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Talk_20210902_195623730.jpg) 생애 왕징(王徵, 1571-1644)의 자는 양보(良甫), 호는 규심(葵心), 지리수(支离叟), 요일자(了一子), 요일도인(了一道人) 등이며,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 경양현(涇陽縣) 사람이다. 왕징은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廷筠) 등과 더불어 중국 천주교의 ‘4현(四賢)’으로 꼽히고 있다.
왕징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외숙 장감(張鑒)의 도움으로 그는 7세부터 독서에 전념하였고, 16세에 생원(生員)이 되고, 24세에 거인(擧人)이 되었다. 그러나 북경(北京)에서 치르는 회시(會試)에는 9차례나 응시했지만 모두 낙방하였고, 진사(進士)가 되어 관직에 나가게 된 것은 52세의 늦은 나이인 1622년이었다. 이후 그는 직예광평부(直隸廣平府) 추관(推官), 양주부(扬州府) 추관, 산동안찰사(山東按察司) 요해감군도첨사(辽海监军道佥事) 등 관직을 지내면서 병사들의 훈련, 수리 시설의 정비, 염정의 정비, 민생부담 경감, 퇴물 거래 금지 등 치적을 올렸다. 1634년 등주(登州)에서 일어난 병변을 막지 못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귀향해 있었다. 1644년 당시 명조를 멸하기 위한 이자성(李自成)을 비롯한 농민반란군의 세력이 왕징의 고향인 경양현까지 이르렀을 때 붙잡힌 그는 단식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입신 그는 본래 불교를 신앙했으나 모친이 죽은 뒤 도교로 기울어 수련에 전념하였다. 이후 20여 년간 그는 도가에서 중시하는 양생술(養生術), 도인술(導引術), 방중술(房中術), 연단(煉丹)과 약재의 활용, 음식의 활용법 등에 심취하였고, 천문 측량 시설 ‘선기(璇玑)와 지남(指南)’, 자동 기계 장치인 ‘화인기굉(化人奇肱)’, 외바퀴 수레 ‘목우류마(木牛流馬)’, 기계식 발사 장치인 ‘연노(連弩)’ 등의 제작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1614년에 선교사 디에고 판토하(龐迪我, Diego de Pantoja)가 지은 책 《칠극(七克)》을 친구로부터 전해 읽으며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겸손, 인애, 자선, 인내, 관용, 절제와 근면 등 7가지 미덕을 통해 교만, 질투, 인색, 분노, 탐욕, 음란, 나태 등 7가지 죄악을 극복하고 덕을 쌓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서 그는 큰 감동을 얻었다. 2년 후인 1616년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북경으로 갔을 때 판토하를 만날 기회가 있었고, 이후 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아 빌립보(斐理伯)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천주교도가 된 이후 그는 《외천애인극론(畏天愛人極論)》, 《성경요략회집(聖經要略滙集)》, 《성경직해(聖經直解)》, 《숭정술략(崇正述略)》, 《사천실학(事天實學)》, 《진복직지(眞福直指)》, 《활인단방(活人丹方)》 등의 저작을 남겼다고 아담샬(湯若望)이 번역한 《숭일당일기수필(崇一堂日記随筆)》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책 자체는 전해지지 않는다.
서학 연구와 저술 일찍이 도가 수련 차원이기는 하였지만, 기계 만들기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던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양 기계 관련 서적들을 빌려 읽으면서 연구에 몰두하여 기술들을 익혔다. 1626년 왕징은 선교사 요아네스 테렌즈(鄧玉函, P. Joannes Terrenz)의 구술을 바탕으로 중문으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원서기기도설(遠西奇器圖說)》을 번역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기계 공정의 자연과학 이론 기초, 기계 공정의 작동 조건과 공구류, 기계 공정의 기능과 효과 등을 도면을 곁들여 소개하였다.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된 최초의 역학과 기계 관련 학술서로 평가된다.
