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설정   사이트맵    사역에 동참하시려면  
    HOME  |  선교회소개  |  교육.훈련  |  중국을주께로  |  중국기도  |  중국어교실  |  자료나눔  |  커뮤니티  |  도서·음반
   
중국을 주께로는
전체보기
이번호보기
지난호보기
주제별보기
  특집/기획
  선교전략
  중국교회
  중국사회와 문화
  지역 및 종족연구
  중국뉴스
  중국어관련
  선교일반
  선교나침반
  중국 기독교
  기획
정기구독안내
해외정기구독안내
HOME > 중국을주께로 > 이번호보기
2021.6.3 통권 226호     필자 : 김종건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명말 중국 천주교회 인물(1) 서광계

명대 중국에서 선교 기반을 얻게 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언어와 문자 및 전통 문화를 익히고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중문 저술활동에 힘썼으며, 이른바 ‘서유(西儒)’임을 자임했다. 1552년부터 1613년까지 예수회 선교사 36명이 차례로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국인으로서 영세를 받고 입교하게 된 인물들도 많았다. 명말 중국인으로서 입교하여 중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廷筠) 등이 있다. 

서광계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강소성 송강부(松江府) 상해현(上海縣) 서가회(徐家匯)의 소상인 집안 출신으로, 자는 자선(子先), 호는 현호(玄扈)이다. 그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를 보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1600년 봄 남경에서 마테오 리치를 만나 대화를 나눈 후에는 그를 세상 모든 일에 통달한 군자(君子)로 높이 평가했다. 그는 마테오 리치에게서 기본적인 천주교 교리를 들을 수 있었고, 42세이던 1603년1) 남경에서 로차(Jean de Rocha, 羅如望)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중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보록(保祿)’이라는 세례명도 얻었다.

서광계는 43세였던 늦은 나이에 1604년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의 관직을 받아 북경에서 관직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미 북경에 와 있던 마테오 리치와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서광계는 1607년에는 라자로 카타네오(郭居靜)를 상해로 초빙하여 예배당을 개설하고, 다음 해에는 그의 생가인 상해 서교(西郊)의 서가회에 천주교당을 설립하였다. 

실용적 학문을 중시했던 서광계는 서방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 익히고자 하였다. 그는 마테오 리치를 직접 찾아가서 천문, 역법, 수학, 무기 제조기술을 배웠고 병기, 둔전(屯田), 염정(鹽政), 수리 등의 분야를 다룬 많은 서양 서적도 두루 섭렵했다. 

서광계는 1605년 마테오 리치와 함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중문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중서과학기술교류사에 있어서 모범 사례이다. 서광계는 1년여에 걸쳐 매일 오후 마테오 리치 집을 찾아가 그의 구술을 중문으로 받아 적었고, 교정 작업을 거쳐 1607년 《기하원본》(전 6권)의 번역본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기하학의 논리적 추론 방식을 소개하여 중국 근대 수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고, 중국 사대부들에게서 만세에 남을 대표 업적으로 찬사를 받았다. 

서광계는 또한 마테오 리치의 구술을 받아 적는 방법으로 《측량법의(測量法義)》, 《측량이동(測量異同)》, 《구고의(鈎股義)》 등 공동 번역서도 남겼다. 1610년 마테오 리치가 죽자 서광계는 사바티노 우르시스(Sabbatino de Ursis, 熊三拔)와 아담 샬(Adam Shall, 湯若望)에게서 역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를 도와 로마 가톨릭교의 해설서 《칠극(七克)》(전 7권)을 저술하였다. 

희종(喜宗) 천계(天啓) 연간(1621∼1627년)에 위충현(魏忠賢) 일파 환관들의 모함과 배척을 받자 건강을 이유로 천진(天津)으로 물러나 농업과학 연구에 힘을 쏟아 《농정전서(農政全書)》(전 60권)를 저술했다. 

서광계는 의종(毅宗) 숭정(崇禎) 원년인 1628년에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郞)으로 관직에 복귀하여 역국(曆局) 설립을 건의하고 이지조의 보좌를 받아 〈대통력(大統曆)〉 개정 작업도 주도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롱고바르디(Nicholas Longobardi, 龍華民)와 요아네스 테렌즈(P. Joannes Terrenz, 鄧玉函), 지아코모 로(Giacomo Rho, 羅雅谷), 아담 샬 등을 기용하여 근대적 역법 연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는 《숭정역서》(전체 46종, 137권)가 편찬되었다. 

서광계는 또한 서양 대포를 제조하여 청나라 군대의 방어에 맞섰으며, 둔전 개간을 비롯하여 수리(水利), 구황(救荒), 소금법 등에 관한 개선책도 제시하였다. 1630년에는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고, 1832년에는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 국정 주요 정책 결정에도 관여하였다. 1633년 72세로 북경에서 사망하였고, 뒤에 현재의 상해 서가회로 옮겨 안장되었다. 사후에 태자태보(太子太保), 소보(少保)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서광계는 유가의 기본 원리를 기반으로 한 천주교의 교리를 융합 소통하려고 하였다. 그는 《변학장소(辯學章疏)》에서 천주교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 참되게 하고 악을 버려 정결케 할 수 있다. 위에 계신 주께서 생육하게 하고 구원하는 은혜,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는 도리라고 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충효의 대의에 맞지 않은 말이나 인심(人心)과 세도(世道)에 유익이 없는 말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천주교의 모든 계율이 “천리인정(天理人情)을 잘 살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태서수법서(泰西水法序)》에서는 중국 정치 체제와 윤리 도덕에서 부족한 점들을 외래의 불교에서 보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고, 천주교를 통해서 “유교를 보완하고 불교를 바로잡을 수 있다(補儒易佛)”고 밝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서광계는 명조 말기 환관의 정치 농단과 사회 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천주교 선교사들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여 사회를 개혁하고 교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적으로는 현재의 상해시 서회구(徐匯區)의 광계공원(光啓公園)에 부인 오(吳) 씨와의 합장묘가 남겨져 있으며, 무덤 앞에는 석상과 비랑(碑廊)이 있다. 인근에 있는 서광계기념관에는 《기하원본》 등 그가 저술한 서적들과 최초로 중국에 들어온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 등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황포구(黃浦區)에 일명 구간루(九間樓)라 불리는 그가 살던 고택이 남아 있는데, 명말 화재로 불타고 아홉 칸만 남았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1983년 11월 서광계 서거 3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광계고거(徐光啓故居)’라고 쓰인 표지석이 집 앞에 세워졌다. 그의 출생지인 서가회라는 지명은 본래 법화회(法華匯)라는 이름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바꾼 것이다. 



미주            
1) 1606년경이라는 자료도 있음.






사진설명 | 서광계 기념관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인쇄하기   이메일보내기   
   
110-812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29길 25, (명륜3가 명륜빌딩 202호)   Tel : 02)745-0780~2, 070-8236-1270   Fax : 02)745-0786    E-mail : sinim@chol.com
Copyright 중국어문선교회 All Rights Reserved.     Product by gmgl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