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설정   사이트맵    사역에 동참하시려면  
    HOME  |  선교회소개  |  교육.훈련  |  중국을주께로  |  중국기도  |  중국어교실  |  자료나눔  |  커뮤니티  |  도서·음반
   
중국을 주께로는
전체보기
이번호보기
지난호보기
주제별보기
  특집/기획
  선교전략
  중국교회
  중국사회와 문화
  지역 및 종족연구
  중국뉴스
  중국어관련
  선교일반
  선교나침반
  중국 기독교
  기획
정기구독안내
해외정기구독안내
HOME > 중국을주께로 > 이번호보기
2019.9.3 통권 205호     필자 : 문석윤 프린트   이메일 
[오늘의 중국교회]
중국 신학의 건설-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 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교회의 대응-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신종교 건립의 배경>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II.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1920년대 중국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복음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19세기 중엽 이래의 복음 메시지의 변화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순서에 맞을 것이다. 19세기에 서방으로부터 온 대부분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의식이 있었다. 곧 그들이 중국에 온 목적은 천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명(大使命)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교 사역에는 두 가지의 기본 관념이 있었다. 첫째, 기독교 메시지는 신성한 것으로서 지상(至上)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며, 둘째, 서구 문화는 다른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막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 사회로부터 받은 첫 인상은 이러한 관념들을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보였다. 19세기 중엽 이후 전통의 중국 사회는 점차 몰락의 징후들을 드러내고 있었다.1) 외국인의 눈에 중국은 비도덕적·사회적 관행들과 부패한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로 비춰졌다. 도교와 불교와 같은 전통 종교들은 비록 그 교의에서는 철학적이지만 이것들의 의식(儀式)과 풍속(風俗)은 적지 않게 미신적이고 사악한 활동들과 뒤섞여 있었다. 일반적인 서구선교사들은 이렇게 이교(異敎)사상과 야만적인 습속으로 충만한 중국 사회는 시급히 기독교 복음을 통해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영국런던전도회(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저명한 선교사인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約翰基夫)은 1877년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전국기독교선교회의(全國基督敎宣敎會議, General Conference of Protestant Missionaries)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들은 선교사로서, 우리가 중국에 온 이유가 우리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한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교의 목적이 이 광대한 중국 민족을 그리스도의 제자 곧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이 나라의 자원들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이며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입니다.2)
 

그리피스 존의 이 말은 19세기 그 세대 대부분의 서구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입장은 동시에 나중의 1920년대 선교사들 중 다수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강력한 전투적인 군대 용어들은 당시 서구선교사들이 중국 본토의 종교들과 전통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3)
 

19세기 중국내지회(中國內地會, China Inland Mission)의 창립자인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戴德生)도 또한 유사한 동기, 즉 직접적인 복음전도에 대한 배타적인 관심을 가지고 복음전도 사역을 진행하였다. 내지회의 주요 특징은 “회개한 신자를 얻고자 하거나 어떤 기독교 단체를 건립하고 훈련하려고 하지 않고, 가장 신속한 방법으로 복음의 지식을 천하에 전파한다.”라는 데 있었다.4) 1890년에 거행되었던 제2차 전국선교회의 중에서 테일러는 향후 5년간 추가로 천 명의 선교사들이 더 중국땅으로 들어가 선교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다.5) 그의 목표는 비록 반드시 중국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빠르게 복음전도를 하는 데 있었다. 이때 ‘학생지원해외선교운동(學生志願海外宣敎運動,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도 일어났다. 그들의 구호는 “이 세대 내에 전 세계에 복음전파를”이었다. 매우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이며 다른 모든 신앙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많은 것이 사악한 이단(異端)사상으로서 기독교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들의 복음 메시지는 개인을 중시하고 내세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중시하는, 대체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내세적인 것이었다.
 

