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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調書) 경찰청 홀에 도착했을 때 ‘궈바오(国保)’ 요원과 두 명의 젊은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궈바오 요원은 내가 중국의 종교법을 어기고 중국인들에게 설교를 했기에 이것을 인정하고 중국의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는 짧은 조서의 내용을 말해 주고는 오른쪽 검지로 지장(指章)을 찍게 했다. 이렇게 조서 작성을 마치고 궈바오 요원은 내게 열흘 동안 정리를 끝내라고 했다. 그때였다. 사무실에서 제일 높아 보이는 사람이 출국 전까지 나를 구류(拘留)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자 궈바오 요원은 구류까지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하마터면 중국 경찰청에서 열흘 동안 철창신세가 될 뻔했던 모든 조사와 행정처리는 다행히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경찰청을 나오자 궈바오 요원 일행들은 내게 지하철을 타는 곳을 알려 주었다. 그들과 악수를 하며 나는 “짜이지엔” 이라고 의도적인 인사를 건넸다. 비록 5년 뒤에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중국에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 안전국(安全局) 소속의 궈바오 요원들이 나를 주시(注視)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선교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중국 성도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볼 것이다.
마지막 불꽃 추방 시간이 정해진 이상 더 이상 숨죽여 있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신분이 드러나고 추방이 결정된 열흘의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중국인 지도자 성경공부를 4시간 동안 진행했다. 이 시간을 이용해서 히브리어 문법에서 동사(動詞) 초입 부분까지 가르쳤다. 그 다음 주 토요일에는 남방지역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 세 번째 제자를 제외하고 베이징(北京)에 있던 첫 번째 제자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내 추방소식을 듣고 다 모였다. 이들에게 7시간여의 히브리어 문법을 강의했다. 주일에는 대학생을 전도하여 가정교회 모임을 이룬 한족공동체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이 모임의 대학생들을 참으로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였다. 그들 가운데 다른 도시에 가서 교회를 세운 지체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참되고도 깊은 신앙과 신학의 지식을 넣어주고 성장하게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큰절 그 날은 정말 오고 말았다. 교인들은 아내와 나를 공항까지 배웅하며 이별의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다. 우리는 마지막 이별을 나누며 “이것이 한국식 이별이오!(这是韩国方式的离别!)”라고 말하고는 큰절을 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중국 교인들도 나를 따라 함께 큰절을 했다. 나도 다시 큰절을 하고 일어나자마자 울면서 공항 검색대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울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국땅에 비행기가 착륙하자 또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말 내가 중국을 떠나서 한국에 돌아온 것인가! 이렇게 믿기지 않고 정말 받아들이기 싫은 이 상황이 실제라는 슬픔에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이렇게 18년간의 중국 본토에서의 선교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무엇을 선교했는가 중국에서 어떻게 선교하면 좋을까 살피던 중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선교에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야 말로 중요한 사역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8년을 중국에 있으면서 네 명의 지도자를 양성했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활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활동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두 번째는 가정교회 사역이다. 처음에는 교회를 세울 마음은 없었지만 3년 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대학생들이 뜻을 모아 2004년 5월 16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샹톈(向天)교회를 통해 대학생들이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신앙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들은 지금 중국 전역의 대도시로 퍼져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정교회를 세워 제자양육을 이어가고 있다.
세 번째는 지하신학교 사역이었다. A지역의 조선족 지도자들과 B지역의 지하신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다. 이 과정을 통해 한족 지도자들에게는 보다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썼으며, 조선족 지도자들에게는 조선민족의 역사를 알려 주었는데 단지 한국인의 역사가 아니라 남한과 북한, 조선족과 고려인, 재일교포를 묶는 조선민족의 폭넓은 인식을 공유하기를 바랐다.
네 번째는 선교를 하는 동안 중국인들과 조선족 그리고 북한 사람들을 보며 몇 편의 글들을 쓰게 된 것이다. 그 글들을 출판하고 싶었지만 중국선교사로 있는 동안에는 보안상 출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중국선교사는 이름도 명예도 없이 빛은 약간 들지만 여전히 어두운 어스름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출판도 못하는 글들을 그 어스름한 환경 속에서 꾸역꾸역 혼자서 써 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주변의 중국인들이나 선교사들과 나누며 나름대로 열매를 거두어 왔다.
그 외에도 서양 사람들이 나의 중국어 설교가 알아듣기 쉽다고 하여 1년여 동안 예배에 참석했던 일, 대만계 미국인과 수년 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일이 있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카카오톡(이하 카톡)에 올렸더니 JYL이라는 한국인학생이 자신도 나의 제자라고 쪽지를 보내왔다. 그 쪽지를 게재한다.
“‘히브리어로 살펴보는 성삼위 하나님’ 편지를 받고 추방 과정이 몹시 궁금했었는데 글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년부 예배 중 카톡이 온 걸 보았으나 내용을 잠깐 확인하고 집에 가서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와서 찬찬히 읽었습니다. 제 예상과 같이 눈물이 콸콸 쏟아지며 그간 얼마나 힘드셨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갑니다. 목사님은 잠시 잊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역시 목사님을 통해 주님께 인도된 귀한 열매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목사님을 만나 처음으로 신앙에 대해 고민을 하고 내 인생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한 것을 저는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믿는 형제자매들을 만나 그들이 제 신앙의 근원을 물어볼 땐 항상 선양에 계신 조용선 선교사님 이야기를 먼저 합니다. HY를 통해 목사님을 만난 일, 금요일 성경공부와 주일예배, 세례식, 이후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삶 등등. 목사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의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호칭 편의상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전 사실 ‘조용선 선교사님’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합니다. 제가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항상 간증할 때 제일 첫 번에 나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 pixabay 조용선 |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