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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2 통권 229호     필자 : 왕빈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왕밍다오(王明道) 목사님을 생각하며

“나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야 … 나는 베드로야 …”
1956년 가을 중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 왕밍다오(王明道)는 이같이 수없이 읊조렸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에 적극 협조하는 삼자애국운동을 비판하고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았다가 1955년 8월 아내 류징원(刘景文), 성도들과 함께 공안에 ‘반혁명분자’로 체포됐다가 이듬해 9월 전향서(?)를 제출하고 풀려났던 왕밍다오는 끝없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4세 때 크리스천이 된 이래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변함없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믿어왔다. 그랬던 그가 석방되면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삼자회에 협력하겠다는 진술서를 썼고, 그 진술서 전문이 기독교 잡지 ‘톈펑(天风)’에 실리는 치욕을 맞봐야 했다. 

그의 본명은 왕융성(王永盛). 훗날 이름을 ‘밍다오(明道)’로 개명할 정도로 기독교가 참 진리임을 명확하게 증명하겠다(明证真道)는 뜻을 올곧게 펼쳐왔던 터라 그의 전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왕 목사는 1954년 ‘영적 전쟁(属灵战争)’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통해 “영적 전장에 있어서는 오직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오직 진지를 사수할 뿐 단연코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在這属灵的战場上,只能進,不能退,只能坚守阵地,绝不能作一丈)”며 믿음을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 다잡음에는 “한 발, 한 치, 한 점도 양보할 수 없다(一尺、一寸、一分的让步)”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왕 목사는 삼자회의 눈엣가시였다. 그는 체포되기를 직감한 듯했다. 주일예배 설교 제목이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리라(人子被卖在罪人手里了)’이었다. 그가 목회하던 기독도회당(基督徒会堂)도 얼마 지나지 않아 봉쇄됐고, 베이징 샹산(香山), 창춘(长春), 광저우(广州) 등지에서 삼자회를 반대하던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체포됐다. 하지만 투옥 중인 류 사모가 제대로 먹지도 못해 몸 상태가 심각하고, 잘못하면 곧 죽을 수 있다는 소식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문이 기다린다는 협박과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깊은 상심과 함께 큰 혼란에 빠져 감방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실존을 의심하게 됐다”는 고백까지 했다.
 
다시 용기를 내기로 했다. 진심으로 회개 기도를 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천명하기로 한 것. 불 속에라도 들어가겠다는 심정이었다. 앞으로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할 음산한 감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8년 4월 29일 왕 목사와 류 사모는 또다시 체포됐고 괘씸죄까지 적용돼 그는 무기징역을, 그의 아내는 15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타자가 볼 때는 살아갈 아무런 이유가 없는 듯 보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당당했다.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 매일의 삶이 새로워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왕 목사는 미가서 7장 7∼9절을 위안으로 삼았다고 고백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폐렴을 심하게 앓기도 하고, 4개월 내내 수갑을 찬 채 날마다 구타와 굴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왕 목사는 23년 가까운 감옥생활에서 재소자들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주었다. 밥을 뭉쳐 놓았다가 떡 삼아 성찬식을 했다.

류 사모는 1973년 15년의 형기를 마쳤지만 1977년에야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될 수 있었다. 백내장이 악화돼 만년에 시력을 잃고 말았다. 왕 목사는 ‘반혁명분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지만 1980년 1월 9일 상하이(上海)에서 살던 큰아들 왕톈둬(王天铎)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유의 몸이었지만 늘 조심스러워했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해외 인사들을 만날 때는 정제된 말로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밝혔다. 긴 투옥생활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만 들어달라는 질문에 간단하게 답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 올해는 왕 목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긴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1991년 7월 28일 주님에게 돌아간 그의 뒤를 이어 류 사모는 이듬해 4월 18일에 소천했다. 왕 목사 부부는 죽는 날까지 수많은 중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로 살아가기를 기도했다. 

왕 목사처럼 삼자회의 설립 목적이 최종적으로 중국교회를 박멸하는 데 있다고 여겼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적지 않았다.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은 교회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에 의해 주도됐고, 1950년대 삼자회는 교회 내부에서 하나님을 반대하고 결국 교회를 소멸시키는 세력에 의해 주도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가정교회의 목회자들은 고난을 자처했다. 

2005년 8월 16일 베이징(北京) 여우이병원(友谊医院)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긴 위안상천(袁相忱·1914∼2005) 목사는 1958년 4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반혁명’이라는 죄명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1933년 왕밍다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석방된 뒤에도 10년간 공민증도 없이 보호관찰 대상자가 돼야 했다. 위안 목사는 1995년 미국 백악관의 초청을 받았지만 기도를 한 뒤 거절했을 정도로 일생을 기도로 살았다. 1998년에는 300명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이듬해에는 싱가포르에서 위안 목사의 전기인 ‘살아있는 제사’가 출간됐다. 


