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중국교회-바닥최종.jpg)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신종교 건립의 배경>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1) 예수의 인성(人性)과 그의 인격 2) 예수의 신성(神性)과 그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들 3) 예수의 사역 4) 예수의 가르침의 현실적 합성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3. 본색신학의 건설을 향해 1) 중국 문화 속에 기독교 신앙이 선재하여 있다는 입장: 진리의 동일성 2) 문화들의 조화와 융합을 모색하는 입장 3) 기독교가 중국 문화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해 준다는 입장 4)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는 중국 문화를 온전하게 할 것인가? 어째서 중국 문화는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는가? 5) 문화이원론(文化二元論): 네 번째 입장 6) 기독교가 문화를 심판한다: 다섯 번째 입장 4. 신학적인 공통 기반, 공통된 원칙
IV. 민족주의1): 반(反)기독교 운동에 미친 영향 금세기(20세기) 전에 중국은 자국을 중앙을 차지한 왕국 곧 ‘중국(中國)’, 자기 충족적이며 일체가 완비되어 있는 천하의 주인(天下共主)이라고 자부했다. 뼈 속 깊은 자민족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은 주변국에 대해 자국의 문명을 정통이며 우월한 것으로 여겼다. 중국은 중국인들이 야만인들이라고 경멸했던 외부 세계 사람들과 상업적이고 문화적인 교류를 하는 것에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교화의 대상(化外之民)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국’이라는 호칭에 숨어 있는 대로의 문화적 우월성의 이미지는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속에서 점점 의문시되었다. 중국은 불평등조약들을 통해 서양에 문을 열고 외국과 교역을 시작했으며, 서구의 학술사상과 과학기술이 점차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중외(中外)관계는 점점 악화되었으며 무력 충돌이 전개되면서 중국의 낙후성과 내부의 취약성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일단의 지식인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교 전통에 대한 서양의 도전을 점점 더 강하게 느꼈다. 그들은 중국이 더 이상 중국이라는 유서 깊은 호칭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은 이미 천하를 대표할 수 없는 단지 여러 국가들 중 한 국가일 뿐이며, 그나마 열국 중에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시급하게 떨치고 일어나 근대화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2)
근대화의 첫 번째 시기는 대략 19세기 중반 무렵에 일어났다. 이 단계는 일반적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 본체를 위해서는 중국의 학문을 그리고 적용을 위해서는 서양의 학문을 쓴다. “中學爲體, 西學爲用”)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중국의 학자-관료들은 서양인들의 과학적이고 군사적인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중국이 부강해지려면 반드시 그러한 방면에서 서양을 학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중국 문화의 어떤 정신적인 가치들은 서양의 그것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저명한 개혁가 장지동(張之洞, 1837-1909)은 이 단계의 근대화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중국의 전통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기를 희망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의 굴욕적인 패배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자각을 가져 왔다. 단순히 군사적이고 과학기술적인 장비만 갖추는 것으로는 침략적인 외국 세력에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전의 중체서용의 방법은 결코 실제적이지 않으므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 이론(이데올로기)과 조직(체제)의 각 방면에서 균등하게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정치이론과 사회조직에 관한 다양한 서양 이론이 소개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서적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지식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엄복(嚴復, 1853-1921)과 임서(林舒, 1852-1924)는 당대의 저명한 번역가들이었다.3)
불행하게도 1898년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에 의해 선도되었던 ‘백일유신(百日維新)’운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재앙과 같은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만주(淸) 정부의 지원을 받은 많은 유교보수주의자들은 전통 사회에 외부의 가치들이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지방의 향신(鄕紳, gentry)과 문인층(literati)들에 의해 선동된 반외세(反外勢) 소요들의 기초에는 고대의 유산을 수호하려는 열심이 있었다. 1900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의화단(義和團) 사변(事變)은 오랫동안 묵혀온 외국인 혐오 정서가 그 정점에서 표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장래에 관심을 가진 중국 지식인들을 다시 한 번 각성시켜 중국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정부 조직(체제)과 정책이 반드시 철저하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였다. 강유위 같은 개혁주의자가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모색했던 반면에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혁명을 일으키는 데 쏟아 부었다. 