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중국교회-수정.JPG)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신종교 건립의 배경>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1) 예수의 인성(人性)과 그의 인격 2) 예수의 신성(神性)과 그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들 3) 예수의 사역 4) 예수의 가르침의 현실적 합성 삶을 위한 종교의 가치를 옹호하였던 많은 중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중국 인민들에게 현실적 합성이 있는 종교로서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를 새로운 시대 종교로 창조하고자 했으며 기독교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았다. 그들은 종교를 과학이나 예술과 같이 인생의 한 면에 국한된 것으로 보지 않았고 기독교를 삶의 전체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의 관심은 민족(국가)의 당면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기독교가 1920년대의 중국의 곤경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으로부터 발언하였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종교를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하였기에 자신들의 종교에 그 모든 영역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하였다. 신학적 확신과 기독교 신앙의 실존적 적용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진실로 시대 상황에 적합하게 대응할 수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들에게 자신들의 내면적 소망의 이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학적 입장이 보수적이든 혹은 개방적이든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마찬가지로 관심을 기울였다.
적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은 도덕의 각도로부터 중국의 현실에 대한 기독교의 적합성에 대해 변호하였다. 그들의 탐색은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에 집중되었다. 반기독교의 발언 중에서 예수의 생애 속에서 보인 행위와 품덕(品德)에 대해 비판한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다. 예수가 제창한 박애, 희생, 관용과 용서의 가르침은 또한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진독수(陳獨秀)는 일찍이 이 원칙들이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고귀한 요소들”이라고 칭찬하였다. 저명한 작가이자 종교적 자유의 지지자였던 주작인(周作人)1)도 또한 이러한 특성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과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는 말은 근대 인도주의의 기본정신과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 그리고 북경대학교 교수 전현동(錢玄同)3)은 예수를 히브리 종교를 변혁함에 있어 역사상 드물게 보는 칭찬할만한 혁명적 정신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의 산상수훈이 곧 기독교 윤리의 중심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4)
비록 예수의 언행은 존중을 받았지만 역사상의 기독교회의 실제 행동과 중국교회의 당시 상황은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불러올 만한 것이었다. 과거의 기독교회의 악행들은 반기독교 인사들로부터 다수의 극렬한 비판을 초래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의 역사를 ‘학살과 유혈의 역사’라고 불렀다. 또 다른 이들은 교회에 의해 저질러진 악들이 ‘산과 같이 쌓여있다’고 말했다. 예수의 그 높은 도덕적 가르침들과 역사상의 기독교의 심각한 죄악들은 어떻게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
적광(赤光)이라는 이름의 작가는 〈기독교와 세계 개조(基督敎與世界改造)〉라는 글에서 강력한 공산주의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의 역사적 과오들을 열거했다.5) 중세(中世) 시대의 십자군 원정과 16세기 종교개혁운동 후 계속해서 발생한 종교전쟁들은 가장 추악한 사건들이다. 이른바 기독교 국가들에서 과학적 발견들을 억압 은폐한 것과 과학자들과 문필가들을 핍박하고 살해한 것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전쟁 중에 목사와 신부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나라의 승리와 상대 기독교도 적군의 패배를 위해 기도하였다. 기독교 집단 내부의 허위적인 실상은 이로부터 볼 수 있다. 그들의 실천은 그들 자신의 이론과 이렇게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6) 중국에는 수많은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s, 吃敎信徒)’들이 있으며, 또한 사회의 기생충과 같은 선교사들도 있다. 그들은 이제 막 자력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국가에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7) 적광은 중국 사회의 병폐를 개선하고 국가의 기울어가는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를 철저하게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상 기독교는 항상 인민의 사상을 속박하여 왔다. 예를 들어 유럽의 르네상스(문예부흥) 이전의 천여 년에 걸친 암흑시대의 형성은 기독교의 종교적 통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만약 기독교가 과거에 그와 같이 많은 잘못을 범하였다면 오늘날 어떻게 그것에게 중국에서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사회 민생에 해악을 가하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비난에 대응하여 장역경(張亦鏡)은 더 정확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십자군 원정은 중세(中世) 시대 로마 천주교 교회의 문제이며 그들의 과실은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대가 바뀌었으며 오늘의 기독교 교회가 그들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 당시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상내덕(常乃德)8)도 또한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정확한 시간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오류는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으며 오늘날에 다시 따질 필요가 없다. 현재에 대해 과거를 거론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9) 예를 들어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반대로) 수많은 무고한 서방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20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더 이상 종교 핍박을 진행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이단을 심판하는 종교 재판 법정을 열지도 않는다. 양균묵(梁均黙)은 이전의 종교전쟁이 산출한 죄악들은 많은 것이 정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주요한 원인은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류의 방종하고 파괴적인 본성에 있다고 해석하였다. 당시의 신도들은 대다수가 다만 종교의 겉모습만 가지고 있었을 뿐, 결코 진정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10) 또한 천주교와 기독교11) 사이의 갈등은 쌍방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며, 그들의 상호 적대적 행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망각한 것이다. ‘종교 국가’체제와 ‘국가 종교’는 둘 다 성경에 위배된다.
