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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2 통권 217호     필자 : 김종건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마테오 리치의 북경선교


고관들과 교류
마테오 리치는 북경(北京)에 정착하면서 중국 고위 관료들과 폭넓은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가장 먼저 예방한 내각대학사 심일관(沈一貫)은 그가 전한 유럽 풍속 중 특히 일부일처 혼인제도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부상서 이대(李戴)와 예부상서 풍기(馮琦)는 늘 마테오 리치와 내세의 복에 대하여 깊은 담론을 나누었다. 특히 풍기는 마테오 리치 일행의 북경 체류 비준과 지원금 지급에 앞장 섰다. 이 외에도 병부상서 소대형(蕭大亨), 예부시랑 양도빈(楊道賓), 곽정역(郭正域), 남경예부상서 왕충명(王忠銘)과 호부상서 장맹남(張孟男) 등과도 교류가 있었고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적응성 선교전략의 실천이었고, 이러한 전략에 근거한 성과는 이후 중국선교 활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서양 지리학 소개
마테오 리치의 적응성 선교전략 중에서 서방 지리학 지식의 소개는 중국에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만력 황제에게 올릴 예물로 유럽에서 처음 인쇄된 세계지도집인 《만국도지(萬國圖志)》를 포함시켰고, 이 지도를 통해 중국 황제가 중국보다 훨씬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기를 희망했다. 

북경에 머물게 된 마테오 리치가 세계지도를 제작하게 한 것은 ‘중국 천주교의 3대 주석(柱石)’의 하나로 불리게 되는 이지조(李之藻)였다. 이지조는 공부(工部)에 재직하면서 이미 명나라 15개 성(省)의 지도를 정확하게 그려낸 적이 있었으며 이것이 전체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지조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를 보고 나서는 바로 마테오 리치에게 지리 지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건의 아래 마테오 리치는 만력 29년(1601) 더 큰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 지도는 각 폭 69㎝⨉179㎝, 6폭 전체 면적 74,106㎠의 큰 지도였다. 〈곤여만국전도〉는 1602년 8〜9월 사이에 판각을 마쳤고, 마테오 리치가 서문을 지어 중국에 들어와 세계지도를 제작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이 지도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 온 이후 작업한 ① 조경판(肇慶版, 1584), ② 남창회사본(南昌繪寫本; 贈建安王繪寫本, 1595; 贈王佐繪寫本, 1596), ③ 남경판(南京版, 1600,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에 이은 세계지도의 총결판이라 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제작한 세계지도는 이지조가 감독하여 판각한 〈곤여만국전도〉 외에도 두 판본이 더 있었다. 하나는 각공(刻工)들이 만력 30〜35년(1602〜1607) 사이에 돈벌이를 위해 모방 제작한 것이었는데 각 폭은 원본보다 조금 작은 63.5㎝⨉171㎝였고, 바다를 남녹색(藍綠色), 각 대륙을 홍색, 갈색, 황색, 청색 등으로 구별하여 채색한 것이 특징이었다. 

다른 하나는 새로 입교한 이응시(李應試)에 의해 만력 31년(1603)에 북경에서 간행 판각된 더 커다란 8폭의 지도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였다. 그는 기존 두 개의 판본으로도 지도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가 없어서 원본을 수정 보완하여 만들었는데, 각 폭의 크기가 55.5㎝⨉198㎝이었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그려 보급한 세계지도는 개천설(蓋天說)에 갇혀 있던 중국 지식인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중국인들의 세계관 변화와 자극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따라서 지도 수요는 급증하게 되었고, 각 판본을 바탕으로 수많은 모사본이 제작되어 보급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수입되어 숙종 년간 모방 제작하여 채색한 지도가 제작 배포되었다. 





서양 지리학에 대한 기여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는 중국에 세계 지리에 대한 신지식을 전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새로운 지리 지식의 전파와 세계지도의 수정에 공헌하였다. 당시 유럽 지리학자들 사이에서는 키타이(契丹)와 중국(China)이 두 개의 서로 다르면서 인접해 있는 국가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마테오 리치는 새로 제작한 세계지도를 통해 ‘키타이(契丹)’가 바로 중국의 다른 이름임을 반영하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견해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였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요청에 따라 포르투갈 수사 벤토(鄂本篤, Bento de Goёs) 일행이 1603년 1월 6일 대상(隊商)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인도 라호르를 출발하여 카불, 사마르칸트, 야르칸드, 악수, 투르판, 하미 등의 도시를 거쳐 가욕관(嘉峪關)으로 들어왔고, 1605년(만력 33년)말 숙주(肅州, 지금의 주천(酒泉))에 도착하였다. 다음 해 11월 중순 마테오 리치가 벤토의 편지를 받은 후 바로 중국인 수사 종명례(鐘鳴禮)를 숙주로 보내었고, 만력 35년(1607년) 3월 말 종명례는 숙주에 도착하였는데 벤토는 병이 깊어 그를 만난 11일 뒤 세상을 떠났다. 종명례는 벤토와 동행하였던 아르메니아 사람을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왔다.1)

벤토의 탐험 과정과 그 결과를 서양의 기독교 세계에 전하기 위해 마테오 리치는 즉 ‘대키타이(大契丹)’가 바로 중국이며, 그 수도가 원나라의 수도이자 지금의 북경, 즉 당시 중국어로는 대도(大都), 몽고어로는 칸발릭(Khanbalik)임을 지적했다. 이 중대한 발견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1-1512)가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이 실제 인도가 아니었다고 증명한 것과 비견될 수 있으며, 근대 초기 유럽 지리학 역사에서 가장 의의 있는 양대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주   
1) 何高濟 等譯, 《利瑪竇中國札記》 下冊, pp. 542〜567.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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