그 결과 1912년 청(淸)은 멸망하였으며, 민국(民國)이 건설되어 인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희망은 잠시 나타났다 곧 사라지고 말았다. 민국이 건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은 평화롭게 통일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며 사분오열되었다. 군벌(軍閥)들이 할거(割據)하여 신정부의 통치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신정부는 그 존립마저 위태로웠다. 공화국이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기 전 1916년에 원세개(袁世凱)는 왕정(王政)을 복고(復古)하였다. 그것은 전국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1915년 자신의 범(凡)아시아적 세력 팽창 욕망을 실현할 길을 찾고 있던 일본은 중국에 저 악명 높은 ‘21개조의 요구’를 제시하여 중국 영토와 권익을 점거하고자 하였다. 시대의 혼란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 지식인들은 민족의 구원이라는 시급한 문제에 직면해야만 했다. 1919년 5월 4일의 시위는 당시의 격양된 정서가 반영된 것이었다. 베르사유(Versailles)평화 협정에서 일본에로 산동(山東)에 대한 권한이양이 결정된 것에 대응하여, 국내의 청년 학생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애국주의를 표현하여 행동으로 옮겼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이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국제관계상에서 중국의 지위를 건립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민족의 존엄을 쟁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반(反)기독교운동은 바로 그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발생하였다. 우리가 그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과 당시의 민족주의운동과 하나로 연결해 보아야만 한다. 당시의 민족주의는 또한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었으며 그 형식과 내용이 아직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1. 반(反)기독교운동: 초기의 발전, 1922년과 1924년의 반기독교 활동들 1922년 반기독교운동이 폭발하는 도화선이 된 것은 그해 4월 ‘세계기독교학생동맹(WSCF, 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이 북경(北京) 근교의 청화(淸華)대학에서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첫 국제회의를 개최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이 집회를 준비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몇몇 당시 인기가 있었던 기독교 잡지들이 WSCF를 소개하는 특집호를 발행하였다. 전국기독교청년회의 대변지였던 《청년진보(靑年進步)》와 북경증도단(北京證道團)이 돕던 《생명월간(生命月刊)》은 모두 이러한 범세계적인 기독교 단체가 중국에서 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열렬하게 환영했다.4) WSCF의 기관지 《학생세계(學生世界)》는 같은 해 1월호에 중국교회의 상황과 미션계 학교들의 기독교 교육 사업에 대해 논한 중국 기독교인들의 논문들을 실었다. 이러한 모든 선전활동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비기독교학생동맹(非基督敎學生同盟)’을 조직했던 일군의 상해(上海) 학생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1922년 3월 9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강한 공격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WSCF의 죄상을 지적하는 선언문을 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였다.
우리는 세계기독교학생동맹에 반대한다. 우리는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세계기독교학생동맹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진정한 태도를 선언함으로써 대중들이 그것을 알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기독교와 기독교회는 역사상 수많은 죄악을 만들어 내었으며 수많은 범죄 행위를 저질러 왔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죄악을 만들고 있으며 만들려 하고 있다. 우리들 기개가 있고 양심이 있으며 타락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결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으며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5)
그 다음날 그들은 WSCF의 집회가 국립대학에서 열리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전보(電報)를 청화대학 학생들과 다른 여러 도시의 학생들에게 보냈다. 그것은 정치와 교육이 종교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함을 주장했다.6) 동시에 선전용으로 《우리는 왜 세계기독교학생동맹을 반대 하는가》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배부되었다.7)
그 운동은 그 후 북경으로 퍼져 갔고, ‘비종교대동맹(非宗敎大同盟)’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으며 범위 또한 더욱 넓어졌다. 3월 21일8) 동맹의 이름으로 종교의 해악은 “홍수나 사나운 짐승들”의 그것보다도 더 나쁘다고 비난하는 선언문이 나왔다. 거기에서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종교와 인류는 공존할 수 없다”고 말했다.9) 이 선언문에 70인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을 했는데 그중에는 여러 지식인 진영들의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종교를 반대하는 데 관여하고 있었다. 이 선언문을 이전의 것과 비교해보면 공산주의적 색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기독교를 공격하는 초점은 종교가 과학과 합치하지 않으며 사람의 도리(人道)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데 있었다.