장역경의 분석에 따라 우리들은 반드시 기독교와 기독교도 사이의 분별을 인식해야만 한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신뢰성은 기독교 신도들의 행위 표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들 사이의 종교전쟁 기간 중에는 신도들의 애국 의식이 강렬해지기 때문에 왕왕 종교를 곡해하거나 이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제창한 박애와 화평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서로 원수로 삼아 살육하는 참극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기독교 신앙의 참모습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상내덕의 관찰에 따르면 만약 신앙과 신도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한 기독교에 대한 불필요하고 불건전한 많은 비난과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소수의 사람들이 범한 잘못들로 전체 교회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코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 만약 소수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면 왜 그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병원과 학교, 고아원 등에서 기독교인들이 행한 선한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인가? 선한 것은 제쳐두고 악한 것에만 주목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이다.12) 중세 시대의 지적인 불모성과 사회의 낙후함은 주로 교회 신도들이 성경을 오해하여 사회와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의무(기능)들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13)
또 하나의 주요한 반대 노선은 현대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적합성에 대해 논란하는 것이었다. 도효실(屠孝實)은 종교 문제에 대한 자신의 강연에서 종교적 믿음을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이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역사 안에는 결코 불변의 이론 혹은 절대적인 모범적인 도덕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4) 역사상의 종교는 모두 시대의 산물이며, 종교의 진리는 영원하고 궁극적이라기보다는 오직 일시적이고 상대적일 뿐이다. 일부 비교적 진보한 종교들에서 그들의 교의는 대부분 자신들의 창설자 곧 예수 그리스도, 부다, 모하메드 같은 이들의 경험과 인격 위에 건립되었다. 그들의 말과 사역들은 이어지는 세대에서 그들의 추종자들을 위한 최종적 기준(모범)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 종교적 인물들은 모두 자신들이 생활한 시대에 속하였고,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념은 일정한 문화 배경과 풍속, 습관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후대에 자신들을 따르는 이들이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들의 모범을 따르라고 희망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의 개인적인 권리와 자유를 해치지 않을 수 없다. 도효실의 견해에 따르면 진리는 멈춤 없이 진보하고 있는 인생 속에 있는 것으로 점차적으로 체득하여 가는 것이지, 결코 이전의 객관적 표준을 먼저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으로 우리의 현재의 주관적 경험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 각각의 성격과 활동은 모두 전체 역사 과정의 일환이며, 그 속에서 그 본인은 곧 역사(주체)의 주역으로서 마땅히 타인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 개인의 성격과 활동은 전체 역사적 과정의 한 측면이다. 그는 역사 자체의 한 주체이다. 도효실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20세기의 기독교인들이 어찌 그 옛날 예루살렘 거리에서 가르쳤던 한 역사적 인물을 본받아 따를 수 있겠는가? 종교는 오늘날에는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옛 시대의 사회활동의 하나일 뿐이다.