접촉은 지식에로 이끌며 지식은 존중을 낳는다. 선교사들과 중국 사회의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현지 문화에 대한 인식도 나날이 증가하였고, 따라서 그 속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감별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위에서 말한 보수적인 선교 방법을 채택하였지만, 일부 소수지만 비교적 개방적인 선교사 그룹은 점차 중국의 유구한 문화 전통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어 중국 고전 경서들에 대한 번역들로 유명한 제임스 레게(James Legge, 李雅各)는 전통 중국의 윤리관념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는 1877년의 선교회의(General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독교가 유가(儒家)사상의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6) 한편으로 그는 기독교의 계시에 근거한 신앙의 가치를 여전히 중시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중국 문화 속에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종교들은 그들 자신이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검증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의 훌륭한 부분은 긍정할 것이고, 불완전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적할 것이며, 오류가 있는 부분은 숨기지 않고 부정할 것이다.”7) 어떤 선교사들은 중국 문화에 대해 폄하하는 태도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했다. 예를 들어 터너(F. S. Turn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자를 적으로 매도하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그를 친구로 환영하며 동시에 그의 교훈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도구로 활용합시다.”8)
 

기독교를 중국 사회와 관련짓는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는 새로운 단계의 선교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어느 정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기독교는 마땅히 어떤 방식으로 중국 사회와 관계를 맺어 가야 하는가? 단지 입으로 하나의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사실 이러한 복음전파와 본지(本地) 문화의 관계 문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미 일부 서양선교사들이 연구를 시작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윌리엄 마틴(W. A. P. Martin, 丁韙良)은 선교 사역은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 외에도 과학과 기독교를 통해 낙후한 중국 사회를 개혁하여 “중국 전체의 문화적 삶을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9)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李提摩太)와 영 알렌(Young J. Allen, 林樂知)도 또한 선교 사업은 서구 문화를 이용하여 중국이 현대화 건설을 진행하는 것을 돕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해외선교사들 중 개방적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사회 복무(social service, 사회봉사)의 정신을 매우 중시하였다. 중국 사회는 오랜 세월 쇠약한 상태로 있었고 미신과 누습(陋習)이 민간에 깊이 젖어들어 있었다. 복음 사역이 어찌 이러한 생활환경에 대해 완전히 눈감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데 협력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욱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깨달았다. 왜냐하면 특히 중국인들은 실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삶(생활)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수많은 기독교 사회 복무 기구와 조직들이 설립되었다. 학교, 병원 그리고 고아원들 중 많은 것들이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직접 설립되었거나 그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서양 문화를 전파하는 매개가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중국인들을 복음의 구원을 기다리는 미개한 이교도들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전파가 기독교 인도사상(人道思想)의 실천을 포괄한다고 믿었으며, 그것으로 사회 각 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1927년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 Church of Christ in China)의 집행 총간사 케플러(A. R. Kepler, 卡納)는, 사회 복무의 길을 통해 전통 유가의 윤리적 이상과 기독교의 윤리적 이상 사이의 접촉점들을 최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0) 그들의 목표는 그리스도화 된 사회를 건립함으로써 당시 국내의 위급한 국면을 구해내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희망은 그들의 신학(神學)관념과 관련이 있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장래의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오늘날 세계의 각 사람들이 함께 이 땅에 세워야 할 이상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복무를 제창하는 것은 기독교가 국가의 중건(重建)을 적극 돕는 종교임을 표명하는 일종의 실천호교학(實踐護敎學, 실천적인 변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은 19세기 중엽 이래 복음 메시지가 변화해온 사정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다. 우리는 중국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해가 증진되어 감에 따라 그만큼 더 그들의 복음 메시지의 사회적 관련성도 커진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우리가 1920년대의 토착신학(本色神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것들의 대부분은 해외선교사들의 신학 관점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비교적 다수의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토착화 신학과 관련된 발언들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에 국내의 일반 지식 청년들은 이제 더 이상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혹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서양 종교라고 매도하고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국내의 기독교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으며 국가의 전도(前途)와 사회의 동태, 국민의 생활에 대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시기에 마땅히 대응(연구)해야 할 하나의 ‘사회 문제’ 11)가 되었다.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우리는 지지난 호의 제I장에서 중국교회 지도자들 중 몇몇 사람들이 당면한 중국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과학과 민주의 원칙에 부응하는 신종교(新宗敎) 건립을 시도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기독교를 국가가 직면하고 있던 위기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인민의 생활을 위해 복리(福利)를 모색하는 종교라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그들이 선포한 메시지는 지난날 “예수 자신이 말씀하셨던 순수하고 단순한 복음”12)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기준은 당시 토착화 신학의 형성에서 기초가 되었다. 한 기독교 지도자가 말한 대로 “우리는 반드시 이전에 산상수훈을 설교하셨던 분의 순결함과 겸손한 태도에로 돌아가야 한다.”13) 무엇이 1920년대 중국 기독교인의 복음 메시지였는가? 중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아래에서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정의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조자신(趙紫宸)은 기독교가 비록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관적 체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나사렛 사람 예수의 칭호이니, 역사적 예수에 제한된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인격 정신이니, 박애, 경건한 신앙, 희생, 순결 등의 여러 덕목들이다. 이것은 예수의 내면에 충만해 있으며, 예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또한 힘 있게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그리스도는 때가 되어 소멸하였지만 정신적(영적) 그리스도는 날이 갈수록 더욱 빛난다. 날이 갈수록 더욱 빛나는 정신적 그리스도는 성령이며 구원의 법도요 중생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이다. 기독교 종교는 변화하는 조건들에 종속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14)
 

