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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지에리의 중국사절단 파견 노력 루지에리가 마카오로 철수하면서 루지에리가 꾸준히 제기해 온 교황사절단의 중국 파견 문제에 대해서도 선교단 차원에서의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루지에리는 중국땅을 밟은 후 일찍부터 중국 황제의 허가를 얻어야만 선교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가 있으며, 이를 위해 교황사절단의 중국 파견만이 이러한 중국선교의 문을 제대로 열 수 있는 길임을 확신했다.
1581년 11월 12일 루지에리는 로마 교황청에 올린 보고서신에서, 중국선교에서 최대의 난제는 백성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속적 관계, 즉 위로는 부모, 관원, 그리고 가장 높게는 황제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라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반드시 황제를 알현하여 천주교를 전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야 제대로 중국선교가 가능하다고 지적하였고, 약간의 진상품이 있으면 충분히 추진 가능하다고 제안하였다.
루지에리는 1584년 1월 25일, 1586년 11월 8일 등 예수회 총회장 클라우디오 아쿠아비바(Caludio Aquaviva, 阿桂委瓦)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도금된 시계를 보내 주면 이를 황제에게 중국선교 허가를 받기 위해 진상물로 올리겠다고 하였다. 루지에리는 고위 지방관들과의 교분을 통해 선교 거점의 확보가 가능하지만, 그들의 임기가 있어서 지속적인 선교 기반의 확보를 위해서는 황제의 선교에 대한 허가를 받는 것이 절실히 필요함을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꾸준히 교황의 중국 황제에 대한 사절단 파견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루지에리의 이러한 주장들은 발리냐노로부터 분명 지지를 받았다. 발리냐노의 이러한 결정에는 일본사절단의 로마 파견의 성과에 고무된 측면도 있었다. 로마를 다녀 온 일본 왕공 4명이 기독교 신앙의 대표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온 뒤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발리냐노는 교황이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면 동일한 좋은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발리냐노는 로마로 보내 중국사절단 파견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적임자로 루지에리를 선택했다. 교황사절단의 중국 파견 계획의 시작과 준비 모두 루지에리에게서 나왔을 뿐 아니라 루지에리가 중국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발리냐노는 앞서 드러난 몇 차례 선교 사업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루지에리가 현지를 떠나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유럽 귀환 후의 루지에리 루지에리는 1588년 12월 20일 (일설에는 11월 25일) 마카오를 떠나 말라카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여 이듬해 9월 13일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마드리드로 가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를 알현했다. 국왕은 그를 특별히 대우했고, 자신의 권한을 사용하여 교황과 함께 사절단 파견을 촉진하도록 하겠다고 응답했다. 루지에리는 마드리드를 떠나 나폴리를 경유하여 로마로 가서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중국 황제에게 보낼 교서 〈치대명황제만력국서(致大明皇帝萬曆國書)〉의 초안을 1590년 3월 중국어로 작성했다.
루지에리가 초안한 국서에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앞부분에서는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상제)을 지극히 높으신 참 주님이며 아버지로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는 학식이 풍부한 신부들을 세계 각 지역으로 보내 주님의 참 가르침을 전하고 선포하고 있으며, 인류가 이 성스러운 가르침을 믿어서 천국에 들어가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교황은 사절단으로 프란시스코회 소속 버투오(伯鐸), 바오로(保祿), 리루오(李諾)와 마티야(馬弟亞) 등 4명을 선임하였고, 예수회 소속 마테오 리치, 알메이다, 루지에리 등은 황제에게 예물을 올리는 지원 역할을 맡겼다. 교황사절단의 파견 건의는 루지에리에게서 비롯되어 발리냐노의 승인하에 교황청에 올려진 것이었고, 그 건의의 핵심은 중국에서의 선교 자유와 영구 거주권을 신청하는 것이었지만 이 교서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결여되어 있었다.