전현동(錢玄同) 또한 도효실과 매우 유사한 논점을 취하였다. 그는 도덕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시대와 사회 조직이 다르면 그에 따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도덕 원칙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도덕의 적용성이 가장 중요하다.15) 심지어 예수마저도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던 과거의 인물일 뿐이다. 그의 도덕 교훈이 오늘날의 사회에 적합한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마땅히 현대인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현대인은 윤리적 결정을 위한 그들 자신의 원리들을 구성해야 한다. 불변하는 도덕적 규범들의 가능성은 인생과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배제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때 그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러한 비판과 질문들에 대해 답변해야만 했다. 중국은 당시에 밖으로는 제국주의 세력들이 호시탐탐 중국의 영토를 잠식하려 노리고 있고, 안으로는 부패한 군벌세력들이 전횡하여 약육강식하고 정부는 여전히 남과 북으로 분리되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 혼란의 국면 속에서 기독교는 과연 어떤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어떻게 민족(국가)을 구할 것인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중국을 부흥시킬 수 있고, 가정을 다시 세우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들은 국가의 흥망은 인민의 품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만약 중국인들이 그리스도화 된 인격을 잘 배양할 수만 있다면 국가의 미래를 구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기독교가 가장 활력이 있으며 살아있고 유연하며 따라서 근대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종교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는 인생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목적이며, 기계적이고 비인격화한 사회에 다시 인도(人道) 관념을 공급하고, 인격의 가치와 존엄을 새롭게 건립하여 줄 생명의 종교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비기독교인 학자들도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진독수는 중국인들이 “예수의 숭고하고 위대한 인격 및 열정적이고 심후한 정감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를 요청하고, 직접 예수의 문을 두드리도록” 격려하였다.16) 그리고 주작인은 기독교가 중국인들이 “일종의 새로운 심령(心靈)을 배양하는 것”을 도울 수 있으며, 그들이 곤경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7) 또한 간우문(簡又文)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기독교가 장차 어떻게 중국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기독교인의 인격은 충성, 성실, 인애, 의로움, 봉공(奉公), 희생, 겸손, 순결, 협동, 연합, 책임감, 자기의 직책에 신실함, 인내, 결코 절망하지 않는 소망이며, 나라와 진리를 위해 죽는 순간까지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어째서 기독교인 인격이 그러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인격은 사람의 생명으로 말미암지 않고 신(神,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인격으로도 중국을 구원할 수 없다면, 중국은 희망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실현될 수 있으며, 실현되고 말 것이다.”18)
그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인격은 인간의 노력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다른 일반의 기독교 지식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의 믿음을 표명하였다. 기독교에 의해 약속된 생명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인격은 우리가 따라야 할 도덕규범들을 우리에게 주고, 그의 정신은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도덕적 역동성으로 우리를 가득 채운다. 그를 통해 형성된 기독교인의 인격이야말로 중국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인격의 배양에 대해 이야기할 때,어떤 이들은 정신(精神)의 재생(再生)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특별히 나라 안에 만연한 도덕적 타락과 민생의 파탄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의 필요성을 강조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당면한 중국의 문제는 곧 중국인의 문제이며 그러므로 이 인민이 반드시 먼저 부흥(재생)하여야 사회도 비로소 개혁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자신(趙紫宸)은 “개혁의 문제의 핵심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마음속에 새로운 정신을 건립(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19)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의 예수는 끝이 났으나 정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영원하며 모든 이에게 지속적으로 유용하다. 장흠사(張欽士)도 또한 도덕 중건의 가능성은 우리들이 어떻게 인간 본성 중의 선한 것을 배양하여 그로 하여금 공동체의 행복를 위해 생산적 삶을 선도하도록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20)