예정된 대로 세계기독교학생동맹은 1922년 4월 4일에서 9일까지 청화대학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 회합은 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다양한 국적의 기독교도 학생들 사이의 영(靈)적인 연대(屬靈合一의 정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 정부의 총통 서세창(徐世昌)과 전임 총통 여원홍(黎元洪)이 회의에 참석한 외국학생 대표들을 환영하는 리셉션을 열어준 것은 회의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반기독교도들의 소동은 “회의에 어떠한 파문도” 거의 일으키지 못했다.10) 외국에서 온 129인과 중국의 635인으로 구성되었던 대표단들은 오색의 인종과 32개 국가를 대표했다.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에서도 모두 대표단을 파견했다. 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재건(Christ and Reconstruction)’이었다. WSCF의 설립자이자 회장이었던 Dr. John R. Mott가 말한 대로 대회의 목적은 “전 세계에 걸친 기독교도들의 영적 연대를 과시하고 강조하며, 함께 대표단들을 파견한 세력들이 지금 전 세계에 걸쳐 작동하고 있는 분열시키는 세력들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11)
회의에서 가장 많이 토론되고 주목받았던 주제는 기독교와 자본주의, 기독교와 전쟁, 두 가지였다. 대다수의 대표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쉽게 각종의 사회적인 문제들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마땅히 법률을 만들어 사회적 구조와 인민의 생활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구교회들은 그러한 체제의 잘못들을 못 본 체 묵인해왔으며 그러한 사회·제도적 문제를 바로잡지 못했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기독교화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전쟁의 문제에 관해서는 특별히 도덕적·종교적 원칙과 관련하여 격렬하게 토론되었다. 이는 국제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그 문제를 논의한 첫 번째 사례였다. 토론 중에 각 대표들은 하나의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하였으니 곧 세계의 모든 종족과 민족들은 모두 평등하며 마땅히 평화롭게 공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쟁과 전쟁을 도발하는 행위는 결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것들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각 민족의 책임이며 자신들의 의무라고 여겼다.12) 회의 중에 인도, 버마 그리고 실론 기독교학생연맹의 총간사(總幹事) A. A. Paul은 “우리는 서구 국가들이 침략 행위에 열중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또한 전쟁이 제거될 어떠한 전망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그러한 인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었다.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지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민하고 있다. 그들은 전쟁을 싫어하며 동시에 더 나은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13)
세계기독교학생동맹 회의의 마지막 날에 비종교대동맹(非宗敎大同盟)은 천여 명의 학생들을 북경(北京)대학에 모아 집회를 열었다.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李石曾)은 공개적으로 종교가 근대사회에서 이미 그 효용성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종교의 실패를 지적하고 또한 교육이 마땅히 종교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채원배(蔡元培)의 연설문이 낭독되었다. 반(反)종교 정서가 곧 폭발하려는 듯하였다.14)
한편 남(南)중국 일대의 반기독교활동은 광주(廣州)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왕정위(汪精衛)가 지도하였다. 비기독교학생동맹과 비종교대동맹의 호소에 호응하여 왕정위는 광주교육위원회(廣州敎育委員會)에 전문(電文)을 보내어 “광주시로부터 종교의 해독을 몰아내고 반기독교 운동에 첫 번째로 헌신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천명하였다.15) 그는 기독교는 단지 미신이요 편견일 따름이며, 그것의 오류는 반드시 폭로되어 민중들이 그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실로 국가의 근대 교육과 사회 재건 사업에 커다란 장애물이라는 것이다.16)
반기독교운동의 목소리가 매우 컸고 그에 가담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유지하지는 못했다. 1922년 말 비종교대동맹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으며, 비기독교학생동맹 또한 지난날의 기세를 잃고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였다.
1922년의 반기독교운동을 회고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혈기방강하고 격정적이었던 일부 학생들이 생각에 앞서 감정에 기초해 일으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배후의 선동가들은 학생들의 애국적 열성과 단순한 사상을 이용하여 반종교 풍조를 일으킴으로써 기독교회에 일대 타격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채택한 전략과 전술은 5·4운동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주요한 것은, 기독교가 반민족적이며 국가의 공적(公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전보, 선언문, 연설과 전단(傳單) 등 모두가 반종교의 정서를 도발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결코 행동을 취하기에 앞서 민중들이 “적(敵)인 기독교”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이 북경에 이르렀을 때 비평의 중점에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비기독교학생동맹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기독교를 공격하였지만 비종교대동맹은 종교 신앙이 과학과 민주(民主)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비교적 후기에 발표된 언설들에서 감정의 성분은 감소하였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상 종교의 문제를 사유(思惟)하기 시작했다. 종교를 압박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정 행사에 의지해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모든 소요들의 가치와 유용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였으며, 그리하여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느낌을 말로 표현하였다. 반기독교 운동은 점점 이론적인 단계에로 진입하여 갔다. 같은 해 7월 미국의 주중 대사(大使) Jacob J. Schurman은 “운동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17)
그렇지만 2년 후 우리는 비기독교학생동맹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원인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관련이 있었다. 20년대 초반 구국(救國)의 열망은 국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들의 야망에 의해 좌절되고 있었다. 군벌들은 상호 쟁패하였으며 인민들은 편안히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부에서는 여원홍이 1922년 여름, 봉천(奉天)의 군벌이었던 장작림(張作霖)을 패배시킨 후 다시 총통(總統)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총통직은 일 년 후에는 조곤(曹錕)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조씨는 뒤에 1924년의 2차 직예(直隸) 봉천전쟁 때에 다시 정권을 잃었다. 11월에는 단기서(段祺瑞)가 북경으로 돌아와 임시 행정수장(行政首長)을 맡았다.
