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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3 통권 221호     필자 : 김한중 프린트   이메일 
[선교사의 삶과 사역]
고신 선교 1호 선교사 김영진 (2)
2기 선교사역(1964-69년)
대만선교의 1기 사역이 선교의 기초를 놓는 기간이었다면, 2기 선교사역은 현지어로 설교하며, 대만의 기후와 문화에 적응하여 교회개척과 신학교육 등의 선교를 활발히 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신주교회(新竹敎會) 개척
김영진 선교사가 안식년 기간 중 난먼(南門)교회를 지도하던 대만장로교 좡성마오(莊聲茂) 목사는 국제우편으로 난먼교회를 자기에게 맡기고, 김 선교사는 초신자 몇 명을 데리고 따로 교회를 시작하라는 통보를 해왔다. 그 교회는 WCC에 가입한 뒤 중정(中正)교회로 이름까지 바꾸어 버렸다. 김영진은 이 일로 안식년을 앞당겨 선교지로 귀임하였다. 모든 기득권을 양보하고 빈손으로 왕진뉘(王今女) 집사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면서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를 다시 시작할 결심을 하였다. 1964년 6월 28일 ‘기독교 개혁종장로교 신주교회(基督敎改革宗長老敎 新竹敎會)’라는 이름으로 다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선교관을 저당하여 은행대출을 받아 1972년 1월 21일 새 예배당을 구입하고 재단법인 수속까지 마쳤다. 1975년에는 입당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신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김영진 선교사의 통역을 도와주던 임우영(林友英)이 미국 칼빈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목사안수를 받고, 두 분(王炳煌, 王景春)을 장로를 장립하고 당회를 구성하였다. 임우영은 교회뿐 아니라 ‘개혁종장로회신학교’ 교수사역과 노회의 조직과 운영에도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1982년 10월27일 교회를 사면(辭免)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신주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1991년 한 빌딩의 6과 7층을 매입하여 교회당과 목사관을 구비하였다. 

주둥교회(竹東敎會) 개척
주둥(竹東)진은 신주시의 동쪽 산악분지에 있는 인구 5만여 명의 객가인(客家人)지역이다. 객가인은 220만여 명(대만 인구의 10%)이지만 기독교신자는 약 5천 명으로 복음화율은 0.3% 미만이며, 신주를 중심한 북서부지역에 70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 대만 전역에 20여 개의 교회가 있지만 목사는 6명뿐이고 그중 4명은 노쇠하여 활동이 어려운 상태였다. 김영진 선교사는 처음부터 복음이 필요한 객가인을 전도할 목표를 가지고 노력했다. 김영진 선교사의 통역으로 협력하고 있던 린춘펑(林春棚) 장로를 통하여 1963년 6월경에 한 가정집에서 예배를 시작하게 되고, 1964년 3월에 주동전도소로 정식으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8월부터 쩌우파롱(鄒發隆) 전도사를 임명하고, 9월에 성공위원회(聖工委員會)를 구성하여 교회를 돌보게 하였다. 매주 목요일 밤마다 2년간 신학강좌를 하고, 매일 성경읽기를 지도하여 어린 신자들을 양육함으로 교회의 기초를 진리 위에 세우는 노력을 기울였다. 

