36년의 압박과 핍박, 환난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일반 민중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는 해방을 맞았지만, 6.25전쟁을 거치고 박정희 정권의 시작과 더불어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함께 자본주의에 합류된 교회는 ‘대조적인 집단’이 아니라 타협하는 공동체로 변해갔다. 다시 말해 구별된 에클레시아가 아닌 세상 정치에 적당히 편승하여 성장을 이루며 성공신학에 조금씩 세속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교회의 주류 교단인 장로교회 안의 경쟁과 분열 등으로 개교회, 개교단 중심의 전도와 선교활동 등이 실적 위주, 성과 중심, 외적 부흥을 위주로 하는 영적 비만증 현상이 나타났다. 7, 80년대 일어난 폭발적인 성장과 수적 부흥은 1990년부터 성장이 둔화되면서 교회는 세상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P 목사 달러 밀반출 시도 사건과 영화 《밀양》이 보여 주듯이 기독교인이 개인주의 내세 신앙과 행함이 없는 이신칭의 교리의 강조로, 일반인들의 시각으로는 교회는 바다에 뜬 섬과 같은 공동체로 인식되기 시작하했다. 또 김영삼 장로의 대통령 시대인 1993∼1998년을 지나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대부터는 엄청난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대가 냉담과 조소, 비난의 대상이 심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교회의 성장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코로나19가 찾아와 교회는 매스컴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국민 윤리와 국민 건강을 위한 모범 집단이 되기는커녕 사이비 집단과 함께 도매금으로 여겨질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2)
한국 역사 속에서 일어난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백성들의 빛과 소금이 된 교회 (1885∼1945년)
2) 성공주의 신학으로 개인구원 중심의 교회 (1945∼1980년)
3) 비판과 비난, 조소의 대상이 된 교회 (1980∼2000년)
4) 증오와 심판의 대상이 된 교회 (2000∼2020년)
5) 선교적 교회를 회복해야 하는 도전 앞에 선 교회 (2021년 이후∼)
서구의 후기 기독교 현상을 닮아가는 한국교회
인도선교사 레슬리 뉴비긴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약 30여 년 전에 떠났던 영국의 기독교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현실에 직면했다. 뉴비긴은 이제 기독교 선교의 최대 도전은 과거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바로 그 나라들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뉴비긴은 한 아시아 지도자에게서 기억에 남는 질문을 받았다. “서구 사회가 개종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결국 교회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대변했다. 서구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바로 그 자체의 ‘재개종(re-conversion)’이었던 것이다. 젊은 세대 선교학자들이 뉴비긴을 찾아가거나 그를 초대하여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 유럽의 문제의식은 북미에 자리잡게 되었다. 뉴비긴은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서구 사회에 대한 선교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며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2000년대가 끝날 무렵 뉴비긴의 저술과 대화들은 기독교 선교의 성격 등 이와 유사한 질문을 끌어안고 고민하던 미국 선교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으며, 마침내 ‘The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GOCN)’가 형성되었다.
한편 레슬리 뉴비긴3)은 귀국한 뒤 찬란했던 영국 사회에서 퇴색한 기독교의 위상과 문화를 발견하고 ‘선교적 교회’4)운동을 부르짖었다. 그는 그의 이름(Lesslie Newbigin)이 갖는 의미처럼 ‘새롭게 시작하자(new begin)’고 외쳤다. 또 그는 삼방향 대화 (three-way conversation, 삼중적 대화), 즉 복음과 교회와 그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문화 사이에 이루어지는 삼방향 대화에 대해 말했다. 선교적 만남(조우)은 하나님 백성,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그대로의 복음, 주변 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을 요구한다. 만일 복음이 세상에 계시되려면 모든 장소, 모든 시점에서 이 삼방향의 삼중적 대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이 삼각 구도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세 가지 특성들이 상호 간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서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적인 필요를 더 쉽게 채울 수 있게 해 주는 더 나은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적 교회5)라는 것은 이 삼각구도의 꼭짓점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적인 조우에는 교회 이상의 훨씬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세 꼭짓점 사이의 진정한 조우가 있을 때만 상호 대화는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문화에 대해 혹은 심지어 복음의 본성에 대해 타당한 이해를 하고 가정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6)
‘선교적(missional)’ 논의의 핵심 주제
① 복음의 주제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초점의 이동 ② 기독교 생활을 앗아가 버린 세상과 타협의 깊이에 대한 인식과 회개 ③ 그리고 이 도전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결단과 헌신과 작은 실천이다. 결국 선교적 교회의 의미에 대해서 정리하자면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행하는 데 사용되는 교회’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교완성을 위해서 교회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인 회중 하나하나가 또 한 명의 선교사가 되어 자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으로서 삶을 살아내고 보여 주는 교회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혼자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한 사람의 끈기와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영적 선한 사역의 완성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이루어지는 일이다.
