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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여전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猖獗)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봄은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봄이 더 그리운 어느 늦은 저녁, 고쟁(古筝) 연주곡의 ‘渔舟唱晚’을 들으면서 노트북을 열었다. 웹진 <중국을주께로>에서 이번 호 특집인 ‘중국사역자가 읽어 주는 인생책’이라는 제목의 원고청탁을 받고 ‘나의 인생책’ 이야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내가 접하고 만났던 수많은 책들 가운데 내 인생책을 고르려고 하니 고민이 앞섰다.
퇴계(退溪) 선생은 약관(弱冠)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5만 권의 책을 독파하였고 나름의 학문 세계를 구축한 위대한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나는 지천명(知天命)을 훨씬 넘긴 나이 앞에서도 ‘인생책’ 한 권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과연 ‘나의 인생책은 무엇일까?’라는 물음 앞에 선뜻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직 내게 더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닐까? 그래, 주님의 은혜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약관도 되지 않은 푸르른 청춘의 시간 속에서 난 나의 인생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정하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중국 대륙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던 나날들, ‘중국 사랑’을 모토로 소수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소외된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헌신했던 시절들이 떠오른다.
머물던 집에서 열 시간 정도되는 거리를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두 시간쯤 전에 미리 기차에서 내린다.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자 함이다. 그래서 먼저 가까운 곳에 숙박시설을 찾아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 주님과 둘만의 시간을 갖고자 숙소 근처를 산책하기 시작한다.
조용하고 자그마한 도시였다. 도시 중심을 관통하는 시내가 있었다. 시냇가에서는 이른 새벽인데 동네 어르신들네로 북적거렸다. 집에서 키우는 새를 새장 채로 들고나와서 시냇가 주변 나무에 걸어 놓는다. 그러고서는 꽤나 가까운 친구들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과 함께 차를 마신다. 정말로 서로에게 정다운 이웃임을 확인하는 것 같은 눈 앞에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부지런한 아낙네들 또한 이른 아침부터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시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냇가 산책을 하면서 문뜩 즐겨 애송하던 두보(杜甫)의 시(詩) 중에 《江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다
그림 같은 이 황홀한 장면은 아직도 내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첫 번째 본국사역(Home Assignment) 기간 동안 대만에서 (중국어로)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서 동료들과 소수민족지역을 다니면서 사역을 할 때였다. 비자 문제로 홍콩을 자주 다녀오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전혀 수고스럽지 않았다. 어느 날 숙소를 제공해 준 홍콩 한인교회의 한 숙소에서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때마침 편한 마음으로 비자 문제를 해결하러 온 터라, 손에 잡힌 그 책을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읽다 보니 어떤 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내가 이 책과 이 책의 저자를 통해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를 잘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것과 중국의 현대 역사에 대해서도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후에 나는 이 분의 책을 가까이하며 이 책의 저자를 나의 스승으로 삼고 그의 가르침을 귀감(龜鑑)으로 삼았다. 내가 닮고 싶은 스승이 한 분 더 생긴 것이다.
나는 또 중국 학계의 라오쫑이(饶宗颐, 1917~2018년)와 함께 중국인의 정신적 스승이자 국학대사(国学大师)로 추앙되는 베이징(北京)대학교 전 부총장이었던 지셴린(季羡林, 1911~2009년)을 ‘난라오베이지(南饶北季)’라고 부르면서 두 분의 학문 세계를 선망(羨望)하였다. 지셴린이 운명을 달리한 2009년 7월 11일, 중국의 신문들은 그 기사를 일제히 1면 톱기사로 실었다. ‘国师走了! (나라의 스승님이 가셨다!)’ 제목을 달면서 안타까워하였다.
지셴린이 문화대혁명(1966~1976년) 기간 동안 겪었던 일들을 솔직 담백하게 쓰신 《우붕잡억(牛棚雜憶)》이 중국사역자인 내가 ‘인생책’으로 꼽는 책이다. 우붕잡억(牛棚雜億)이란 문화대혁명 때 지식인을 잡아가두고 이른바 '노동개조'를 시켰던 헛간(외양간)을 우붕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붕에 갇혔던 저자가 우붕 시절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낱낱이 드러내보이는 것이 이 책이다. 중국현대사를 살아온 이들의 기억 속 편린(片鱗)들 중에 지우고 싶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그 동란(動亂)의 시간들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그 후에 접한 또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 덩샤오핑(鄧小平)의 딸인 덩롱(邓榕)이 쓴 그리고 한국어로도 번역이 된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 이 책도 문화대혁명을 이해하는 데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를 눈물과 한숨으로 시간을 보냈던 한 지식인의 고백을 이해하기에 이 책 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큰 감동을 준 책이기도 하다.
《우붕잡억》의 저자인 지셴린은 1911년 산동(山東성)성 칭핑(清平)현에서 태어났다. 고전과 외국어에 매우 관심이 많아서 칭화(清华)대학교 서양학부에 진학하였다. 독일 괴팅겐(Göttingen)대학교에서 인도학(印度学)을 전공하였다. 10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45년 중국 대륙에 귀국해서 베이징대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된 뒤 동방학부를 만들고 평생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나라를 세우는 일을 했다.
정치가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던 동란의 시대를 살았던 한 지식인의 치열한 삶의 고백은 필자로 하여금 중국 지식인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갈망(渴望)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래서 나는 중국 지식인들의 문화와 세계에 대해 더욱 공부하고 싶었다. 이 같은 갈망은 중국 대륙에서 석·박사과정을 밟게 하였다.
중국을 배우고자 하는 태도로 천천히 조금씩 중국의 사회와 문화, 역사와 미술, 문학과 철학의 세계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한 자세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천 년 세월의 인류 문명의 정수(精粹)가 담겨 있는 중국 문화와 세계를 어찌 필부(匹夫)의 공부로 담을 수 있겠는가.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1976년에 끝이 났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흘러 1978년,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혁명에 참여했던 한 원로 간부와 만남을 가졌다. 지셴린은 그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대해 적절하게 표현하는 내용을 《우붕잡억》에서 목격할 수 있다.
“옛말에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 없다고 했지요,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선비를 죽일 수도 있고 욕보일 수도 있음을 증명해 주지 않았소?”
지셴린의 말처럼 동란의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욕보임을 당했지만 그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인들의 사유(思惟) 방식은 더 풍부해졌다. 이 책에서 지셴린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삶을 살아내야 하며, 이것이 삶의 행동 규범(規範)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필자 또한 그렇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이 갖는 힘과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는 마땅히 신앙 선배들의 사유 방식을 계승함과 아울러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하는 책무(責務)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전 세계와 특별히 중국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불뱀에게 물린 자들이 놋뱀을 쳐다본즉 살아난 것처럼,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계와 중국이 치유되어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시대로 회귀(回歸)하는 것 같다고 하는 지금의 시대, 그 땅의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한 분의 고백을 통해 이 험난한 시대를 이기는 힘을 얻기를 소망한다.
몇 글자의 경구(警句)로 ‘중국사역자가 읽어 주는 인생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道法基督 以得新力. 도와 법이 되신 그리스도, 이로써 새 힘을 얻자.
이광근 | GMS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