기독교삼자회 초대 주석 우야오쭝(吳耀宗) 목사의 절친이었던 셰모산(谢模善·1918∼2011) 목사는 삼자회 동참 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 거부하면 체포될 걸 알면서도 사양했던 것. 1956년 5월 28일 밤 공안원들에게 끌려간 뒤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생활과 강제노동을 하다가 23년 만에 풀려났다. 그가 취조당하던 중 복음을 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마오쩌둥(毛泽东) 주석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라는 난감한 질문에 그는 “천국문은 열려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어가기 원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지금은 은혜의 문이 열린 시대요, 구원받을 때라 모두 회개하고 (…)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취조하던 요원이 그를 내동댕이쳤다. “네가 이 기회에 전도하느냐”며 윽박질렀다. 그는 침착하게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당신들이 말하라고 시킨 게 아닙니까. 그럼 내가 대답 안 해도 좋습니까”라고 맞받아쳤다. “내 몸은 이미 주께 바쳤으며 내 생명은 주의 제단에 올려져 산 제물이 되었기에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손목엔 쇠갈고리가 꽂혔다. 그는 133일간 손목에 수갑을 찼다. 수갑이 너무 꽉 조여져 살갗을 뚫기까지 했다. 고문과 고통 속에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음성은 3번이나 이어졌다. 셰 목사는 다른 죄수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형기가 2년이 연장되기도 했다. 그 기간 노동개조로 악명 높은 칭하이(青海)성 감옥에서 지냈다. 1978년 형기가 공식 만료됐음에 불구하고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20년 이상 형기를 채운 60세 이상은 출소할 수 있다는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명령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상하이에 있던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출옥한 뒤 또다시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1980년대와 90년대 두 차례 체포돼 각각 3개월을 구치소에서 지내야 했다. 외국 선교단체는 수차례 그에게 중국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그때마다 “누가 중국에서 이 일(복음 전도)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답하곤 했다. 2011년 6월 30일 고향인 장쑤(江蘇)성 양저우(扬州)에서 소천한 셰 목사는 베이징 서우왕(守望)교회 진톈밍(金天明) 목사의 목사안수를 직접 인도했고, 2011년 5월 당시 우방궈(吴邦国)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에게 종교자유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낸 데도 앞장섰다.


린셴가오(林献羔·1924∼2013) 목사는 1958년 삼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78년 석방된 뒤 광저우에서 가장 큰 가정교회를 세웠다. 2013년 8월 16일 광둥(广东)성 광저우에 있는 한 장례식장에서 치러진 린 목사의 장례식에 3만여 명의 추모 인파가 몰려 사복 경찰들이 배치되기도 했다. 


리톈언(李天恩)으로 불리던 리무성(李慕圣·1928∼2016) 목사는 중국 내 오순절 계통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다가 2016년 5월 3일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1960년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철광석을 캐며 안후이(安徽)성 노동개조소에 있으면서 한겨울 웃통을 벗고 팔다리를 벌린 채 6시간씩 벽을 쳐다보는 고문을 당했다. 한번은 10여 미터 아래로 떨어져 사선을 넘나들기도 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가족들과 1년에 한 번, 그것도 30분 이내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환경도 그의 복음전파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1975년 사형선고를 받은 뒤 3번이나 형 집행 정지로 생명을 이어갔다. 그를 죽이려고 앞장선 한 공산당 서기는 훗날 정치적 이유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그에게 이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당신을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 당신을 지켜주었소. 그러나 마르크스는 나를 지켜주지 못했소. 나도 당신이 믿는 복음이 참이라고 믿소.”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했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왕밍다오 목사를 비롯해 중국교회의 1세대 지도자들을 통해 중국교회의 저력을 느끼게 된다. 엄혹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오늘의 중국 크리스천들에게 묵직한 감동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길을 걸어갈 때도 얼마든지 고난을 직면할 수 있고, 설령 절망의 터널을 지나가야 할 때도 터널 안과 터널 너머에서 성령 하나님은 변함없이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크리스천이여, 힘을 내자. 중국교회여, 복음이 중국의 참 소망이자 희망임을 증거하자. 선교하는 중국교회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하는 중국 기독교를 기대한다. 조국을 더욱 사랑하고 모든 민족을 품는 중국교회의 내일을 꿈꿔 본다.






사진 설명 | 왕밍다오, 위안상천, 셰모산, 린센가오, 리톈언 목사님(위에 서부터)
사진 출처 | 바이두

왕빈 | 중국인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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