남방에서는 손중산(孫中山, 孫文) 정권이 진형명(陳炯明)을 비롯한 군정요원(軍政要員)들의 반항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1923년 2월 손중산은 다시 광주에서 군사 정부를 재건하였으며 대원수(大元帥)의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산동 문제에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던 파리평화회의의 결렬과 9대 강국들이 워싱턴회의18)에서 맺은 조약의 불이행은 손중산에게 서구 세력들은 믿을 수 없으며 중국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들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다. 손중산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에로 눈을 돌렸다. 소비에트는 불평등조약들을 취소하겠다는 우호적인 제안을 하였으며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국민당 정부의 재건을 도왔다. 소비에트 조언자들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재조직되었으며, 중국공산주의자들이 개인자격으로 입당 신청하는 것을 허용하였다.19) 1924년 1월 광주에서 열린 국민당의 제1차 전국대회에서는 ‘연아용공(聯俄容共, 러시아와 연합하고 공산당을 용납한다)’정책을 채택하였으며, 또한 당의 정치적 목적이 제국주의와 군벌주의라고 하는 적들을 다루고자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천명하였다.20)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이 1921년 7월 남방에서는 진독수(陳獨秀), 북방에서는 이대조(李大釗)의 지도 아래 형성되었다. 그들이 제창한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은 중국의 낡은 전통과 외국의 지배를 털어버리고자 하였던 중국의 급진주의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진독수는 국내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들이 장차 혁명의 주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이대조는 농민들을 중시하였으며, 그들이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21) 공산주의 정책들의 수행에 대한 진독수와 이대조 사이의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와 군벌주의에 대한 그들의 명확한 입장은 비록 소비에트 관리들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국민당과의 일시적인 연합을 위한 공동의 바탕이 되었다. 이제 국민당 내부에 공산주의자 집단이 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공산주의자 집단의 영향력은 제국주의와의 전투 계획들에서 쉽게 알 수 있다.22)
새로운 혁명군을 조직하여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고자 손중산은 황포군사학교(黃埔軍士學校)를 열었으며 그곳에서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장개석(蔣介石)이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왕정위(汪精衛)와 호한민(胡漢民) 등이 정치 교관이었다. 정치교육부의 부부장(副部長)은 주은래(周恩來)였으며, 선전부 부장은 대계도(戴季陶)였다. 군사 사관후보생들의 훈련에는 철저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포함되었다. 그를 통해 후보생들은 많은 종류의 문헌들에 노출되었다. 삼민주의(三民主義), 계급투쟁이론, 제국주의 그리고 기독교 등이 그 주제들의 일부였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상해와 광주에서 발행되던 당의 기관지인 《민국일보(民國日報)》에 실렸다. 그것의 부록인 《각오(覺悟)》는 기독교 비판에서 가장 목청을 돋우던 기관지였다. 진독수와 채화삼(蔡和森)이 편집하던 공산당 주간지 《향도(嚮導)》도 유사한 입장을 취하여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의 유폐에 대해 적극 반대하였다.23) 이러한 정치적 선전활동은 1924년 국민당(國民黨)에 의해 광주와 북경에서 각각 반제국주의대동맹(反帝國主義大同盟)이 설립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24)
당시 정치적 국면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비기독교동맹은 1924년 여름, 몇몇 국민당 지도자들의 후원 아래 다시 활력을 얻어 비기독교대동맹(非基督敎大同盟)이라 칭해졌다. 8월 13일 상해에서 거행된 한 집회에서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의 위원이었던 오치휘(吳稚暉)는 연설을 하는 중에 기독교의 미래는 “최대한도로 휘어진 활”과 같다고 비판하였다.25) 기독교는 단적으로 “제국주의의 선봉대”라고 선언되었다. 비기독교대동맹의 귀환은 바로 한 달 전에 설립된 반제국주의대동맹의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었다.26)
1924년에 발생한 반기독교 활동들은 비기독교대동맹이 전국을 걸친 대규모의 시위를 계획하였던 크리스마스 주간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광주, 장사(長沙), 한구(漢口)와 같은 대도시들이 모두 소요에 휩싸였다.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주구(走狗)’이며 ‘문화 침략의 도구’라는 벽보들이 게시되었으며, 교회학교들은 ‘외국인들의 노예들’을 길러내는 곳이라 매도되었다. 이러한 모든 반종교 선전활동의 본질은 당시 매우 환영받았던 한 편의 광고전단에 쓰여 진 다음과 같은 말에 매우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번에 기독교를 공격하는 운동은 천하(天下)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이다. 우리는 모두 기독교가 인민들을 이전보다 더욱 무지하게 만드는 가장 미신적이고 모호한 종교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제국주의 문화의 종교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27)
2.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공격 세계기독교학생동맹에 대해 반기독교 인사들이 취한 행동들은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민족주의 정서가 분출된 것이었다. 1922년의 가장 대표적인 반기독교 출판물은 비기독교학생동맹에 대해 다룬 《선구(先驅)》 특집호였다. 이 특집호에는 적광(赤光), 기원(綺園), 노숙(盧淑) 등 그 이력을 명확하게 알기 어려운 인물들의 매우 선동적인 글들이 실렸다. 그 외에 또한 동맹의 선언문, 전보(電報) 그리고 연맹의 강령 등이 실렸다. 이 격주간 잡지는 일찍이 공산주의 사상의 입장에서 기독교(종교)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들을 발표하고는 하였다.28)