조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영적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 또한 그에게 친근히 다가갈 수 있다. 그는 그의 저작 중에서 사람이 그리스도와 관계하면서 가지게 되는 주관적인 경험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독교는) 그것의 기원과 그것의 실현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 위에 있는, 일종의 의식(意識), 일종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확실한 경험,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다. 다른 말로 해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생명,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의식(意識)을 의미한다. 그것의 내용은 다방면의 것을 포괄하고 있으니, 곧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자녀들로서의 인간들의 확실한 관계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다.15)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조자신으로 하여금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 사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선교 사역의 사명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중국인들이 이 하나님의 나라 혹은 형제애 속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16) 모든 기독교적 노력의 궁극적 목적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진사(進士)였지만 급진적인 기독교 사상가가 된 연경(燕京)대학 교수 오뢰천(吳雷川)17)도 유사한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身份)을 중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참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를 따라 그의 신앙과 도덕을 본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오직 예수의 인격과 덕성만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기에 적합하다.18) 그렇지만 그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가 다른 신앙들과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적 견해는 그가 자각한 사명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기독교를 통해 국난(國難)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독교사상은 적지 않은 정치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성경(聖經)에서 예수는 “내가 아버지의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라고 하시고, 또 “내가 이것을 위해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함이다.”(요 18:37)라고 말씀하셨다. 오뢰천은 이 ‘일’과 ‘증거’는 반드시 “당면한 시대적 필요와 우리들의 능력에 비추어”19)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대가 다르므로 우리들의 오늘날의 사명도 그 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갱신(更新, regeneration)은 비록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마땅히 사회의 변혁으로 발전되어 나아가야 하며 전체의 복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20)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지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합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우리는 사회를 변혁하고, 함께 국가를 재건(再建)하는 위대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본받기’는 또한 서보겸(徐寶謙)의 기독교에 대한 신학적 정의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알고, 또한 그를 본받아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예수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21)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가 하나님과 합일한 신비한 경험이며, 그 경험이 다시 그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행한 사랑과 용서의 희생적 삶과 완벽하게 결합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두 가지의 연관된 측면들 사이의 유사한 결합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경험이며, 다음으로 도덕적 빛(원칙)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절제된 생활이 그것이다.22)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하는 이 신학적 핵심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신앙의 다른 교의들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진리들의 빛 안에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수정될 수 있는 ‘작업가설들’이다.23) 서보겸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수직면 이외에 기독교인 개인과 사회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수평면을 또한 강조하였다. 그는 근대(현대) 종교로서 기독교는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영성(靈性)의 배양, 양자에 똑같은 강조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24)
 

간우문(簡又文)의 견해에 따르면 그 옛날 예수는 이스라엘 전통을 변환시켜 일종의 새로운 종교 신앙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제자들에게 환경에 잘 적응한 모범적 사례를 제공하였다. 후일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교와 희랍의 신학사상을 통합하였다. 유대인이 인격적인 도덕관념을 강조하였다면, 희랍인의 신관(神觀)은 인격이 없는 형이상학적 절대 의식이었다. 바울의 신학사상은 그것들의 좋은 점을 융합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하고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신성을 산출해낸 것이었다.25) 수 세기에 걸쳐 기독교는 이론과 실천 양 방면에서 생활환경의 변천에 꾸준한 적응 과정을 거쳤다. 간우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시대는 자기 시대의 기독교를 가지며, 그 특질은 그 시대의 특정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 기독교는 항상 형성 중에 있다.”26)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은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 환경에 대한 적응과 개조, 인륜관계의 배양, 도덕 원칙의 건립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른 인격의 수양에 있다.
 