후기 기독교 국가의 모습으로 변질된 한국교회의 상황
한국 역사와 사회를 통해서 볼 때 한국교회는 귀중한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전락하게 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고, 우리를 만족하게 해 주는 기복신앙의 복 방망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개인의 사적인 필요들, 개인적인 요구들을 채워 주기 위해 사용되는, 영적인 음식점에 진열된 음식을 한 가지 선택하면, 그 음식이 포장되어 나오는 것처럼 되었다. 그 결과 천박한 기독교로, 비복음적인 것과 타협한 교회가 되어 복음을 재생산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습으로 세상과 격리된 집단으로 인식되어 가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이다. 그 이유에는 믿음과 신앙의 사상성과 기본기를 놓쳐 버린 지 오래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점점 고조되는 위험을 미리 인지하지 못하면 화를 당하게 됨을 비유하는 ‘삶은 개구리 증후군’처럼 말이다. 개구리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바로 뛰쳐나와야 산다. 그러나 냄비 속 찬물에 있으면 서서히 끓는 걸 모르다 죽는다는 것이다.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생각 없이 살다가 냄비 속 개구리와 같은 오늘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혹자는 생각을 했겠지만 개인적 신앙으로 공적 신앙을 생각하고 책임지는 행위를 하지 못하여 축적된 결과인 것이다. 한 개인이 중생하고 신자가 되어 공적 책임과 사명을 부여받았지만, 그것을 교회가 계속해서 가르치고 확인하고 엮어 주지 못하여 신앙의 개인화, 교회의 개교회화는 결국 각 교단의 교단중심화로 상호 경쟁 구도 속에서 삼분오열한 한국교회 역사 문제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후기 유사 크리스텐덤 (pseudo-Christendom) 한국 사회 도표7)
1945 1960 1966, 76 1980 2007 2017 2020
--I-------------I-------------I-------------------I------------I---------------I------------I---
2차대전 후기 현대주의 대통령조찬기도회 한국교회성장 평양부흥100 촛불, 문정부 코로나19
8.15해방 경제개발 76, 국가조찬기도 386세대민주화 밀양, 이랜드 가나안신자 사사시대
어쨌든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다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가 있을 것이다. ① 외식적 신앙의 겉옷을 벗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예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라. ② 마음에도 없는 인본주의적인 형식적 신앙과 외형적이고 숫자적인 통계의 허상을 벗어던지라. ③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고, 참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심을 알라. ④ 재림의 말발굽 소리를 듣고 코로나19를 계시록적 사건으로 바라보고 재림과 최후 심판을 준비하라.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의 대안
코로나19 이후의 현재 한국교회는 구미의 후기 기독교 현상8)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에,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바를 조금씩 조정하거나 과정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서 ‘와서 보라’는 식의 교회 모습과 전도지를 건네주는 방식 등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성도들만의 모임으로서 교회 됨을 넘어, 지역교회들과 모든 성도들의 기본 입장이 그 자신의 문화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선교사라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① 신학적으로 만인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만인 선교사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② 선교적으로 ‘all to all’ 철학과 자세와 태도의 변화가 요구된다. 즉 모든 신자는 삶의 모든 현장이 선교현장임을 인식하고 다시금 예수의 제자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적당한 타협주의도 안되고, 염세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도피주의도 안 된다. ③ 존 스토트의 《제자도》9)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처럼, 제자도의 마지막은 ‘십자가의 길’을 실천하는 것이다. 선교적 삶이란 순교적 삶과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것이다. 순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든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안 중심의 제자훈련을 많이 했지만 세상의 문화 읽기와 더불어 삶의 현장훈련이 빈약하였다. 세상 속에서 이중언어 즉 세상 사람과 소통하며 그들의 언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준비를 하지 못하였다.
한국 사회 커뮤니케이션 변화도10)
1980 1990 2000 2010 2020
아날로그 음성--음성과 문자--핸드폰 시대------데이터와 영상----스마트폰 시대---->
(음성과 데이터) (네트워킹, 사물인터넷)
교회는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되어야 했지만, 물에 뜬 섬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교회의 종소리는 차임벨로 바뀌었으나 세상은 소음공해라고 비난했고, 십자가 불빛은 수면장애를 유발한다고 질타를 받았다. 급기야는 성탄절 문화마저도 퇴색되어 캐럴 하나 울려 퍼지지 않는 2020년 연말을 통과했다. 오히려 이따금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여러 스캔들, 권력 다툼 등 치부를 드러냈다. 지금이라도 세상 속의 구별된 공동체, 하나님의 독특한 에클레시아는 뼈아픈 자기반성을 통한 원형적 복음 앞에서 결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좁은 문이요 찾는 이가 매우 적은 문이기 때문이다. 이 좁은 길로 들어가는 일은 단지 조금만 조정해서는 안 되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 즉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엄숙한 부르심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새로운 모습의 교회를 요청하는 것 같지만 보편적 역사와 교회 역사 속에서 모범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① 초대교회에 있었던 성도들의 모습은 ‘예수쟁이’, 즉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다. ② 독일의 역사 속에서 ‘바르멘 선언(독일복음주의 교회의 현상에 대한 신학적 선언)’이나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설교와 삶의 모범을 보라. ③ 초창기 한국선교역사에서 애신, 애국, 애민의 모범을 보여준 신앙의 선조들이 있다.
