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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6 통권 227호     필자 : 변성래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중국을 움직인 시간 1》- 땅, 권력, 동란 그리고 개혁
_김상규 / 북랩

단지 중국사뿐만 아니라 역사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각기 서술이 달라진다. 어떤 관점에서 기록을 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 이 책의 저자는 중국의 역사를 ‘개혁’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나간다. 사실 개혁이라는 단어는 위정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했고 개혁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숙청을 했으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선동했다. 따라서 개혁은 다른 말로 ‘정치투쟁’이나 ‘정치력 강화’가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 민족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하 문명을 시작으로 하(夏), 상(商), 주(周)왕조 그리고 춘추전국 시대. 제1 제국 시대인 진(秦), 한(漢) 시대. 삼국분열의 대분열 시대, 진(晋)의 짧은 통일 이야기까지 기술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진보와 융합의 500년이라고 할 수 있는 ‘춘추전국 시대’로 가본다. 춘추전국 시대를 어느 때로 볼 것인가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하지만, 주 왕국이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기 시작한 기원전 771년부터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세계대전의 끝은 진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로써 중국 민족은 무려 550년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게 된다. 550년간 전쟁을 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 사이 민중들의 삶은 얼마나 피폐했을까?

춘추전국 시대는 민족이 융합하는 시기라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가 중국 민족에게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은 남쪽의 방대한 영토인 초(楚), 오(吳), 월(越)을 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시기 다양한 사상과 창의, 혁신개혁이 일어나는 시기로 설정한다. “오랜 전쟁 국면은 각 제후국으로 하여금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러기 위해서 각국은 고향과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인재를 유지하였고 이렇게 유치된 인재들은 사회의 개혁을 이끌었다.”

제1 제국 시대(진, 한)
진시황제가 일궈놓은 많은 체제 중 어떤 것은 2,000년을 넘게 지속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진시황이 상당히 오랫동안 통치 기간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진제국은 불과 16년간 유지되었다. 시황제 영정(嬴政)은 황제가 되고 11년 만에 죽고, 망나니 아들이 황제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난이 일어났고 5년이 채 안 되어 제국은 붕괴되었다. 진시황의 업적이나 과오의 대부분은 이사(李斯)라는 재상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사는 순자(荀子)의 제자이기도 하다. 순자는 제왕학, 지금으로 말하자면 정치외교학의 권위자였다. 

대분열의 시대 
189년 원소(袁紹)의 십상시(十常侍) 처단 사건을 빌미로 동탁(董卓)은 무력으로 낙양(洛陽)을 장악한다. 어린 황제를 끼고 전횡을 휘두르는 동탁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의문점이 드는 것은 동탁이 몰고 온 양주병단(涼州兵團)이 아무리 이민족과의 오랜 실전으로 단련된 정예병이었다 할지라도 3천 명에 불과한 이들이 수도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아무도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역사적 사료를 보면 모든 군대가 강족(羌族)과 황건(黃巾)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어 수도를 지키는 병력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울러 동한 초기에 실시한 군개혁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장은 아무도 동탁에게 반기를 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원소, 원술(袁術), 조조(曹操) 등 조정의 실력자들은 일단 낙양을 빠져나와 목숨을 보전하고 세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오래지 않아 원소와 조조도 힘을 추스르고, 화북지역의 군벌들은 원소를 구심점으로 하여 반(反)동탁 연합군을 형성했다. 뒤이어 지방 군벌들도 역도 동탁을 타도하기 위해 낙양으로 진군했다. ‘반동탁 연합 전쟁 시기’라 불리는 이 시기는 192년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 의해 동탁이 살해되면서 3년 8개월만에 끝이 난다.

적벽대전(赤壁大戰)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장강(長江)의 적벽이라는 곳에서 조조의 대군이 수적으로 훨씬 약세인 손권(孫權), 유비(劉備)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돌아가게 된 사건이다. 이렇게 된 결과는 조조가 자만심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적벽대전 이전에 조조는 형주(荊州)를 거저 얻다시피 했다. 손 안대고 코를 푼 것처럼 형주를 너무 손쉽게 손에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적벽대전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인가? 바로 유비이다. 가장 적은 투자로 최대 수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비 그룹은 그 수도 적었고 근거지도 없이 남의 땅에 빌어있던 신세였다. 적벽대전의 승리로 유비는 남형주(현재의 호남성)를 얻는다. 그리고 얼마 후 관우의 활약으로 북형주(현재의 호북성)의 상당 지역을 차지했다. 

적벽대전이 끝난 후 형주 북부는 조조와 손권이 반반씩 점령하여 대치하게 된다. 손권은 남군(南郡)이라는 곳을 유비에게 빌려준다. 남군은 조조와 가까운 지역인 관계로 결국은 조조의 총알받이를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비는 묵묵히 그곳을 받아들이고, 머리를 짜내기 시작한다. 남형주의 4군을 전략적으로 접수한다. 그 후 천혜의 분지 지역인 촉(蜀)의 익주(益州, 현재의 사천성)를 얻는다. 떠돌이 신세에서 적벽대전을 계기로 드넓은 형주를 거의 차지했다. 유비에게 적벽대전은 대단히 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 후 유비는 사천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중앙 정치가 부패했을 때 지방 관리들의 착취와 이에 따른 민중들의 고통 역시 우리보다 훨씬 심했던 것 같다. 옛날의 농민들은 웬만해선 집단행동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에서 농민 기의(起义)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심했고 이들이 도저히 살 수 없을 지경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 동란은 세상을 몇십 년 뒤로 후퇴시켰으나 동란의 시기가 끝난 후에는 세대교체와 새로운 정권에 의한 대대적인 개혁이 뒤따랐다. 이것이 중국을 계단식으로 진보하게끔 만든 역사의 동력이다.”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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