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까?”
중국 가정교회의 구원론 문제
왕쓰웨
굳은 표정과 답답한 분위기
S지역 쩡(鄭) 형제 그룹 가정교회에서의 지도자 훈련은 총 16명이 참석하였다. 이들 참석자들은 모두 인근 지역 가정교회에서 소위 ‘강대상에 서는 자(站講台的)’라고 일컫는 설교자들이거나 목양을 담당하는 목회자들이다. 그들은 지도자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비좁고 침침한 두 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나지막한 나무의자에 앉아 손위에 성경을 받치고 열심히 노트필기를 했다. 항상 그렇지만, 지도자 훈련이 시작되는 시간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긴장하며 얼굴표정이 굳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참석자들은 서로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배우는 자들이 가르치는 선생으로부터 지식과 말씀의 공급을 받은 후 유익하다고 생각되고, 또 보안문제가 안전궤도에 들어섰다고 판단될 때는 얼굴 표정도 밝아지고 분위기도 가족처럼 변한다. 비록 강의시간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휴식시간이나 식사시간만은 서로 스스럼없이 교제하고 웃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삼일이 지나도 참석자들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있고, 휴식시간이나 식사시간에도 최소한의 말만하고 서로 별 말없이 웃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나는 이런 답답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바꾸어 보려고 강의 도중에 간간이 농담을 하였지만 그들은 짧게 웃거나 코웃음만 지어냈다. 또 휴식시간과 식사시간에도 나는 솔선해서 우호적으로 말을 건네고 접근을 해서 교제를 많이 하려 하였지만, 그들은 선생인 나의 말에 예의상 짧게 대답하거나 필요한 말만 하였다. 분명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이 없었다.
“우리는 원래 이렇습니다”
3일 째 강의가 끝난 저녁 잠자기 전에, 나는 S지역 총책임자인 쩡 형제에게 그 이유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 강의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교회에 어떤 어려움과 우환이 있는지? 또 참석한 지도자들끼리 무슨 문제와 갈등이 있는지? 쩡 형제는 이 질문에 거북스러워하면서 내가 걱정할까봐 나의 강의 부분은 문제가 없다고만 말하였다. 그런 후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가기 전 고개를 돌려 나에게 “우리는 원래 이렇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나갔다.
다음날도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강의시간엔 여전히 무표정했고 열심히 강의를 노트에 받아 적기에만 바빴으며, 휴식시간에도 강의에 관한 것에만 국한해서 말이 오고갔을 뿐이었다. 나는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현지 교회에서 요구하지도 않은 일이나 그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결국 나의 이번 사역임무와 목적인 강의에 충실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신경 쓸 것을 다짐하였다.
여섯째 날에 저녁강의를 조금 일찍 마치고 질문할 시간을 주었다. 어떤 이들은 단지 노트만 뒤적였고 또 어떤 이들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질문을 유도하려고 강의내용을 물어보아 역(逆)으로 질문을 하기도 하였고, 또 함께 토의할 문제를 제기해서 의견을 표할 것을 기대하였다. 역시 묻는 것에만 짧게 대답하였을 뿐 공동토론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질문시간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러던 찰나, 갑자기 오른쪽 둘째 줄 벽면에 앉아있던 어느 여자 지도자가 눈을 땅으로 옮기면서 작은 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처음에는 소리가 작아 무슨 질문인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다시 묻자 그녀는 여전히 작지만 조금 크게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까?(一次得救, 泳遠得救 )”라고 물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까?”
중국의 가정교회에서 이 구원론 문제는 한동안 첨예화된 문제였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막상 내가 이 질문을 받고 보니 조금은 당황했다.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달라고 하였고, 그녀는 신약 히브리서 10장 26절의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말씀을 들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이 말씀의 중국어 성경 역본(譯本)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 도를 알게된 후 만약 고의적으로 범죄하면, 속죄의 제사가 더 이상 없게 된다(因爲我們得知眞道以後, 若故意犯罪, 贖罪的祭就再沒有了).”
그녀는 여기서 가리키는 ‘참 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믿고 난 후 여전히 고의적으로 범죄하면 영원히 구원 못 받게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고,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해도 그 후 만약 죄를 여러 번 반복하여 짓게 되면 구원을 못 받게 되므로 구원은 한번 구원받았다고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결국 구원에는 두 단계가 있는데, 처음은 우리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단계요, 다음 단계는 우리의 행위로 일생동안 계속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범죄하지 말아야 하며 그럴 때만 이 참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어떤 형제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첫 번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이뤄지지만, 마지막 단계까지 도달하려면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계속 범죄하지 말아야 하며, 최종적인 구원은 첫 번째 구원을 받은 자가 고의로 반복적으로 범죄하지 않는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그들도 앞 사람의 의견과 설명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지도자인 쩡 형제에게 물었다. 쩡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가 처음으로 영접할 때 비로소 유효한 것이며, 영접하고 난 후 범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첫 구원을 받은 후에도 계속 범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더욱 놀란 것은 쩡 형제가 이런 그의 구원관으로 그의 동료 지도자들과 신도를 계속 가르쳐왔다는 것이다.