20년대와 30년대 왕명도(王明道)의 신학사상은 기독교의 구속관(救贖觀)을 중심으로 하였다. 왕명도는 순정(純正)한 복음은 곧 ‘중생(重生)’의 진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당신은 반드시 중생하여야 합니다.’”27) 이러한 생명의 개조는 결코 사람의 노력에 의지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교육을 보급하거나 도덕을 제창하거나 혹은 사회를 개량하는 등의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도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목적은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가 되어 구속의 기회를 가져오고자 함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미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자기를 구원할 어떤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우리가 예수의 구원 위에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도 없다. 다만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 예수님을 전심으로 믿기만 하면 그 즉시 구원을 얻게 된다.”28)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속의 조건이지만 그러나 믿음은 결코 일종의 심리적 작용은 아니다. ‘자력(自力)’의 표현이 아니며, 또한 인간과 하나님의 합작의 결과도 아니다. 왕명도는 이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주도적 활동이며, 그리스도의 희생이 만들어낸 은혜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기독교의 귀중한 가치는 곧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를 받게 하고, 생명이 개조되며, 생활에 소망을 가지게 하는 데 있다. 1920년대 중국교회의 복음 메시지는 위에서 서술한 다섯 인물들의 논설을 통해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의 중점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 위에 있었다.29) 조자신의 ‘의식(意識)’, 오뢰천의 ‘본받기(倣效)’, 서보겸의 ‘봉사(服務)’, 그리고 간우문의 ‘적응(適應)’, 그리고 왕명도의 ‘중생(重生)’은 모두 각각 복음 메시지의 중요한 일면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이들 복음 메시지는 당시 막 일어나고 있던 반기독교운동에 어떻게 대응하였던가?
 

1) 예수의 인성(人性)과 그의 인격
1920년대의 반종교 활동은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중국교회는 다방면에서 엄중한 타격을 입었으며, 행정 조직과 사회봉사와 복음전파의 사역에서 장애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또한 신학 이론 방면에서도 적지 않은 비평에 부딪히게 되었다. 기독교를 반대하던 인사들은 다양한 동기와 입장에서 기독교의 신학사상을 공격하였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독교 공격 언설은 특별히 예수의 인격에 대한 것이었다. 국민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건설(建設)》이라는 잡지의 경영자였던 주집신(朱執信)30)의 글이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제목으로 그 잡지의 1919년 12월의 특집 ‘예수호’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떠벌이는 일개 우상으로서, 마음이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화를 잘 내고 즉시 보복하는 자이다.”31) 그는 성경과 교회 역사에 대해 조금 알고 있기는 했지만 피상적인 수준에서였다. 그가 예수를 해석한 중상 모략적 방식은 적지 않은 당대 기독교 신자들의 반박을 불러 일으켰다.
 