비기독교학생동맹의 선언문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의 주요한 전제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개념을 사용하여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 구조를 비평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사회 체제가 자본주의의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와 같은 자본주의적 사회 체제에서는 한편에는 일하지 않고 먹는 유산(有産, 부르주아지) 계급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일을 하지만 먹을 수 없는 무산(無産,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한편에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이 있는 것이다.29)
선언문에 따르면 유산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목표는 그것을 유산계급으로부터 회수하는 데에 있다.30) 그리고 계급투쟁은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현재의 세계질서를 변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각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단결하고 협력하여야 한다.31)
선언문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는 이미 성숙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모든 나라의 자본가들은 -영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일본에서든 그리고 프랑스에서든- 그들의 미래에 대해 절망적인 두려움에 빠져 있으며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둘씩 중국으로 모여들었으며 경제적 침략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외국 시장을 둘러싼 다툼과 식민주의의 팽창은 임박한 자본주의 몰락의 전주곡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원인을 규명해 보면 그것은 결국 시장과 산업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침략함으로써 초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회들은 그러한 침략행위를 승인하였으며 결코 어떠한 반대도 제출하지 않았다.32)
비판과 공격의 목소리를 내면서 그들은 기독교를 자본주의와 연결시켰으며, 동시에 적지 않은 비방의 소리가 기독교와 기독교회들 위에 더해졌다. 자본가들은 선교사들을 침략의 선봉부대로 이용하기 위해 해외선교 사업을 도왔으며, 선교사들은 다시 중국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하여 중국 인민들이 자본주의의 이론을 받아들이도록 유혹하였다는 것이다. 한 작가는 “그들 침략군의 선봉이 되도록 자본주의자들 혹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외국선교사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33) 진독수도 또한 “무수한 선교사들 모두가 생산에 종사하지 않은 유민(遊民)이면서, 오히려 생산하는 노동자로 하여금 자본가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날마다 자본가들을 향해 꼬리치면서 구걸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도 없으며, 재산이 없는 신생 교회는 더욱 심하다.”라고 말했다.34) 또한 본토의 기독교 목사와 전도자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속이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흥성하는 곳에서는 기독교도 번영하니 이는 기독교회가 자본주의자들의 소망에 자신을 맞추기 때문이다. 청년회(YMCA)는 “자본주의자들의 충성스러운 앞잡이(走狗)”이며, 세계기독교학생동맹이 중국에서 회의를 여는 목적은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공고하게 하는” 데 있다.35) 은행들과 산업체들 그리고 교육기관들을 소유한 교회의 경제적인 힘은 착취하는 권력이 되고 있으며 교회의 활동은 일종의 정치경제상의 침략행위이다.
비기독교학생동맹의 통신 중에서 기독교는 식민화의 선구로서 외국의 외교관들과 상인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사복음서(四福音書)는 부(金)와 힘(鐵)의 위세를 옆에 끼고서 동양에 왔다. 황금과 강철은 물질로 우리를 노예화하였으며, 복음은 정신으로 우리를 노예화하였다. 문물이 흥성하였던 동양과 서양이 모두 변하여 예수교화하고 자본주의화하여 다시 맑고 편안한 기운이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36) 또 한사람의 작자였던 노숙(盧淑)이 또한 그의 글에서 말한 대로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항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기독교를 반대해야 하며,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자들을 전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기독교를, 특히 저 시끄러운 세계기독교학생동맹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37)