주동교회는 처음부터 십일조와 건축헌금을 하며 교회의 재정자립과 교회당 건축을 목표로 하였다. 1968년 2층 건물을 매입하였고, 1969년 3월 17일에는 종야오짠(鍾耀贊) 장로 장립과 3인의 집사를 임명하였고, 그해 노회에서 추 전도사를 목사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약 8년간 봉사하던 추 목사가 사임한 후에는 원자오서(溫兆攝) 목사가 1972년 2월 2일 2대 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3층 건물을 매입하여 종교법인으로 등기함으로 중화민국 객가인들의 중심교회가 되었다. 1985년에는 중심 도로변에 150평의 땅을 매입하고 1989년 3월에 온 교회 교인들의 소원이던 십자가 종탑이 있는 교회를 건축하였다. 건축예상금액은 850만 원(대만 화폐)이었으나 건축비 폭등으로 두 장로님의 집을 담보로 하여 재정이 채워졌기에 건축을 완공할 수 있었다. 대출금 상환도 완료되어 1991년 1월에 헌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온 교인들이 기도하고 소원한 대로 명실공히 신주현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이 지어진 것이다. 원 목사는 김영진 선교사의 평생 동지가 되어 크고 작은 일을 형제처럼 의논하며, 사랑과 존중으로 대만선교의 동역자가 되었다. 김영진 선교사의 책들과 유품, 신학교의 역사자료들은 주동교회의 작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지 화위안교회(山地花園敎會) 시작과 교회 건축
산지 고산족은 대만 인구의 약 2%인 43만여 명이며, 9개 부족으로 1,000m 이상 30여 개의 산지향(山地鄕)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은 1627년에 화란(和蘭)개혁교회 캔디듀스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그 후 화란선교부는 37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했다. 2차대전 뒤 ‘산지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부흥운동이 일어나 산지인의 약 60% 이상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다. 신주현 우펑(五峯)향 화위안촌(花園村)에 세워진 화위안교회는 타이야족(泰雅族, 77,000명, 12개 교회에 4,000여 명의 교인이 있었다.)인데, 대만장로교단에 소속된 산지인교회 대부분이 WCC에 가입하여 신학적 혼란이 야기되자 화위안촌의 한 장로가 대만장로교회를 탈퇴하고 개혁종장로회에 가입 신청을 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1월 1일에 설립예배를 드리고 새 교회가 시작되었다. 당시 방문한 한명동 목사가 10평 정도의 학고방 예배당을 지어 헌당예배를 드렸다. 1975년 교인들이 늘어나자 집 한 채를 사서 예배당으로 개조해 두 번째 헌당예배들 드렸다. 여전도회연합회가 조직되고 산지교회에서 SFC연합수양회도 시작되면서 신주, 주동, 화위안교회는 주 안에서 형제애를 나누며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연합회가 모이면 4개의 언어(북경어, 대만어, 객가어, 타이야어)로 통역이 이루어져야 했다. 연합예배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부인회 교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또한 추수감사절에는 종족별로 전통 의상을 입고 아름다운 찬양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1982년 화위안교회 성가대원들이 ‘한국방문노래선교단’을 조직하여 한국교회를 방문하였다. 방문 목적은 십자가 종탑이 있는 새 교회당을 건축하고 싶은 간절한 소원 때문이었다. 높고 맑은 산지인 특유의 가락과 율동의 순수한 찬양은 28회나 이어졌으며, 교회나 노회, 미션스쿨을 방문할 때마다 대환영을 받았으며, 건축헌금도 목표한 대로 이루어졌다. 1층은 주일학교, 2층은 예배당, 3층은 기도실로 설계된 교회는 1984년 10월 28일 신주현의 전 교회가 모여 종탑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 헌당예배를 드렸다. 수목이 우거진 산중턱에 화위안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십자가 종탑이 있는 교회의 경관은 당시 대만 전역 개혁종교회의 최초이며, 산지인교회의 자랑이었다. 보잘것없는 산지의 가난한 교인들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믿음을 증거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선교단체의 아름다운 연합: ‘장로교개혁종선교공의회’    
대만은 한국보다 20여 년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95%가 민간 토속신앙에 찌들어 있어 복음전파가 어려웠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관문지역이어서 일찍이 포르투갈, 화란, 일본 등 해양강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명나라 때 중국에 복속되어 대만성(臺灣省)이 되었고, 대륙이 공산화가 되면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옮겨오면서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가 통치하는 섬이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사역하던 많은 선교사와 선교단체들이 대만으로 건너오면서 다양한 교파의 교회가 생겨났다. 또 돈으로 교회당을 지어 주는 일이 신앙의 성장에 적잖은 장애가 되었다. 가장 큰 교단인 대만장로교회와 감리교 등이 자유주의 신학으로 선회하고 WCC에 가입하여 교회들이 영적으로 약화되었다. 

김영진 선교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성경중심의 생활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전파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사역 초기부터 ‘개혁신학연구반’을 시작으로 신학교육에 역점을 둔 인재양성에 힘썼다. 1963년 10월 25일 뜻을 같이한 선교사들이 타이베이(臺北)에 모여 함께 ‘장로교개혁파선교공의회(The Presbyterian Reformed Council)’를 조직하고 대만에 하나의 개혁종 교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뜻을 함께한 선교부는 ①한국 고신장로교회(KPC), ②미국 정통장로교회(OPC), ③미국 개혁장로교회(CRC), ④뉴질랜드 개혁장로교회(NRPC), ⑤미국 세계장로교회(WPC) 5개 교단 선교부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고백을 신조로 하고, 선교사가 연합하여 대만에 하나의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주사업은 신학교육 기관을 단일화하여 설립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헌법초안위원회’, ‘찬송가편집위원회’, ‘교회설립위원회’를 두고 활동하기로 하였다.

1966년 2월 7일 신주에서 김영진 선교사가 진행하던 개혁신학연구반과 CRC가 운영하던 타이베이의 ‘칼빈신학교’를 병합하여 ‘칼빈연합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이사장에는 R. Garffin, 교무주임에는 김영진 선교사가 선출되었다. 1966년 6월 신주 시내에 3층 건물을 임대하여 10월 4일 입학식을 거행하고 정규과정 6명, 연구생 5명, 청강생 4명으로 개강하였다. 3년 과정을 마치고 1968년 6월 24일 타이베이 홍언당(弘恩堂)교회에서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총 4명이 졸업하였으며, 그 후 3명이 목사안수를 받고 시무 중이다. 교수로 봉사한 분들은 선교사 8명과 현지인목사 4명이었다. 