같은 글에서 주집신은 성경 속에서 상호 충돌하는 기록들을 지적해내고자 하였으며 그 출처의 의심스러움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예수의 생애와 관련해서 그는 독일의 생물학자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의 영향을 받아, 예수는 다만 마리아와 한 로마 병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서, 유대교의 제사와 로마 정부의 법률에 대항하여 일부 평민들을 이끌고 혁명에 종사한 인물로 보았다. 또한 그의 열두 제자들은 중국의 전통소설 《봉신방(封神榜)》 속의 12제자와 마찬가지로 여겼다. 성경 속의 예수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마태복음 25장에 실린 열 처녀의 비유를 인용하고, 그중 지혜롭게 행한 다섯 처녀의 행위는 진실로 비열하고 이기적인 것이니 어찌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는 원리와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실은 예수의 ‘이기적이고 잔인하며 오류에 찬’ 인격과 보복하기를 좋아하는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교회 역사상의 사적을 빌어 와 기독교를 훼방하여, 기독교회가 자유와 박애라는 가면 아래에 수없는 유혈의 박해와 종교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켰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진독수(陳獨秀)는 예수의 인격에 대해 그와는 또 다른 평가를 내렸다. 그의 지위와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한 그의 글들은 당시 기독교인들과 반기독교 인사들 모두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진독수는 중국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 중국 사대부들이 기독교를 서양 종교라고 구시(仇視)하고, 군중들을 미혹하게 하는 사도(邪道)로 규정하여 배격했던 것을 따라 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그 가운데서 시비 흑백을 분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32) 진독수는 기독교에 대한 접근(연구)에서 그 자신 나름의 취사선택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인격을 좋아했지만 기독교의 교리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기독교 변증가들에 의해서는 거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에 의하면 역사와 자연에 대한 근대의 과학적 연구들은 창조론과 삼위일체론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우리는 구(舊) 신앙을 폐기하고 따로 새로운 신앙을 찾아야 한다. 새로운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숭고하고 위대한 인격과 열렬하고 심후(深厚)한 정감이다.”33) 이런 식으로 그에 의해 기독교는 다만 도덕 윤리를 말하는 종교이며 일종의 종교 색채를 띤 인본주의로 축소되었다. 진독수는 중국인들은 예수의 인격과 정감을 “우리들의 피 속에서 배양하여야 한다. 예수의 고귀한 인격과 열렬한 정감(감성)은 우리를 냉혹함과 어둠과 더러움과 냉담함의 구덩이에서 구원하여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34) 예수의 희생과 관용과 박애는 중국인들의 좋은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한편 주집신의 글은 교회 인사들의 근심과 분노를 불러 일으켜 그를 반박하고 예수의 인격과 품덕(品德)을 변호하고자 하는 글들이 앞을 다투어 발표되었다. 열렬한 국민당(國民黨)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양균묵(梁均黙)35)은 《진광잡지(眞光雜誌)》36)에서 주집신의 글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의 변증적인 접근은 당대의 기독교 저술가들에게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주집신이 예수에 대한 자신의 공격을 지지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주집신이 성경 해석에서 착오를 범하고 있고, 교회 역사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글은 편격(偏激)한 이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였다. 양균묵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가 사생아라는 주장은 성경과 기타 초기의 역사 문헌상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며, 동정녀 탄생이 역사상 발생한 기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생명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서, 결코 인간 이성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경의 기록에 따라 예수의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인격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성취는 인류 역사상 새로운 기원을 이룬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예수에 대한 진독수의 우호적인 발언을 주집신의, 예수를 우상으로 부른 신성 모독적 발언을 반박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37)
 

간우문도 마찬가지로 주집신의 모독행위는 황당하고 불합리하여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역사상의 예수를 마땅히 그 본인의 성패와 득실에 근거해서 판단하여야 한다. 즉 가정적 배경이나 전통상의 조건의 우열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도덕 품격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것과 그가 후일 성취한 개인적 도덕성과 업적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38) 그는 예수의 인격이 완전하여 흠이 없다는 것은 그와 동시대 사람들의 증거를 통해 확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를 공격하고 대적하였던 일군의 바리새파 사람들조차 그의 과실을 찾아내지 못하였으며, 아울러 그와 항상 함께하였던 그의 제자들도 그들의 선생이 일을 잘못 처리하거나 행위가 바르지 못하다고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의 가까운 제자들이 그에게 바친 헌신은 그의 흠잡을 데 없는 인격을 증언하는 것이다.
 

