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비-내스토리우스.JPG)
네스토리우스, 어떤 인물인가? 2020년 새해 들어 연재를 시작한 이 ‘경교비 해설’의 첫 회에서는 600년대에 중국에 기독교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두 번째 회에서는 경교가 당나라 시절에 중국에 들어와서 번성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지난달에는 경교가 몰락하였다가 원나라 시절에 ‘야리가온’이라는 이름으로 소생한 사실에 대해 말하면서 경교가 한반도에 들어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오늘은 거슬러 올라가서 경교의 창시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 대해 살피려고 한다. 먼저 말해 둘 것은 교회사에는 또 한 사람의 네스토리우스가 등장하는데 이 네스토리우스는 3세기의 순교자로서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교의 창시자 네스토리우스는 4세기 말엽에 태어나 5세기에 활동했으며, 가톨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4세기 말에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시리아땅의 게르마니키아였고, 부모는 페르시아인으로서 농부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에서 공부를 했는데 테오도루스 주교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장로로 임명을 받았는데 안디옥 근처에 있는 성 유프레피우스수도원에 들어간 뒤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음성의 소유자로서 연설을 잘했으며, 아름다운 눈동자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428년 네스토리우스는 황제 데오도시우스2세로부터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초청을 받았다. 그때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은 매우 혼란했다. 주교의 자리를 둘러싼 대립이 심했고, 이단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단박멸에 힘썼다.
이단으로 몰려 추방되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 아나스타시우스라는 사제를 데리고 왔는데, 이 아나스타시우스가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지만 ‘신(神)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설교를 하였다. 사람들이 아나스타시우스를 비난할 때 네스토리우스는 그 사제(司祭)를 변호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로스(Kyrillos)가 네스토리우스를 제소했는데 키릴루스의 제소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경쟁심과 정치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제소를 받은 교황 게레스티누스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자기의 학설을 철회하고 현직에서 사임할 것을 요구했고, 431년에 열린 에베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의 교설은 갑론을박 끝에 이단으로 단정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배척을 받고, 해임과 추방이 결정되었다. 이 네스토리우스의 교설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필 예정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근처의 예전에 기거하던 수도원으로 추방되어 4년간 머물러 있다가 더 먼 곳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들고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옮겨졌다. 그는 그 이후에도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편지를 쓰며, 집필을 했다. 그는 450년을 전후해서 리비아의 사막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교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네스토리우스파가 형성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 확산되다 네스토리우스파는 7세기경, 페르시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 후에도 계속 남아 아라비아 북부, 인도, 몽골, 중국에 포교를 하였다. 지난 호에서 말한 것과 같이 네스토리우스파는 원나라 시절, 야리가온(也里可溫)으로 재기하여 13세기 후반에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크게 융성하였으나, 14세기에 이르러 티무르가 지배하면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거의 절멸하고 말았으며, 살아남은 일부도 16세기에 로마교회에 귀순했거나 라마승려로 옷을 바꿔 입었다.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나머지 일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를 배반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희생을 당했으며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극도로 미미해진 이 세력은 이라크 북부에 소수가 남아서 지하 네스토리우스파(派) 그리스도교로 숨어 살면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호에서 경교가 신라 때 유입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잠시 말했는데 여기에 필자의 가문과 관련된 일이 하나 있다. 중국 경교의 최고위 승려직인 대경승(大景僧) 려수암(呂秀巖=岩)의 후손인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려어매(呂禦梅)가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83)에 신라에 귀화(歸化)하여 전서(典書)가 되었다. 오늘 한국의 모든 려(呂)씨들은 려어매를 시조(始祖)로 하는데 필자의 가문이 종가(宗家)이다.
필자는 소년 시절에 경교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며 경교적인 예식도 경험했다. 이것이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려용덕 | 도봉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문학박사, 법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