이후 그는 농민들에게 관개 수리 장비와 각종 농기구를 직접 제작 보급하기도 했다. 왕징이 만년에 저술한 《제기도설(諸器圖說)》에는 학음(鶴飮), 자전마(自轉磨), 자행차(自行車) 등 각종 기기의 설계도를 비롯한 작동 체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담겨 있는 그가 만든 각종 기기는 대부분 선교사들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거나 자신의 기존의 제작 체계를 개선한 것들로 평가된다.
왕징은 음운학에도 관심을 깊이 가졌다. 그는 니콜라스 트리고(金尼阁, Nicolas Trigault)가 최초로 로마자로 한어 발음을 표기한 사전 《서유이목자(西儒耳目資)》를 집필하는 과정에 협력하여 교정하고 서문을 썼다. 왕징은 이 책의 편찬을 돕는 과정에서 서양 언어의 자모와 발음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었고, 서양 문자가 한자의 ‘반절(反切)’을 통한 음운 표기법을 보완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음운학 차원에서 서학을 빌어 중국 전통을 보완할 수 있다는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로 나온 이 책은 한자를 익히려는 서양인들에게 제공되어 크게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중국 유학자들의 서학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측면을 유명한 동림당 인사 장문달(張問達)도 바로 이해하게 되었고, 이 책의 출간에는 부자의 도움이 컸는데, 장문달의 아들 장훈방(張纁芳)은 왕징의 영향을 받아 영세를 받고 입교한 인물이기도 하다.
신앙의 실천과 현실 사이의 고뇌 고향에 머무는 동안 왕징은 선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바,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선교사 자케 로(Jacqes Rho)의 《애긍행전(哀矜行銓)》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인회(仁會)’를 설립하여,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곤궁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아울러 교당을 건축하고, 구휼(救恤) 자선사업에 참여하는 일 외에도 그는 치안 유지를 위한 일에 협력하는 한편 ‘경천대(景天臺)’라는 이름의 천문대를 세워 서양 천문 지식의 실습과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왕징은 15세에 결혼하여 부인 상씨(尙氏)와의 사이에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딸 둘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역병으로 인해 일찍 죽고 말았다. 진사에 급제한 이후 주위에서 첩을 두어 아들을 얻을 것을 권하였지만, 왕징은 자신이 진사에 급제한 것이 천주의 은사라고 하면서 첩을 들이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문중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1622년 15세의 첩 신씨(申氏)를 비밀리에 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징은 이 일을 후회하고 신부에게 여러 차례 고해하였으나 용서를 받지 못하자 첩을 내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첩 신씨가 결사반대하고 부인 상씨도 강력하게 반대하자 첩을 내보내는 일은 포기하였으나 이후 신씨와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손이 끊어진다는 압박을 면하기 위해 왕징은 종형제들에게서 두 아들 왕영춘(王永春)과 왕영순(王永順)을 입적하였다. 명말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혼란과 위기가 겹치는 가운데서, 특히 유-불-도 합일과 동서 문화의 교류를 종합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왕징의 일생은 각종 모순과 충돌하는 가운데에서 몸부림치며 나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동(遼東)에서 만주족이 흥기하여 명나라를 압박하는 가운데서 맡은 바 국방과 민생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하였고, 반군에 의해 조정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충군보국(忠君報國)의 결의를 다지면서 결국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 인물이다. 유-불-도에서 기독교로 귀의하는 과정에서 그는 서학을 받아들여 유학을 개조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중국의 현실을 개선해 나가고자 하는 포부를 실천하여 성과를 보여 주었다. 왕징은 평생을 동서 문화의 음운, 과학기술, 구제와 도덕 영역에서의 조화를 지향하였다. 불행하게도 전통적 충효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여 첩을 맞이하고, 망국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은 그가 새로 신앙으로 수용한 교회법적 평가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바탕으로 서방 음운학, 역학, 기계 지식을 중국에 소개하면서 동서의 융화를 위해 남긴 그의 업적은 지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진설명 | 왕징 초상, 《원서기기도설(遠西奇器圖說)》 사진출처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