양균묵은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집신이 성경의 의미를 왜곡한 부분에 대해 설명하였다. 마태복음 25장 비유의 중심 사상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으로서,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인데, 평소 각자가 행한 일에 따라 보응을 받을 것이요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11장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만약 자신의 삶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계하신 것이다.39) 그는 서구 역사상의 종교 박해는 분명히 인도(人道)를 위반한 죄악이라고 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유혈 사건이 종종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이 종교를 빙자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일으킨 것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기독교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변호하였다. 진정한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 원칙에 따라 생활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링컨이 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했던 것과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이 아프리카에서 행한 선교 사업 등과 같은 것들은 모두 기독교 신앙이 인류의 역사를 적극 개혁하여 왔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양균묵은 주집신에 대해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인간은 그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찼을 때 하늘 아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40)
 

주집신의 글은 광주(廣州) 일대에서 사람들의 상당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곳 민중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 12월 광주(廣州) 인근의 교회가 전도집회를 거행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들이 주집신의 글을 돌려 반기독교적 선전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는 반기독교 인사들이 집회의 성공적 개최를 시기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41) 《진광잡지》의 주편(主編)이었던 장역경(張亦鏡)42)은 주집신의 글에 대해 전심을 다해 조목조목 매우 상세한 반론을 제시하였다.
 

장역경은 주집신의 글의 실상은 무책임하게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소란을 피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예수의 일생은 말과 실천에서 일관적인 것이었으며, 그 정신에서 이타적이었고, 태도에서 비편파적이었으며, 행동에서는 헌신적이었다. 그의 박애와 화평과 헌신과 인애의 품격은 심지어 자신의 적들마저도 감복시켰다. 주집신 자신이 이미 예수가 얼마나 고상하고 탈속(脫俗)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그의 훼방은 맹목적인 것이었으며 완전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장역경의 분석에 의하면 주집신의 비판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그것에 역사적 증거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이다. 믿을만한 초기의 문헌기록들은 이미 명료하게 예수의 생애 사적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는 또한 일찍이 예수가 관부(官府)의 면전에서 재판을 받은 사실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아울러 초대 교회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플리니(Pliny the Younger)의 서찰들에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도시들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또한 로마 황제를 숭배하기를 거부하였는지에 대한 묘사가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그를 하나님으로 경외하였던 것이다.43)
 