기독교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노선은 역사상 기독교회가 범한 실책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비평가들은 기독교가 언제나 억압 계급에 의해 이용당하여 허다한 불공평과 착취와 노예제도를 지지해 왔으며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기독교회는 초기 로마와 중세 봉건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특권층과 권력층에 영합하고 있다.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혼”이며 “자본가 계급의 녹음기”이다.38) 이러한 종류의 부정적인 언급은 기독 종교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고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인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바로 기원(綺園)이 말한 바와 같이 “사회적 진보의 원리는 우리의 종사(宗師)인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고안된 사적유물론에 의해 이미 충분히 확인되었다.”는 것이다.39) 여기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구속사(救贖史)는 세계 구원과 유토피아에 대한 공산주의의 이상과 약속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기독교(종교)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고발은 그것이 인민의 아편이라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는 “인간 정신을 억압하는 족쇄이며, 인간 사유를 방해하는 장애물이고,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수단”40)이라는 것이다. 인간 영혼과 신체에 대한 그것의 파괴적 영향력은 사회 진보를 되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중국이 국가적 위기에 처해있으며 인민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 가운데, 국가의 재건과 민족의 갱신을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은 기독교와 그 인민들을 기만하는 일체의 조직들을 철저하게 타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적광(赤光)은 주장하였다.41) 만약 인민들을 위해 최대의 행복(이익)을 찾기 원한다면 공산주의를 제창하고 기독교의 발전은 억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를 공격하는 다방면의 논조들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24년 다시 한 번 출현하였다. 여전히 공격적인 어조를 띄었지만 이전에 비해 좀 더 이지적이고 정제된 언어가 사용되었다. 이전의 감정적 호소는 그들의 비판을 입증해 줄 좀 더 역사적인 증거들에 의해 약화되거나 대체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반기독교 출판물은 네 편의 중상 모략적 에세이들로 구성된 《반대기독교운동(反對基督敎運動)》이라는 제목의 소책자였다.42) 자세하게 관찰하여 보면 2년 전의 반자본주의의 논조가 이제는 반제국주의로 이미 바뀌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22년의 비기독교학생동맹선언 중에는 ‘제국주의’라는 단어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4년의 문서들에서는 그것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였다. 이것은 명백하게 공산주의 이론들, 특히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점차 대중화가 된 때문이다. 반제국주의대동맹의 선전 활동들은 당연히 이러한 의식 형태의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동맹의 목적은 이중적이었다. 즉 첫째, 이전에 외국세력들과 체결한 모든 불평등 조약들을 폐기하는 것, 둘째, 세계 각국의 모든 피억압 민족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이 그것이다.43) 이러한 동기는 비기독교대동맹이 출간한 글들 속에서 모두 명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1924년 비기독교대동맹의 새로운 선언문에서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허위적인 평화 관념’과 ‘허위적인 행복 관념’, ‘신정론(神定論)에 관한 실제적이지 못한 견해’를 설교하고 있는 것으로 지목되었다.44) “동일한 악들이 다양한 종교들에 의해 가르쳐 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강력한 조직과 더 깊고 더 해로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기독교에 반대해야 한다.”라고 주장되었다.45) 선언문은 계속해서 역사가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는 항상 사회의 특권 계급과 결탁하여 왔으며,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자 자본가들은 기독교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가난을 받아들이도록 그리고 농부들이 부유한 계급의 착취를 신의 뜻이요 성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이도록 속이고, 그들이 떨치고 일어나 현재의 사회제도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마취시키는 도구로 이용하였다고 말했다. 선언은 또한 외국 열강들이 중국을 식민화하려는 계획 중에 중국인들로 하여금 “함대와 군대들이 오는 것은 교육과 문명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선물을 주기 위한 것이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복당한 인민들은 그들의 자비와 선함에 대해 반역을 생각하지 말고 영원히 감사해야 한다.”고 믿도록 하기 위해 기독교 선교 사업을 이용해 왔다고 비판하였다.46) 이러한 행위는 곧 종교를 이용하여 정치적 동기를 은폐하는 것으로서 바로 비기독교대동맹이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기독교와 제국주의 사이의 결연을 증명하기 위해 반기독교 인사들은 근대 중국과 외국 사이의 관계사 속에서 증거들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비기독교대동맹이 창립회의를 하던 그날 오치휘는 자신이 행한 연설에서47) 기독교가 중국에서 곧 와해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는 서구에서 이미 소멸될 위기에 처하였으므로 선교사를 동쪽으로 보내 중국에서 남은 숨을 연장할 기회를 찾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교사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운용하여 먼저 널리 중국인들을 모아 선교하고, 그 다음에 그 중국인 신자들이 자신들을 대신해 침략주의를 전파하도록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이러한 위선과 속임수는 반드시 폭로되어 민중들이 더 이상 그들에게 우롱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분발하여 노력하는 인재이다. 만약 이들 용렬하고 망상에 빠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용납한다면 어떻게 우리 사회가 진보하고 진전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중국이 언제 강해질 수 있겠는가?”48)