구원의 온전성, 영원성, 영속성, 절대 은혜성
나는 대충 그들의 견해와 문제를 파악한 후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히브리서 10장 26절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우리가 참 도를 알게된 후”라는 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알고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는 있으면서 그의 존재와 그의 구원의 행위와 능력을 믿지 않고 계속 범죄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더 이상의 속죄의 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설명하고 나자 쩡 형제는 매우 격앙된 큰 소리로 다시 “우리가 참 도를 알게된 후”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된 게 아니냐라고 반복해서 물어왔다. 나는 확신 있게 “그렇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의 죄 없으신 보혈의 피 외에는 어느 것도 유효하지 않으며, 그의 구속행위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 다른 어떤 첨부될 사항은 없으며, 더더욱 인간의 선한 행위가 최종단계의 구원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같은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철저성과 온전성(히 7:25), 속죄의 영원성(히 9:12 ; 10:11~14)을 역설하였다. 또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누구든지 자랑치 못한다 라고 하면서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강조하였다(엡 2:8~9).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범죄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였다(요일 1:9). 또 기독교인이 된 후 범죄하였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기독교인이 된 후 범죄하지 않는 생활은 우리의 최종 구원의 보장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로마서 6∼8장에 나타난 대로 기독교인의 삶의 원칙을 따라야 할 것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은 더 이상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고 지체를 불의(不義)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며, 오직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지체의 의(義)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했다(롬 6:12∼13). 마지막으로 나는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종, 의(義)의 종, 성령의 종이 되어 날마다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롬 6장, 8장).
말씀이 사람의 얼굴을 바꾸다
나는 그들이 제기한 구원론 문제를 처음에는 히브리서를 중심으로, 그 후는 요한일서, 에베소서, 로마서를 통해 구원론과 속죄론,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장장 세 시간이 넘도록 설명하였다. 질문에 답하면서 그들은 이전과 같이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고 격렬한 어투로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서 참으로 신기한 일이 생겼다. 질문을 하고 답하는 동안 그들의 얼굴이 놀랍게도 점점 환하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쩡 형제를 비롯한 16명의 지도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쁨과 해방을 맞이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씀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의 표정을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새삼 말씀의 능력을 실감하였다. 말씀이 살아서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빨리 변화시킬 줄은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하였다. 우리가 구원의 환희와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릴 때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훨씬 넘어섰다.
아침 식사 때 다시 그들을 만났는데, 모두 다 환한 얼굴이었고 내가 방에 들어서자 이전에 눈인사만 하였던 그들이 입으로 “왕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王老師, 早上好!).”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침묵을 지키던 전과는 달리 유난히 말이 많아졌고 웃음소리도 자주 내었다. 강의시간에 그들이 나를 쳐다보는 표정도 밝아졌으며, 많은 질문은 아니더라도 단순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처음 내가 소망했던 분위기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구원론 문제의 심각성
그 후 나는 쩡 형제와 대화를 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신도를 목양하고 가르쳐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구원관은 단순히 구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첫 단계 구원이며, 최종 단계의 구원은 기독교인의 범죄치 않는 생활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항상 죄지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교회 지도자와 신도들 사이에 과거의 습관적으로 해왔던 거짓말 행위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계속하게 되어, 죄책감뿐만 아니라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 결과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떠나 실족하게 된 사람과, 교회에 계속 머물면서 상습적으로 범죄하고 다니는 사람, 그리고 범죄할 것이 두려워 말도 안 하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니 쩡 형제 그룹의 가정교회 분위기는 매우 경색되어 있었고 성도의 교제가 원활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인의 삶에 기쁨이란 찾아보기 힘들었고 항상 두려움 속에서 경직되어 살고 있었다. 내가 3일 째 지도자 훈련을 마친 날 밤 참석자들의 얼굴 표정과 훈련 분위기에 대해 쩡 형제에게 질문했을 때 그가 “우리는 원래 이렇습니다.”라고 말했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구원론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온전한 삶과 기쁨, 성도 사이의 교제 생활까지 빼앗아 버렸다.
일부 쩡 형제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원론을 잘 알고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갖고 있는 악습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면 금연(禁煙), 금주(禁酒)를 해야하는데, 즉각적인 금연과 금주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에도 습관적인 문제 때문에 담배와 술을 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기독교인이 되어도 구원을 못 받을 바에는 아예 기독교인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신도들이 전도하는데 있어 적지 않은 문제와 거부감이 있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구원론은 교회의 전개와 발전, 전도와 새 신자의 탄생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선교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진행된다
쩡 형제 가정교회에서의 지도자 훈련은 예정된 시간에 끝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래 준비한 강의내용보다는 한 자매가 우연히 제기한 구원론 문제에 대한 대답과 토론을 사용하셨다. 다시 한번 선교사역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목적과 뜻대로 진행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사역자란 단지 하나님 손안에 있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는 사용자의 뜻에 따라 준비만 하면 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사용자가 결정할 일이며, 도구는 단지 사용자에게 순종만 하고 이끌림만 받으면 된다. 결과도 사용자가 책임지는 것이며, 영광도 사용자의 것이다.
왕쓰웨 목사/ 본지 편집위원·
중국복음선교회 중국선교사훈련원 교무처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