주집신이 교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이롭지 않은 것이었다. 선전활동을 통해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그의 이론은 성경의 사실들을 왜곡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상의 예수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마침 교회가 힘써 “기독교인의 인격을 통해 나라를 구원한다.”라는 운동을 진행하려고 노력하던 시점에 주집신의 비판은 기독교 인격의 도덕적 기초를 직접적으로 뒤흔드는 것이었다. 만약 예수의 인격이 의심받을 수 있다면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그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호교적인 각도에서, 양균묵과 간우문 그리고 장역경은 이미 주집신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에 대해 성공적으로 반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성적 반박이 교회 안과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기독교에 대한 나쁜 인상을 고치도록 할 수 있었는지 하는 것은 실로 명확하게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미주    
1) Mary C. Wright, The Last Stand of Chinese Conservatism: The T'ung-Chih Restoration, 1862-1874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57) 참조.
2) Records of the General Conference of the Protestant Missionaries of China Held at Shanghai, May 10-24, 1877 (Shanghai: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 1878), pp.32-33.에서 인용.
3) 복음 사역은 일종의 영적 전쟁과 정복으로 여겨졌다. Rufus Anderson, Chinese Repository 15 (1846), pp.489-490; D. Z. Sheffield, "Christianity is a religion of conquest", The Chinese Recorder  14 (1883), pp.93-94.
4) Kenneth Scott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929), p.386.
5) Marshall Broomhall, The Jubilee Story of the China Inland Mission (Shanghai, 1915), p.193.
6) Lewis S. C. Smythe, "Changes in the Christian Message for China by Protestant Missionaries"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Chicago, 1928), p.31. 참조. 또한 C. William Mesendick, "The Protestant Missionary Understanding of the Chinese Situation and the Chinese Task from 1890 to 1911" (Ph. D.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1958).을 보라.
7) James Legge, The Religions of China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880), p.284.
8) The Chinese Recorder 1 (1869), p.31.에서의 F. S. Turner의 논의를 참조.
9) Peter Duus, "Science and Salvation in China: The Life and Work of W.A.P. Martin (1827-1916)" in American Missionaries in China, ed. Kwang-ching Liu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6), p.35. 참조. 또한 Ralph Covell, W.A.P. Martin: Pioneer of Progress in China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8).을 보라.
10) A. R. Kepler, "The Need for a Changed Approach to the People in Our Missionary Enterprise", The Chinese Recorder 51 (1920년 1월), pp.21-31.
11) <基督敎與中國人>,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37-38.에서의 陳獨秀의 말.
12) Hsu Pao-ch'ien(徐寶謙), "The Prospects for Christianity in China", p.320.
13) Timothy T. Lew(劉廷芳), "Chinese Renaissance--Christian Opportunity", p.19.
14) 趙紫宸, <基督敎在中國的前途>, 《眞理與生命》 제1권 제12기 (1926년 11월), p.338. Hsu Pao-ch'ien(徐寶謙) ed., "The Future of Christianity in China", 《眞理與生命》 (Special English Number) 제2권 제3기 (1927년 2월), p.3.
15) T. C. Chao(趙紫宸), "The Appeal of Christianity to the Chinese Mind", p.287.
16) Ibid., p.288.
17) 吳雷川은 1870년 江蘇(祖籍은 浙江)에서 태어났으며 엄격한 전통 유교식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98년 進士가 되었고 翰林院에서 일했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浙江 鄕校의 교수를 지냈다. 1911년 杭州가 제국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얼마간 杭州의 文官으로 임명되었으며, 浙江의 高等學堂 監督을 역임하였다. 1912년에서 1925년까지 그는 北京의 敎育部에서 參事로 일했다, 그는 1914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923년에서 1926년까지 《眞理週刊》을 편집하였다. 1922년 燕京大學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26년 첫 번째 중국인 副校長으로 임명되었으며, 1929년에는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Philip West, Yenching University and Sino-Western Relations, 1916-1952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pp.62-66. 참조.
18) 吳雷川, <基督敎與中國文化> (上海: 靑年協會書局, 1936), p.10; 또한 <論基督徒當如何效法上帝>, 《眞理與生命》 제4권 제9기 (1930년 1월), pp.8-11.
19) Hsu Pao-ch'ien(徐寶謙) ed., "The Future of Christianity in China", pp.3-4.
20) 吳雷川, <作基督徒的兩個問題>, 《眞理與生命》 제8권 제4기 (1934년 6월).
21) Hsu Pao-ch'ien(徐寶謙), "Uniqueness of Jesus from a Chinese Standpoint", 《眞理與生命》 (Special English Number) 제2권 제3기 (1927년 2월), p.30.
22) 徐寶謙은 그 이중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William Hocking의 용어인 'effortless(노력 없이)'와 'effortful(충만한 노력을 통해)'을 채택하였다. <什麽是宗敎?>, 《眞理與生命》 제4권 제6기 (1929년 6월), pp.9-11.