국가 중건(重建)의 주장은 기독교의 사회적 관심, 곧 예수의 가르침의 사회적 부면으로부터 나온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중국 전통의 관념이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중국인의 사상 속에서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저 무형(無形)의 천도(天道)는 그치지 않고 운행하여 인류의 사회활동 중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으로 믿어졌다. 역대의 지식인들이 종교 문제에 대해 그다지 큰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것은 금세(今世)를 초월한 내생(來生)을 중시하는 저세상적인 종교는 일상의 사회생활을 중시하는 그들의 취향(관심)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 개혁을 강조한 것은 그 목적의 하나가 기독교 신앙의 현실 적합성을 표명함으로써, 실제적인 것을 말하기 좋아하고 금생(今生)을 중시하는 일반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하나의 피세적(避世的) 종교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도 또한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가 중국의 미래와 인민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가지론적이고 실용적인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정신적 그리스도의 실재성이 구체적이고 만질 수 있는 행동들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기독교인들은 국가 재건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사회의 모든 층면을 포함한 문화적 (갱신)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문제는 매우 크고 어려우며 직면하게 될 저항도 크고 무거우므로, 그들 모두가 전전긍긍하되 또한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그 일을 해 나가야만 했다. 일체의 다만 차가운 형이상학적 이론과 내생(來生) 문제에 관해 강설하는 그러한 신학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수용되기 어려웠다. 또한 개인적 영성을 강조하는 것은 다만 실제 세계로부터의 도피주의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토착화 신학은 단순한 개념적 수준을 넘어서야만 했다.21) 20년대에 적용할 수 있는 복음 메시지는 개혁이라는 국가적 과업에의 실천적인 참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중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과업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와 인간의 노력이 그 속에서 서로 배합되어야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3. 신학적 평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1920년대 ‘그리스도 중심의 호교신학(護敎神學)( Christo-centric apologetics)’의 건설은 두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 외부로부터의 반종교(反宗敎) 사조(思潮)와 불안한 사회적 상황이 중국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당면한 긴급한 문제들에 대해 실행가능한 해결책을 생각해내도록 강제하였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내적 역동성에 대한 깊이 신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을 중심으로 한 메시지를 제공함으로써 능히 환경의 요구에 적응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호교신학의 반성 작업은 몇 가지 중요한 목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기독교를 단순화하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만든 것은 사실상 신앙 이면의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긴요한 내용을 지적해 내고자 한 것이었다. 이렇게 복음의 메시지를 선명하고 단순하게 만든 것은 당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그리고 교육 수준이 낮은 일반의 광대한 대중들에 대해 매우 효과적인 전교 방법이었다. 서구의 전통적인 신조주의(信條主義, credalism)와 의례주의(儀禮主義, ritualism)는 오랜 세월 동안 복음을 혼란스럽고 불분명하게 만들었고, 수입된 종파주의(宗派主義, 교파주의, denominationalism) 사상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가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만들었다. 해외의 선교사들은 중국에 와서 선교할 때 자신들의 다양한 신학 관념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이 각처에서 개(個) 교회를 조직하고 목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각종의 신학 이론들이 현지의 신도들에게 전수되었고, 그에 따라 점점 교회 내에 신학적 다양화 혹은 불일치가 발생하였다.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어려움들을 인식하였고, 초기 교회의 복음 메시지에 돌아가 예수의 사적과 교훈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 전파함으로써 복음의 순수성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의 건립은 곧 그것을 통해 국내의 여러 교회들을 연합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교회의 단결을 위해 사용한 신학 원칙이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 원칙 아래 적지 않은 교회들이 교회의 연합을 방해하는 일체의 사상과 전통을 폐기하고 단순히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두기를 소원하였다.22)
1920년대의 초반 몇 년 동안 서구 신학권 내의 자유파(自由派, 근대주의, 자유주의, Modernists)과 기요파(基要派, 근본주의, 보수주의, Fundamentalists) 사이의 논쟁이 중국교회 내에서도 재연되는 듯하였다. 보수파(保守派)의 선교사들은 자유파(自由派)의 신학 사상에 대항하여 성경의 권위와 신뢰성을 제고하며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기초로 한 문자적 해석의 당위성을 지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중화성경연회(中華聖經聯會, Bible Union of China)를 조직했다. 중국내지회(中國內地會, China Inland Mission)의 회장(會長) 호스트(D. E. Hoste, 何爾斯)는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일군의 선교사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중화성경연회에 가입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나의 신념은, 자유파의 운동은 전체적으로 말해서 이미 성경 속에 계시된 대로의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이다.”23) 어떤 중국 지도자들은 이러한 대항 행동에 대해 “이는 일부 선교사들이 서구 교회의 비참한 경험을 재연하려 시도하는 것으로서 실로 자살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하였다.24)
