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통신-드라이브인-최종.JPG) 무거움에서 아픔으로 <중주>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대부분의 국내 교회들은 몇 주째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영상 예배를 비롯하여 여러 방법으로 예배당 예배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3월 마지막 주일에는 학교운동장에서 인도자들은 구령대에서 예배를 진행하고, 교인들은 차에 탄 채 FM 주파수를 맞춘 카라디오를 통해 예배를 드리는 ‘드라이브인 예배’도 등장했다고 합니다.
제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매주 60명쯤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인데 별다른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아 처음 두어 주간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는 예배 시간에 집에서 혼자 경청(敬聽)기도를 하며 보냈습니다. 보통 관상기도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저는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기에 힘쓴다는 뜻으로 경청기도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애를 써서 지난 주일에는 카카오톡을 이용하여 유튜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예배 대신 영상 예배 등의 대안이 있는 것은 참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지만 교회의 본질은 모이는 데 있고 예배는 모여서 드려야 하는 법입니다. ‘교회(敎會)’라는 말의 뒷 글자는 분명히 ‘모일 회’자입니다. 교회의 헬라어 ‘에클라시아’는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습니다(행 2:43∼47).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는 예배, 선교, 교육, 봉사와 더불어 교회의 기본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상 등으로도 얼마든지 예배 드릴 수 있지 않느냐? 왜 그렇게 예배당 예배에 대한 미련이 강하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것 하나입니다. ‘무식한 소리 그만하세요!’
마스크 때문에 모두 답답하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답답하고, 늘 마스크를 쓰고 있자니 답답합니다. 예배당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은 마스크를 쓰고 호흡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마스크도 벗어던지고 예배당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답답함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예배당 예배를 드리지 못해 안타까워하다가 문득 중국의 성도들이 생각났습니다. 여러 채널을 통해 중국에서는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예배가 금지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을 때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정도였는데 예배당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처지가 되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이 심하게 아파왔습니다. ‘중국 성도들의 대부분은 영상 예배를 드릴 형편도 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면서 말입니다. “주님, 예배당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일을 통해 사랑하는 중국 성도들이 겪는 고난을 아주 조금이나마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중국 성도들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게 하시고, 이 어려움이 너무 오래 계속되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요즘 드리고 있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오바댜서를 다시 읽는다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마음속에 여러 질문이 떠올랐는데 지금까지 계속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는 법인데 코로나19 사태를 겪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코로나19가 일찍 발생한 나라인데 그래서 처음에는 <우한 폐렴>이라고 했는데, 시진핑 정권의 기독교 탄압과 코로나19는 정말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한국은 유례 없이 양극화 진영논리에 휩싸여 갈등과 마찰이 계속 폭발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과 코로나19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한국의 공직자들이 교회에 대해 행정명령, 폐쇄, 이런 말들을 너무 가볍게 쓰고 있는데 그들의 다급한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런 말을 쓰면서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이 없었나? 그리고 교회의 자율성과 권위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미 오래 전에 팬데믹이 선포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이 세계적인 대재앙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직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 교만했다!’ 하는 것입니다. 중국도 교만했고, 한국도 교만했고, 세계도 교만했습니다. 중국은 여러 말에 ‘굴기(崛起)’를 붙이며 G-2의 위상을 뽐냈습니다.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하나임을 뽐냈습니다. 세계는 풍요와 IT과학을 뽐냈습니다. 이것과 코로나19와는 관계가 없을까요? <중주> 가족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Yuri A. Gagarin)이 보스토크(Vostok) 1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비행을 했습니다. 그때 교회는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사람의 손길이 닿았으니 말입니다. 소련은 이 우주비행을 무신론 교육에 활용했습니다.

‘우주 비행사가 우주를 돌면서 하나님께 면회신청을 했으나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아 하나님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지요.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이 이마에 손을 대고 사방을 둘러보며 하나님을 찾는 그림을 널리 퍼뜨렸는데 혹시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1990년대에 담임하고 있던 교회에서 러시아 남부지역에 교회를 여럿 세운 관계로 러시아를 종종 방문했는데, 모스크바국제공항에서 국내공항으로 가는 길목의 도심지에 크게 내걸려 있는 그 그림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때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이 12소선지서 가운데 하나인 오바댜서입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옵 1:3∼4)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가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 교만에 젖어 있다가 코로나19라는 그물에 걸려 끌려내림을 당한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한국이, 세계가, 무엇보다도 중국이 ‘겸손’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참고로 유리 가가린은 우주비행 후 국제적 영웅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소련 최고회의 의원이 되었고 대령으로 승진했으나 1968년 전투기 추락사고로 사망했음을 덧붙입니다.
부활의 달입니다. 올해의 부활절은 다른 때보다 더 깊은 교훈을 우리에게 줄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호에는 ‘중국선교사 재배치 후의 사역 이야기’라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재배치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다시 말해 재배치가 시작된 이야기, 사역지 탐구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재배치된 지역의 필연성 등을 다루었습니다. 재배치되어 새로운 사역지에서 일하게 된 선교사님들 그리고 더욱 엄중해진 상황 속의 중국을 지키고 있는 선교사님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승리하세요!
사진 출처 | 바이두 유관지 | 중국어문선교회 고문 겸 웹진〈중국을주께로〉 발행인. 용산감리교회 원로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