23) Hsu Pao-ch'ien(徐寶謙), ed., "The Future of Christianity in China", p.4.
24) 徐寶謙, <基督敎在中國的前途>, 《眞理與生命》 제1권 제12기, p.334. 또한 Hsu Pao-ch'ien(徐寶謙), "The Prospects for Christianity in China", p.20.을 보라.
25) 簡又文, <什麽是基督敎?>, 《生命月刊》 제2권 제1기 (1921년 6월), pp.1-3. 우리는 또한 이 글을 통해, 簡又文의 견해가 같은 세대의 서양 학자들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6) Ibid., p.6.
27) 王明道, <重生眞義>, 王正中 編, 《王明道文庫》 共7冊 (香港浸宣, 1977) 중 第2冊 《小徑》, p.6. 王明道에 관한 부분은 원래 이 책의 영어판에는 없었으나 중국어판에서 보충되었다.
28) Ibid., pp.23-24. 또한 <眞僞福音辨>, 《王明道文庫》 第7冊 중 《衛道》, pp.1-7 ; 13-16.
29) 寶廣林, <耶穌的硏究> (上海: 中華基督敎文社, 1928), 그리고 吳耀宗, <我所認識的耶穌> (上海: 靑年協會書局, 1929).
30) 朱執信의 에세이는 《建設》(1919년 12월)에 ‘耶蘇號’라는 제목으로 처음 선을 보였다. 이 에세이의 복사본들이 다음 해 크리스마스 시즌, 복음주의자 모임에서 배포되었다. 1922년의 반기독교운동 기간 동안 이 에세이는 반기독교도 운동에서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한 유효한 도구로 다시 사용되었다. 후에 같은 글이 江蘇省 國民黨 宣傳部에 의해 약 2,000자의 序文이 붙여져 함께 인쇄되었다. 이는 반대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주집신의 영향력은 그렇게 해서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張亦鏡, <論廣州大佈道的成績和反響>과 <讀了江蘇省黨務政委會宣傳部印朱執信<耶穌是什麽東西>的前頭語以後>를 참조. 이 글들은 張亦鏡 編, 《關於朱執信<耶穌是什麽東西>的雜評》 (上海: 美華眞信會書局, 1930)에 실려 있다.
31) 朱執信, <耶穌是什麽東西>,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37.
32) 陳獨秀, <基督敎與中國人>, 《新靑年》 제7권 제3기 (1920년 2월); reproduced in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37-50. 진독수는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민족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대안들에 대해 매우 열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0년 9월 共産主義者로 전향하였으며, 이 글은 그 전에 썼다. Benjamin I. Schwartz, Chinese Communism and the Rise of Mao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6), pp.18-24.
33)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44.
34)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41.
35) 梁均黙 (1899-1975)은 廣東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923년 廣東高等師範學院을 졸업했으며 廣東培正中學에서 가르쳤다. 그는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를 연구하는데 주력한 잡지인 《盡言週刊》의 편집인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이민국 관리에 의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國民黨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서 그는 汪精衛, 孫科 등의 비서로서 활동하였다. 1932년 孫科가 立法院 院長이 되었을 때, 그는 立法院 秘書로 임명되었다. 1920년대의 반기독교 운동 기간 동안 그는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글을 썼다.
36) 이 잡지는 남중국의 침례교 잡지로서,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을 대표하였다. 반기독교 운동 기간 동안 많은 변증적인 글들이 이 잡지에 실렸다. 심지어 T. C. Chao도 그들의 지적인 노력은 보수적인 교파들 사이에서 드문 예라고 칭송하였다. T. C. Chao, "Christian and Non-Christian Reply to the Anti-Christian Movement", The Chinese Recorder  53 (1922년 12월), pp.743-748.  
37) 梁均黙, <批評朱執信著耶穌是什麽東西之謬妄>,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163-167.
38) 簡又文, <耶穌是私生子嗎?>, 《眞理週刊》 제2권 제40기 (1924년 12월 28일); 또한 趙紫宸, 《基督敎哲學》 (上海: 中華基督敎文社, 1926), pp.223-224.
39) 梁均黙, <批評朱執信著耶穌是什麽東西之謬妄>, p.167.
40) Ibid., p.167.
41) 廣州에서 基督敎聯會가 1920년 12월 개최한 이 전도 집회에서는 약 3,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당시 선교활동 중에서 최고의 성과였으며, 이 때문에 또한 반기독교 인사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이 집회의 연사에는 周傳信, 余日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張亦鏡, <論廣州大佈道的成績和反響> 참조.
42) 張亦鏡은 1871년 廣西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교육받았다. 젊은 시절 이미 經史에 정통하였으며, 才人으로서 명성이 있었다. 남중국에서 가장 논리 정연한 기독교 대변인으로서 그는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지도적인 기독교 변증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廣州 《眞光雜誌》의 편집을 맡았으며, 美華浸會書局의 업무를 책임졌다. 五四신문화운동을 전후하여 그는 예리한 필체로 적지 않은 護敎的인 글을 썼다. 그는 전통의 儒, 佛, 道 사상과 당대 반기독교 풍조에 대하여 모두 깊이 있는 분석과 평론을 함으로써, 토착화 신학의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中國郇報》, 《眞光月刊》, 홍콩의 《眞光雜誌》, 《大公日報》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그 후 그는 上海의 《眞光雜誌》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華英拜孔風潮記》, 《糾謬新編》, 《大光破暗集》 등이 있다.
43) 張亦鏡, <論廣州大佈道的成績和反響>.

 





사진 | 바이두(book. kongfz.com)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인쇄하기   이메일보내기   
   
110-812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29길 25, (명륜3가 명륜빌딩 202호)   Tel : 02)745-0780~2, 070-8236-1270   Fax : 02)745-0786    E-mail : sinim@chol.com
Copyright 중국어문선교회 All Rights Reserved.     Product by gmgl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