자유파와 기요파라는 양대 적대 진영 외에 또 하나 일부 중도 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학 이론 방면의 세부 절목보다는 교회생활 내의 실제적인 문제들, 특히 중국교회가 당면한 곤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구로부터 수입된 자유파와 기요파 사이의 싸움은 현실적으로는 중국교회의 발전에 심각한 방해를 초래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할 때 양파(兩派)가 공통의 기반(신학관점)을 제출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양파는 마땅히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최초이자 마지막 목표는 곧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현하는 것이다. 사회복음과 개인복음 양자 모두는 이 점에로 귀결된다.”25) 당시 상황의 혼란스러움은 다음과 같은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의 기독교의 발전의 복잡한 양상을 감안해 볼 때,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해외 선교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일한 조건은 우리에게 필요한 선교사는 바른 형태의 선교 인재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기요파나 자유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능히 연합 전선 위에 자신을 세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그들이 일단의 영원한 교리를 제정하기 위해 고심하거나 혹은 신학사상상의 논쟁을 고취하는 데 열심인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26)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은 사실 당시 일종의 통합적이면서 호교적인 신학이었다. 즉 그것은 기독교를 기독교인들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실수들과 기독교인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들을 향해 있었던 반기독교 운동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예수의 삶은 사회적 봉사의 모델로서 그리고 도덕 수양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바로 기독교의 사회적 부면에 대한 관여를 강화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실제와 윤리를 중시하는 중국의 전통사상과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토착신학의 형성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문화에서 작동하는 보편적 신성(神聖)의 원리 곧 우주적인 생명 원칙이라는 확신이었다. 전국기독교협진회(全國基督敎協進會, 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China)의 총(總)간사 성정이(誠靜怡)27)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기독교의 본질은 다른 나라의 기독교의 본질과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 중국인들도 응당 모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를 바탕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로 거듭 새롭게 돌아가야 한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 즉 인류 누구에게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동일하다. 다만, 기독교의 각국에서의 특수한 발전은 곧 각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28)
이와 같이 본다면 조자신의 ‘그리스도 의식’, 오뢰천(吳雷川)의 ‘그리스도 본받기’, 그리고 장역경의 ‘역사적 예수’는 모두 기독교 신앙 곧 개인과 사회, 역사와 문화 속에서 줄곧 끊임없이 인간과 관계해 온 기독교 신앙을 제시할 길을 다양한 방식으로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각도로부터 기독교를 해석하고 천명하는 것이 사실상 하나의 능력 있고 효력 있는 메시지를 중국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사회를 개혁하는 사업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또한 기독교 신앙이 중국 문화와 접촉하였을 때 본토(중국) 문화의 경험은 우리가 기독교의 심오한 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의 복음에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선교사들에 의해 전달된 기독교 메시지를 정화하여 그 가운데 붙어 있던 서구적 색채를 제거하는 데 가장 좋은 신학적 방법이었다. 토착화 신학 작업의 첫걸음은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신앙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 서구의 문화적 짐을 제거함으로써 복음 자체가 직접적으로 중국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구 문화로부터의 ‘디코딩(decoding, 끈 품, 벗어남)’ 뒤에 내디뎌야 할 걸음은 그것을 중국 문화 속으로 ‘인코딩(encoding, 끈 맴, 스며듬)’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외래의 문화는 벗어버리고 본토의 문화를 더하는 과정은 일군의 교회 지도자들이 중국인들에게 기독교 메시지를 의미 있게 소개하는 위해, 공통적으로 승인한 신학적인 길이었다. 그들의 시도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토착신학의 모형들이 생겨났다. 미주 1) 1920년대에 周作人은 저명한 작가이자 서양 작품들을 중국어로 번역한 번역가였다. 그는 북경대학교 예술대학의 교수였다. 문학 혁명의 주창자로서 그는 그의 형제 魯迅과 함께 중국 문학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사회적 사실주의와 인도주의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기독교운동 기간 동안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중국에서의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옹호하는 중요한 발언들을 하였다.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199.를 참조하라. 2) 〈新文化中幾位學者對於基督敎的態度〉, 《生命月刊》 제2권 제7-8기 (1922년 3월), pp.1-10.을 참조. 거기에서 周作人, 高一涵, 胡適, 陳獨秀 그리고 錢玄同 등의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3) 錢玄同 (1887-1939)은 章太炎의 제자로서, 오랜 시간 北京大學의 교수를 지냈다. 그의 학문적 공헌은 고전연구와 문헌학 방면에 있었다. 陳獨秀, 胡適과 함께 그는 고전 중국어 대신에 白話를 사용할 것을 주창하였다. 그는 《新靑年》의 6인 편집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일했다. 그는 黎錦熙, 趙元任, 林語堂과 합력하여 음운 원리에 입각한 “國語羅馬字拼音法式”을 제정하였다. 대표작으로 《文字學音篇》이 있다. 4) 〈新文化中幾位學者對於基督敎的態度〉, 《生命月刊》 제2권 제7-8기 (1922년 3월), pp.1-10. 5) 1922년초 반기독교운동이 폭발하였을 때, 非基督敎學生同盟은 “非基督敎學生同盟號”이라는 제목의 특집호를 발간하였다. 《先驅》 (1922년 3월 15일) 참조. 