기독교 해외선교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춘번(李春蕃)은 선교사들과 중국을 침략한 자들 사이의 밀접한 협력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교와 제국주의(傳敎與帝國主義)〉라는 글에서 그는 과거 외국인들이 기독교를 수단으로 삼아 중국을 침략한 사례들을 열거하였다.49) 예를 들어 광서(光緖) 시대에 독일은 산동 조주(曹州)에서 두 명의 독일선교사들이 살해당한 것을 기회로 삼아 함대를 파병하여 교주만(膠州灣)을 점거하였으며, 청도(靑島)에 대한 99년간의 조차권과 산동의 철도와 광산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얻었다. 많은 교안(敎案, 분쟁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는데 대부분 내지(內地)선교사들이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 정치에 부당하게 간섭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들이었으며, 총리아문(總理衙門)은 외국 사절들의 항의를 두려워하여 양보하기 일쑤였다. 이춘번은 또한 의화단의 난은 불행하게도 불명예와 심한 보상금을 물어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반외세주의가 표출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선교와 제국주의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바람과 말과 소처럼 서로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라고 질문하였다.50)
한편 〈기독교와 중국(基督敎與中國)〉이라는 이름의 글에서 매전룡(梅電龍)은 기독교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침략자라고 고발했다.51) 그것은 19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외교상의 실패들이 기독교의 성장세와 직접적으로 비례적인 관계에 있다는 자신의 관찰에 기초한 것이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2백여 년간에는 기독교는 중국에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구통상(五口通商) 이후 기독교 세력은 날로 성장해 갔으니, 만약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의해 지지되지 않았다면 중국에서의 기독교 점유의 진보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불평등조약들은 ‘침략과 기독교 사이의 분리 불가능한 혼인관계’를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52)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그들의 선교사들의 보호와 자유를 보호한다는 보증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1858년의 중영(中英) 조약 내에는 “예수교와 천주교는 원래 선(善)을 실천하는 도(道)로서, 사람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대접한다. 이후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보호받아야 한다. 그들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 중국 관리들은 결코 그들은 가혹하게 대하거나 금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 있다. 중국과 프랑스(中法)의 조약에는 또한 “내지에 들어가 선교하는 모든 이들에 대해 지방 관리들은 반드시 후대하고 보호하여야 한다. 중국인으로서 천주교를 신앙하는 사람이 법규를 잘 지킨다면 절대로 조사하거나 금지해서는 안 되며, 징벌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53) 조약의 보호 아래에서 선교(宣敎)와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외국인들이 각 성(省)에서 조전매지(租田賣地: 토지를 임대하거나 매매하는 행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선교 사업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본다면 기독교와 제국주의의 제휴와 합작은 “쌍방이 보조를 맞추어 일치불란(一致不亂)한 것이었다.”54)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를 반대한 인물들이 기독교를 공격한 주요 노선을 알 수 있었다. 1920년대 대부분의 반기독교 저작들은 기독교와 제국주의가 추악한 맹약을 맺어 국가의 존엄과 운명에 위해를 끼쳤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1925년에 폭발한 ‘오삼십사건(五三十慘案)’에서 가장 격렬하였다.
미주 1) (역주) 영어본의 ‘nationalism’에 대해 중국어본에는 ‘국가주의(國家主義)’를 사용했으며, 그에 따라 앞에서는 ‘국가주의’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국가주의’는 ‘국가중심주의’가 아니라 애국주의(愛國主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다시 ‘민족주의’로 번역하기로 한다. 2) Levenson, Confucius China, pp.98-100. 참고. 3) Benjamin I. Schwartz, In Search of Wealth and Fower: Yenfu and the West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참고. 4) 《靑年進步》 제50책(1922년 2월) 그리고 《生命月刊》 제2권 제7기(1922년 3월)는 세계기독교학생동맹 회의의 개략을 소개하는 특집을 실었다. 5) 《宗敎思潮》(《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187-188.를 보라. 6) 이 전보에 대해서는 《評非基督敎言論》(《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22.를 보라. 7) 非基督敎學生同盟에 속한 이들 학생들에 대한 인물정보를 수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왔다. 張欽士(C. S. Chang)는 《敎務雜誌》에 실린 그의 글 "The Anti-Religion Movement"(The Chinese Recorder 54, 1923년 8월)에서 이 학생 그룹의 정체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上海에 있었던 소규모의 볼셰비키 학생 그룹이 이 특별호를 읽고 그들 그룹의 유일한 기독교인 회원을 몰아냈으며, 비기독교학생동맹의 선언문을 썼다.”라고 하였다. 이 특별호는 1922년 2월에 발간된 《靑年進步》였다. 