한국교회는 일반인들이 ‘예수는 좋지만 기독교는 싫다’는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삶이 아닌 세상의 논리와 가치관을 가진 일반인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 저변에 흐르는 중요한 세 가지 사상을 종합해 보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예레미야 9장 24절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영어 성경은 “LOVE, JUSTICE, AND RIGHTEOUSNESS”라고 번역하고 있다. 중국어 성경은 “慈愛, 公平, 公義”로 번역하고 있다.11) 히브리어 성경은 “헤세드와 미쉬파트와 체데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②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장 6절) ③ 미가서 6장 8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애(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관심은 사랑과 공의와 정직과 겸손한 삶이다. 신자의 삶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 사랑하고, 세상의 관계 속에서 공평하며, 널리 덕을 베풀며, 공의와 정직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교회마저도 사랑을 말하나 상대적 사랑이요, 공평을 말하나 기득권 중심의 공평이요, 법과 규정에 따른 공의와 정직이 실종돼 가기에 비법과 편법으로 법을 해석하여 불법적인 행위가 많아진 슬픈 현실이다.
한국교회의 마지막 위인 장기려 박사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이후 더 이상의 위인이 나오지 않고 있다. 장기려 박사는 우리 곁에서 복음병원 원장과 (민간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제도를 국가보다 먼저 실시함으로 세상 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는 이북의 아내를 만나도록 국가가 배려하였지만 자기만을 위해 제공되는 특혜를 거부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또 그는 돈이 없는 입원 환자에게 “오늘 밤 내가 병원 뒷문을 열어 놓겠으니 도망쳐라” 하고 말했다. 또 다른 가난한 환자에게는 “이 환자의 병은 먹어야 낫는 병이다. 그러니 닭 두 마리 값의 돈을 처방하라”고 말하면서 그에 해당하는 돈을 주었다고 하니, 그는 약자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한 그들의 친구였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을 잃은 등대가 되지 않았는지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자. 어렵게 전도한 한 사람을 자신 있게 소개할 만한 자랑스러운 복음적 교회가 얼마나 있을까? 교회가 대조적 공동체로 빛이 되기는커녕, 얼마나 어둠의 장본인이었는지 회개하자!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기대치가 다른 종교보다 높아서 그런 측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사랑을 외치면서도 수직화한 조직에 대해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고 반성하자! 교회가 얼마나 자본주의 중심으로, 가진 자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은지 회개하자!
선교적 교회12)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헬라어 pempo, 라틴어 missio)’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가 없어졌을 때 교인들이 슬퍼하는 교회라기보다는 지역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거나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개입을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큰 교회는 편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교인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은 소비자 성향이 강해지고 이기적인 교인과 교회가 될 수 있다. 교인의 출석이 늘어난다고 교회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모이는 숫자가 아니라 교인 각자가 파송받은 곳에서 얼마나 ‘선교적 삶(missional life)’을 사는가 하는 것이 교세 측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외형적 선교 속에 선교적 삶이 없을 수도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것다.13) 선교적 교회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교를 많이 하자는 선교가 아니라, 삶의 현장, 즉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것이 곧 선교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자체가 선교적 삶인 것이다. 교회에 가는 것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전인적 삶이 교회가 되어라, 교회로 살라는 것이다.
끝으로 데이비드 보쉬가 《변화하는 선교》의 결론 부분에서 한 말을 인용함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14)
“십자가는 교회가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십자가는 굴욕과 심판의 장소이지만 또한 갱신과 새 출생의 장소이다. 십자가의 공동체로 교회는 단지 교회 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교제이며, 종교 기관이 아니라 출애굽의 공동체이다.”
미주
1) 김재현 편집, 한반도에 심교진 복음의 씨앗, (서울: kiats출판사) 참고하라.
2) 코로나19 발발 이후 이만희 교주의 신천지 신도의 감염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교회에서 전염된 사례, 기도원과 인터콥 선교단체의 부적절한 모습 등으로 각종 매스컴에서 전 국민적 질타를 받았다.