찬송집 《신찬시가(新讚詩歌)》 발행
1967년 3월 ‘찬송가편찬위원회’는 대만교회에 알맞은 새 찬송가를 편집 발행하였다. 지금까지의 찬송가는 주로 대륙의 여러 찬송집이었고, 고전 악보로 되었거나 무곡인 찬송도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미국 개혁파의 ‘시편찬송집’, 정통 장로교의 ‘3.1성가집’, 한국의 ‘합동찬송가’ 등에서 발췌하여 350곡으로 편찬하였다. 책의 부록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10계명, 사도신경, 세례와 입교예식서, 성찬예식 등의 자료를 첨부하였다.

3기 선교사역(1970-75년) 

중리(中壢)교회와 중샤오(忠孝)의 개척
중리(中壢)교회는 타이베이와 신주의 중간 지역에 있는 신흥공업도시 중리시에 세워진 교회이다. 김영진 선교사가 설교로 섬기는 도원회(禱援會)라는 초교파 여성 선교단체가 고아원 봉사를 하던 중 고아원에서 기도회를 갖던 중 1970년 직원들과 함께 교회를 시작하였다. 원장의 교회 사유화로 인해 1974년 김영진 선교사에게 교회개척을 부탁하여 새롭게 중리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2년 동안 19명의 성도들이 세례를 받았다. 1976년부터 주동, 신주교회의 지원을 받아 아담한 교회당(中壢市 吉長街 34號)을 새로 지어 40여 명이 회집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다. 주동교회의 쩌우파셴지(鄒發憲機) 장로가 목회자로 섬기게 되었다. 후에 추발 장로는 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중샹(忠孝)교회는 1972년 12월 1일에 타이베이(松山區 虎林街)에서 전도소로 시작되었다. 김영진 선교사가 대만에 도착한 14년 만에 수도에 교회개척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칼빈연합신학교를 다니던 린푸라이(林福來)가 교회개척을 요청한 것이었다. 김영진 선교사는 건물을 임대하고 랴요주(寥祝)와 츠차이허(次採和) 두 사람을 사공위원(事工委員)으로 임명하고, 교회의 성장을 모색했다. 첫 사역자는 진정홍 전도사였다.1) 이후 1974년 대만에 도착한 유환준 선교사가 이 교회를 맡았다. 이후 1984년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대만 기독교개혁종장로회’ 노회조직 
1971년 3월 1일 신주의 민쭈루교회(民族路敎會)에서 5개 교회의 목사와 장로, 선교사들이 모여 노회 창립대회를 열고 ‘대만개혁종장로회’ 총노회를 발족하였다. 이후 2개의 노회로 분립하였다. 1974년 7월 8일 조직된 이후 운영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했다. 교역자의 인격과 자질, 대만인과 대륙인의 갈등, 선교사와 현지인 지도자와의 관계 문제, 미등록 전도소와 전도인의 거취 문제 등등이었다. 특히 칼빈연합신학교 졸업생들을 바로 안수하여 줌으로 교회개척을 할 수 있게 허용해 주느냐의 문제로 의견대립이 생겼다. 미국 개혁교회선교부는 이를 반대하고 미자립교회를 제외한 자신들이 관리하던 교회(13개)를 모아 제1구회(노회)를 조직하였다. 하는 수 없이 미국 정통장로교회와 한국 고신장로교는 나머지 교회들(11개)과 함께 제2구회(노회)를 조직하고 4명에게 목사안수를 하였다. 1978년 통계에 의하면 대만의 개혁주의 교회는 24개 처에 600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이 숫자는 대만 장로교단 중 두 번째이고 전체 54개 교파 중에서 열여덟 번째 순위였다.2)

유환준 선교사 파송과 현지선교부 조직
김영진 선교사는 많은 업무로 과로하여 1972년 피를 토하는 중병을 발견하고 수술을 받고 허약해지는 상황에서 본국 총회에 선교사 증파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가 도착한 16년 후인 1974년 1월 유환준 선교사가 부산노회의 후원으로 파송되어 수도 타이베이에 정착하였다. 고신 대만선교부가 조직되어 선교사역에 진일보하는 귀한 계기가 되었다. 유환준 선교사는 언어의 재능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다. 그는 1년 뒤부터 중국어로 설교하였다. 김영진 선교사의 3차 안식년과 2차 수술 등의 기간에 신학교와 노회에서 귀한 역할을 하면서 난강(南港)교회(1975년 6월 22일)와 타오위안(桃園)교회(1976년 4월 25일)를 개척하고 문서사역에 힘써 이후 7권의 성경 주석서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미주  
1) 오윤표, 《선교사 김영진》, “1982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선교부에서 관리하던 교회들(도표)” pp.134-135.
2) 위의 책, p137.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김한중 | 선교사, KPM 전 본부장, JMTI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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