張亦鏡은 그 전보와 선언문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평하면서 이들 학생들이 중국공산당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보가 보내진 5일 후에 上海의 사회주의청년연합에 의해 격주로 발간되었던 《先驅》는 비기독교학생동맹 특별호를 내었으며, 거기에는 동맹의 선언문과 규약이 실렸다. 또한 Yip Ka-che, "The Anti-Christian Movement in China, 1922-1927,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xperience of The Protestant missions" (Ph. D.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1971), pp.98-102.에서의 논의를 참조하라. 8) (역주) 중국어본에는 3월 20일로 되어 있다. 9)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193. 10) "Welding the Christian World Spirit", The Chinese Recorder 53 (1922년 5월). p.319.을 보라. 11) Ibid. 12) "Reports and Findings of Open Forum Discussions of the Eleventh Conference of WSCF", pp.26-27. Kiang Wen-han, The Chinese Student Movement, p.64.에서 재인용. 13) "Welding the Christian World Spirit", p.324.을 보라. 14) 《評非基督敎言論》(《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143-145: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201-206. 15) 汪精衛의 전보에 대해서는 《眞光雜誌》 21.10-11(1922년 6월). p.42.를 보라. 16) 汪精衛, 〈力斥耶敎三大謬〉,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87-88; 〈宗敎毒民論〉,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118-120. 17) Yip Ka-che, "The Anti-Christian Movement in China, 1922-1927,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xperience of The Protestant missions",p.123.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 18) 워싱턴회의는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렸으며 극동지역과 외교적 관계를 가지고 있던 9개의 강대국이 참석하였다. 그것은 파리평화회의에서 마무리 짓지 못했던 사업을 다루고자 하는 목적으로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후원되었다. 19) Immanuel C. Y. Hsu, The Rise of Modern China, 2n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pp.623-629.를 참고하라. 20) 鄒魯 編, 《中國國民黨史稿》 (增訂版 1947, 臺北 1965), pp.378-388.에 실려 있는 국민당 대회의 선언문을 참고하라. 21) Maurice Meisner, Li Ta-chao and the Origins of Chinese Marx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pp.239-242.을 참고하라. 22) C. Martin Wilbur and Julie Lien-ying How, eds., Documents on Communism, Nationalism, and Soviet Advisers in China, 1918-1927 (New York, 1956), pp.146-149.을 참고하라. 23) 謝扶雅(N.Z.Zia), 〈近年非宗敎和非基督敎運動槪述〉, 《中華基督敎會年鑑》(1925), pp.17-24. 24) 鄒魯 編, 《中國國民黨史稿》, pp.130-132. 25) 吳稚暉, 〈强拏之末的基督敎〉, 《覺悟》 (1924년 8월 19일) pp.2-4. 26) 李榮芳, 〈非基督敎運動〉, 《眞理週刊》 제2권 제45기 (1925년 2월 2일). 27) "The Anti-Christian Movement" (editorial), The Chinese Recorder 56 (1925년 2월), p71.을 보라. 28) 《先驅》 제4기 (1922년 3월 15일)를 참고하라. 어떤 글들은 《評非基督敎言論》(《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에 다시 실렸다. 29) 〈非基督敎學生同盟宣言〉,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187-188. 30) 梁均黙, 〈批評盧淑的基督敎與資本主義〉,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67. 31) 張亦鏡, 〈批評赤光的基督敎與世界改造〉, pp.54-55. 32) Ibid., p.54.에서의 赤光의 견해를 보라. 33) 梁均黙, 〈批評綺園的基督敎與共産主義〉, p.76.을 참고하라. 34) 張亦鏡, 〈與陳獨秀先生說‘基督敎與基督敎會’〉, p.208.에서 인용된 것. 원문은 陳獨秀, 〈基督敎與基督敎會〉, 《宗敎思潮》, p.192.를 보라. 35) 張亦鏡, 〈批評赤光的基督敎與世界改造〉, p.55. 36) 《評非基督敎言論》(《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22.를 보라. 37) Ibid., p.67. 38) Ibid., p.66. 또한 張亦鏡, 〈與陳獨秀先生說‘基督敎與基督敎會’〉, p.208.도 보라. 39) 《評非基督敎言論》(《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75. 40) Ibid., p.74. 41) Ibid., p.139. 42) 이 책은 1924년 12월 초에 출판되었다. 네 편의 글은 다음과 같다. 李春蕃, 〈傳敎與帝國主義〉(원래 《覺悟》 1924년 8월 19일.에 수록), 梅電龍, 〈基督敎與中國〉(1927.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387-394.에 재수록), 蔡和森, 〈現代的基督敎〉, 朱執信, 〈耶穌是什麽東西?〉(1929년 華東書局에서 책으로 다시 출간). 43) 應元道, 〈近五年來中國基督敎思想之時代背景和其內容之大槪〉, p.4. 44)〈非基督敎大同盟宣言〉, 《覺悟》 (1924년 8월 19일).를 보라 45) Ibid. 46) Ibid., p.2. 47) 吳稚暉, 〈强拏之末的基督敎〉, p.3. 48) Ibid. 49) 李春蕃, 〈傳敎與帝國主義〉, 《覺悟》(1924년 8월 19일). 50) Ibid. 51) 梅電龍, 〈基督敎與中國〉, 《宗敎思潮》(《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388-390. 52) Ibid., p.391. 53) Ibid., pp.391-393. 54) Ibid., p.394.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