루지에리의 당초의 희망이 담기진 못했지만 그나마 이러한 교황 사절 파견 계획도 끝내 방치된 채 추진되지 못했다. 식스투스 5세가 1591년 8월 27일 서거한 뒤 그 계승자 우르바누스(Urbanus) 7세,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4세, 이노센티우스(Inocentius) 9세가 1년 반 사이에 차례로 서거하면서 로마 교황청은 사절단 파견 계획을 집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포르투갈 국왕은 사절 파견의 성공이 중국 무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면서 사절단 파견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예수회 총회장 아쿠아비바는 국서를 통한 사절단 파견이 예수회 선교회에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라 느끼게 되면서 점차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각 방면에서 관심을 가졌던 교황사절단의 파견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고 점차 기억에서 잊히고 말았다. 초조와 기다림과 실망의 과정 속에서 루지에리는 일생 중 가장 암담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 그는 고향인 나폴리 왕국의 예수회 지부로 보내져 일반 선교회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놀라대학(Collegio di Nola, 諾拉)에 있는 동안 그는 성회장의 참의, 교수신부, 고해신부 등을 담당했고, 후에는 살레르노(Salerno)로 옮겨 비슷한 직무를 수행하다가 1607년 5월 11일 그 곳에서 사망했다.
루지에리의 저술 업적 루지에리는 유럽으로 귀환한 뒤 중국선교를 위해 다시 중국을 찾을 기회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마음속에서 중국을 지우지 않고 유럽인들에게 중국을 소개하는 저술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그는 안토니오 포세비노(安朵里奧 波色威諾, Antonio Possevino) 신부가 조직한 집회에 꾸준히 나가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중국 견문을 소개했고, 관련 내용은 포세비노가 1593년에 출판한 《정선문고(精選文庫, Bibliotheca Selecta)》에 소개되고 있다.
특히 루지에리는 중국 유가 경전 《대학(大學)》을 라틴어로 번역 소개하였고, 중국 지도와 제작 방법을 유럽에 전하였다. 루지에리는 1588년 중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유가 경전 사서(四書)의 라틴어 번역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 루지에리는 사서 번역 수정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과 관련된 라틴어 일부 번역문은 1593년 포세비노의 《정선문고》에 실렸다. 이것은 유럽에서 출판된 최초의 중국 유가 경전 소개 번역서이다. 루지에리의 《대학》 전체 번역문이 출판되지는 못하였는데, 이것은 발리냐노 등의 강한 비판적 태도의 영향으로 보인다. 출판되지 못한 원고는 로마의 이탈리아 국립도서관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루지에리는 유럽으로 돌아올 때 다량의 중국 자료와 중국 지도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루지에리가 이탈리아로 귀환한 후 지도 제작 사업으로 이룬 주요 성과는 명대의 《중국지도집(中國地圖集, Teatro Cinese)》이다. 이 지도집에는 모두 37쪽에 이르는 지리 설명과 28폭의 지도가 들어 있다. 그중에는 명대 15개 성(省)별로 분석한 도면, 성과 성간의 거리, 산지나 주요 하천, 농업 생산, 광산, 부(府)·주(州)·현(縣) 등 행정 구역과 예하의 위(衛)·소(所), 즉 명조 군 주둔지까지 포함되어 있다. 루지에리의 《중국지도집》이 그 당시에는 공개 출판되지 않았지만 수집된 지도집 원고는 로마의 이탈리아 국가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집은 서양에 중국에 대한 이해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바가 큰 것으로 대단히 높이 평가된다.
루지에리는 중국 조경에 있을 당시 대략 1584년 11월(명 만력 12년)에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을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루지에리가 서방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중국어로 기술한 기독교 포교용 교리 해설서이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각종 신앙, 풍습 습관, 종교 사상에 대해 논박하면서도 서양 기독교 교리를 중국 윤리 가치관, 비유 대구법과 서로 결합시키는 이른바 적응성 선교 노선의 기초를 세우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지에리는 유럽으로 귀환한 후에도 〈중국인과 협력하는 방식에 관한 약간의 의견(關于協助中國人的方式的若干意見)〉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원래 루지에리가 중국인 영혼을 귀화시키는 것과 관련된 사항을 총회장에게 보고한 내용이며,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년간 선교 경험에 대한 1차적 총결산이었다. 그 내용으로 추론해 보면 루지에리가 유럽으로 돌아와 나폴리에 도착한 뒤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는 《요리문답》 등 종교 서적을 통해서 중국인 영혼을 귀화시키여 한다는 점, 중국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 입교시킬 때 반드시 먼저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줄 것, 세례를 받은 뒤에는 항상 경건을 유지하게 하고 부녀자는 교회에 오지 말게 하여 중국인들의 오해와 염려를 사지 말도록 할 것, 선교 과정에서 중국 풍습과 관습에 적응할 것,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숙지하고 그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봉사할 것, 황제의 허가를 얻어야 선교가 안정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저작과 저술활동은 이후 본격적인 중국선교의 진행에 중요한 기반을 이루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진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