이 특집호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선동적인 글들을 다수 싣고 있다. 거기에 赤光의 에세이 〈基督敎與世界改造〉가 실려 있다. 張亦鏡이 편집한 책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에 그것들 각각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되어 있다. 6) 張亦鏡, 〈批評赤光的〈基督敎與世界改造〉〉,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53-61. 7) 梁均黙, 〈批評綺園的〈基督敎與共産主義〉〉,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74-76. 綺園은 非基督敎學生同盟의 특집호에 글을 실은 또 한 사람의 반기독교 비판가였다. 8) 常乃德은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비기독교인 관찰자였다. 그는 반기독교운동의 宣傳에 정도가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대의 과학 시대에 종교가 필수적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반기독교도의 반대의 많은 부분이 근거가 없는 것이라 느꼈다. 張亦鏡이 편집한 책에 실린 그의 에세이는 반기독교 운동의 입장에 대해 타격을 주었다. 9) 常乃德, 〈對於非宗敎大同盟之諍言〉,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263-266. 10) 梁均黙, 〈批評綺園的〈基督敎與共産主義〉〉, p.79. 11) (역주) 필자는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天主敎’라고 하고,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에 대해서는 ‘基督敎’라 호칭하고 있다. 12) 常乃德, 〈對於非宗敎大同盟之諍言〉, pp.265-266. 13) 중세 사회의 문화적이고 지적인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우리 시대의 역사학 연구는 중세의 ‘암흑시대’가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미 입증하여 주었다. 14)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87-106.에 실린 屠孝實의 강연을 참조하라. 15) 〈新文化中幾位學者對於基督敎的態度〉, pp.9-10.에 실린 錢玄同의 견해를 참조하라. 16) 陳獨秀, 〈督敎與中國人〉,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45. 17) 〈新文化中幾位學者對於基督敎的態度〉, pp.1-3.에서 周作人의 견해를 참조하라. 18) T. C. Chao, "Can Christianity be the Basic of Social Reconstruction in China?", The Chinese Recorder 53 (1922년 5월), p.316. 19) 張欽士, 〈精神復興〉, 《生命月刊》 제2권 제4기 (1921년 11월). 또한 張欽士, 〈我個人的宗敎經驗〉, 《生命月刊》 제3권 제7-8기 (1923년 4월). 20) Cf. 胡貽穀, 〈耶穌基督能改造世界嗎?〉, 《現代思想中的基督敎》 (上海: Association Press of China, 1926), pp.21-35. 21) Cf. 胡貽穀, 〈耶穌基督能改造世界嗎?〉, 《現代思想中的基督敎》 (上海: Association Press of China, 1926), pp.21-35. 22) 中華基督敎會의 발전과정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서, Wallace C. Mervin, Adventure in Unity: The Church of Christ in China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4). 23) Bulletin of the Bible Union of China 1.2 (1921년 4월), p.4; 또한 "Tentative Statement", in Bulletin 1.1 (1921년 1월), p.3.을 참조. 24) Hsu Pao-ch'ien (徐寶謙), "The Prospects for Christianity in China", p.23. 基要派와 自由派의 충돌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Paul Hutchinson, "Conservative Reaction in China", Journal of Religion 2 (1922년 7월), pp.337-361; Griffin W. H. Thomas, "Modernism in China",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921년 10월), pp.630-671. 또한 M. Searle Bates, "The Theology of American Missionaries", in The Missionary Enterprise in China and America, ed. John K. Fairbank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pp.150-157. 25) Hsu Pao-ch'ien (徐寶謙) ed., "The Future of Christianity in China", p.6. 참조. 26) Andrew C. Y. Ch'eng, "Interpreting Christianity to China", Christian China 8.1 (1921년 10월), pp.38-39. 27) 誠靜怡 (C. Y. Ch'eng)는 어려서 미션학교를 다녔으며, 1900년 天津의 倫敦傳道會(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03년에서 1908년까지 Chinese New Testament의 개정(교정)작업을 돕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는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회의(World Missionary Conference)에 倫敦傳道會에 속한 중국교회들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으며, 1913년에는 1922년까지 中華續行委辦會(China Continuation Committee)의 간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915년 유교를 국교로 만들려고 하였던 陳煥章의 시도에 대항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1919년 “China for Christ Movement"를 시작하였으며, 1922년 全國基督敎協進會(National Christian Conference)의 總幹事가 되었다. 후에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귀국한 후 1933년 말까지 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China의 General Secretary가 되었다. 1927년에는 그는 中華基督敎會(Church of Christ in China)의 主席이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토착화교회운동에 자신의 힘을 다 쏟았다. 28) C. Y. Ch'eng, "Problems of the Chinese Church", in China Her Own Interpreter, ed. M. Stauffer (New York: Missionary Education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27), p.97. 誠靜怡, 〈中國基督敎的性質和狀態〉, 《文社月刊》 제2권 제7책 (1927년 5월), p.55.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