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에 이어 2권은 중국의 대분열 시기인 5호16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를 거쳐서 수(隋), 당(唐)까지의 약 600년간의 역사를 역시 ‘개혁’을 키워드로 풀어나간다. 이 시기의 한반도는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까지 이어진다. 고려가 탄생하기 직전이다. 유럽에서는 로마가 둘로 분열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이탈리아반도와 유럽에 게르만계의 군소 초기 왕국들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2의 황금기라 불리는 당은 명실상부 중국 역사상 최전성기이자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가장 내세우고 싶은 왕조이다. 오늘날의 중국 정치지도자들은 당나라 향수병에 걸려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의 황금기는 어디서 어떻게 왔는가? 당의 개국 초기 정책들은 거의 수 왕조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은 수의 개혁정책들을 완성하였고 그 위에서 부흥했다. 그래서 당을 수와 구분하지 않고 수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당의 창립자는 이연(李淵)이지만 실질적으로 전장을 누비며 통일전쟁을 지휘한 자는 그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었다. 당 고조(이연), 태종(이세민), 고종(이치)으로 이어지는 삼대는 흥미롭게도 조선왕조 초기의 태조(이성계), 태종(이방원), 시종(이도)의 삼대와 상당히 닮은 면이 있다. 당은 고종 때에 가장 너른 영토를 가졌고 조선은 세종 때 가장 태평성대를 누렸다.
중국인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가 누구라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아마도 당 태종 이세민을 꼽는 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는 제도적 개혁을 이끈 면에서는 후한 점수를 못 주겠지만 그가 보여준 정치 방식과 지도자로서의 모범은 앞선 군주들에게서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공자의 말이다. 이 말은 ‘통치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민심이며 정치 지도자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고 선거 때가 되면 한국의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인용하는 격언이다. 당 태종 이세민도 이 말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정관의 치(貞觀之治, 627년∼649년)’라 불리는 23년간의 그의 시간은 당이 황금기로 진입하는 데 있어서 굳건한 발판이 된다. 그의 이력에는 서한(西漢)의 개국황제 유방(劉邦)이나 동한(東漢)의 개국황제 유수(劉秀)와 같은 왕조 창건과 전란의 평정이란 업적이 있으며, 서한 초기 폐허를 딛고 일어서서 경제를 부흥시킨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업적도 있고, 주변 정권들을 복속시키고 영토를 확장한 한 무제(漢武帝)와 같은 업적도 있다. 그의 이력서는 제1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셋을 합쳐 놓은 것과 같다.
무측천(武則天) 1982년 5월 21일 덩펑(登封)현 농민 취시화이(屈西怀)는 상급 기관의 쑹산(嵩山) 식수조림 사업에 동원되었다. 취시화이는 당나라 때 무측천이 지었다고 하는 제단인 등봉단(登封壇)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연히 바위의 갈라진 틈에서 기다란 종이 같은 것이 끼어 있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빼내어 보니 그것은 종이가 아니라 얇은 금속 조각이었다. 흙을 털어내고 소매로 닦으니 반짝반짝 광이 났고 그 표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글자는 1,300년 전의 글자인지라 그의 동료들 아무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구리로 만들어진 옛날 물건이라 생각했다. 세로 36센티미터, 폭 8센티미터, 두께 0.1센티미터짜리 ‘동편’을 집으로 가져와 장롱 속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자신도 그 금속편(金属片)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던 차에 소문을 들은 문화재 장물아비가 그를 찾아왔다. 산둥(山東)에서 왔다는 문화재 매매업자는 그 금속편을 보더니 현금 5만 위안을 그 자리에서 내놓았다. 얼이 빠진 취시화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더욱 이상한 제안을 했다. 자기가 이 물건을 팔면 5만 위안을 더 주겠다고 했다. 1982년 10만 위안이면 현재 가치로 환산 시 한화 10억도 넘는 돈이다. 지금 같으면 집이라도 사겠지만 개혁개방 초기인 당시 중국에서는 일개 농민이 그렇게 많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뿐더러 또한 그렇게 많은 액수를 부르는 것에 취시화이는 겁이 덜컥 났다. 이는 분명 국가 보물이 틀림없었다. 그는 이 보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 잠 못 이루다가 결국 그 기다란 금속편을 들고 덩펑현 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허난성 문화재 관리국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하여 무측천의 ‘제죄금간(除罪金簡)’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뭔가를 기원할 때 금, 은, 구리, 옥 등으로 길고 납작하게 간(簡)을 만들어서 그 표면에 내용을 새긴 것이다. 농민 취시화이가 구리로 짐작했던 그 금속 조각은 금(金)이었다. 이 금간은 현재 허난박물관(河南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은 애써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안 띄고 이렇게 우연히 발견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가 문화재 장물아비의 돈 유혹에도 불구하고 금간을 넘기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무측천이라는 여인은 아마도 중국의 역대 제왕 중 그 스타성과 흥행성에 있어서 독보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그녀의 일생이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이며 또한 논쟁의 여지가 많다는 뜻이겠다. 천 년이 넘도록 후세 사람들은 그녀를 권력을 잡기 위해 잔혹한 짓을 스스럼없이 일삼은 무서운 여자로 묘사해 왔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정치적 밑천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해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정치적 두뇌와 섭외능력, 과단성과 같은 자질, 즉 정치적 전투력으로 보자면 역사상 그녀에 필적할 만한 인물을 고를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측천의 통치가 당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수백 년 동안 유지해 온 문벌 대지지층을 타파하고 한문(寒門, 비문벌) 중소지주층을 사회 지도층으로 끌어낸 사회개혁이었다. 이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몇몇 가문의 성이 황제의 성보다도 위에 있었다. 즉 기득권층의 자리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의 개방성은 무측천 시기에 실시한 과거제도의 개방성과 세분화, 문벌타파정책으로 인해 더욱 꽃피울 수 있었다.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