3)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년) 주교는 영국의 신학자, 선교학자, 선교사 그리고 작가였다. 원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는데,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남인도교회와 연합개혁교회에 소속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운동 활동가, 작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청년 시기에 남부 웨일스지방의 실업 광부들을 위한 휴일 캠프를 운영하는 일에 참여했을 때 회심했다. 당시 절망에 차 있던 실업 광부들이 싸움을 벌이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십자가가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몇 해 뒤에 복음주의 선교단체인 학생기독교운동(Student Christian Movement)에서 활동하면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74년 은퇴할 때까지 선교사이자 1947년 성공회, 감리교회, 남인도연합교회에 의해 시작된 성공회교회인 남인도교회의 주교로 목회하였다. 그는 진보적, 보수적, 카리스마틱 개신교, 가톨릭 교인들과 이야기가 통하는 에큐메니칼 운동가였으며, 남인도교회 주교로 목회할 때에는 사람들과 만남을 중요하게 여겨 외딴 문맹지역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가정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야외에서 감사 성찬예식을 인도하기도 했다. 1952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라인홀드 니버 같은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4) 대럴 구더(Darrell L. Guder)와 5명의 선교학자들이 함께 연구하여 출간된 《선교적 교회》에서 선교적 교회에 대하여 5가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① 선교적 교회론은 성경적이다. ② 선교적 교회론은 역사적이다. ③ 선교적 교회론은 현장적이다. ④ 선교적 교회론은 종말론적이다. ⑤ 선교적 교회론은 실천적이 될 수 있고, 쉬운 말로 표현하면 실천이다.
5) missional church에 대한 몇 가지 공통적인 오해는 다음과 같다. “전도 프로그램이 아니다. 새로운 해외선교 방식이 아니다. 교회 성장 방법이 아니다. 교회를 운영하는 ‘차세대’ 방식이 아니다. 교회를 운영하는 포스트모던 방식이 아니다. 반(anti-)전통적인 교회 형태가 아니다.”
6) Dr. Alan J. Roxburgh, Missional Church란 무엇인가? (https://fruityard.tistory.com 참조).
7) 김영산, 고신선교 본질과 미래, 고신선교 제4차 포럼 자료집, 86.
8) 한국의 후기 기독교 국가 현상이란 성탄절 공휴일, 군목제도, 국가조찬기도회, 애국가의 내용, 동네마다 세워진 5만여 개의 교회당, 전직 대통령 가운데 크리스천 장로 대통령이 몇 명 당선 등등.
9) 존 스토트, 제자도, 서울:IVP, 142.
10) 고신선교 4차포럼 자료집, 89.
11) 첫 번째 낱말인 ‘인애’에 해당하는 ‘헤세드’는 구약에서 약 245번 쓰이고 있다. 이 용어는 ‘진실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 ‘충실함’ ‘다함 없는 헌신’ ‘자비’ 등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활동은 그의 백성의 불성실함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진실하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공평’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의를 행하는 자를 격려하고 악을 범하는 자를 징계하는 ‘공의’ 혹은 ‘정의’를 의미한다. 심판자로서 여호와는 행악자들의 활동을 제한하시고 그를 처벌하신다(창 16:5, 출 5:21, 시 26:1, 사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권리를 완전히 보장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며, 이것은 그가 ‘미쉬파트’를 세우고자 하심을 의미한다. 세 번째 단어인 ‘정직’에 해당하는 ‘체다카’는 흔히 ‘의’가 그의 백성 중에, 전 세계 사람들 중에 편만하게 되는 것이다.
12) 크레이그 반 겔더(Craig van Gelder)는 선교적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성령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재조명을 통하여, 크레이그 반 겔더는 선교적 교회를 한 지역에서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이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 교회는 성경적(biblical)이며, 사도적(Apostolic)이며, 역사적(Historical)이며, 상황적(Contextual)이며,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실천적(Practical)이며, 발전적(Developmental)이다.
13)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 스탠리 존스는 이 부분을 지적하며 선교사로서 선교의 현장에 증거되어야 하는 것은 선교사의 문화도 아니요, 선교사의 발달한 문명도 아니요, 낙후된 선교현장의 문화를 개선하는 것도 아닌, 오직 2000년 전에 당신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남기는 것이 진정한 선교라고 말하고 있다.
14)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는 선교, (서울: CLC, 2014), 803.
그의 생애와 선교 사상 정리
준비기 선교목사 교수와 저술사역 남아대, 선교분과학과장
1929-1956 1957-1966 1967-1971 1972-1992
프레토리아 교대 Wedwalleni 남아공선교협의회(SAMS) 편집장
바젤대학교, 쿨만 타문화사역경험 misssionalia Theologia
김영산 선교사(kpm) | 고신대 선교목회대학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