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사명으로 부름 받은 한 가족” <중주>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매달 ‘발행인 통신’을 쓸 때 으레 앞의 말(“<중주>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고는 합니다. 이 말은 이제 ‘발행인 통신’의 투식어(套式語)처럼 되었는데요, 가만히 살펴보면 <중주> 가족, 그리고 중국 사역 동역자들 간에는 참 끈끈한 유대감과 아름다운 교제가 있음을 깨닫고는 합니다.
저는 중국 사역과 관련해서 단체카톡방 등 SNS를 통한 만남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 거기서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안부를 물으며, 축하할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격려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위로하고, 건강 유지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사연들을 대할 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받고는 합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로 시작되는 찬송이 있는데요(찬송가 221장). “주 믿는 형제들” 대신에 “중사의 일꾼들”(‘중사’는 ‘중국 사역’을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줄인 것입니다.)을 넣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인류는 하나 되게 지음 받은 한 가족 우리는 그 속에서 협조하며 일하는 형제와 자매로다 형제와 자매로다”(찬송가 475장)의 “인류는 하나 되게 지음 받은 한 가족”을 “우리는 한 사명으로 부름 받은 한 가족”으로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진심을 담아 다시 한 번 8월의 인사를 드립니다. <중주> 가족 여러분, 정말 안녕하시지요?
홍콩 시위 소식을 들으며 요즘 매스컴은 홍콩의 시위에 대한 소식을 계속해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중국 사역을 위해 홍콩을 자주 방문했던 관계로 홍콩 주민들의 사고나 행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체험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편인데, 그들이 그같이 강하고 줄기차게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거, 의외인데?’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홍콩의 중국 반환(回歸) 22년 만에 호된 홍역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홍콩 시위는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때문입니다. 이 법이 홍콩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홍콩에서 조심스럽게 중국 사역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는데요,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홍콩의 교회와 교인들은 이번 시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30년 전에 중국의 톈안먼(天安門) 시위 무력 진압 사태가 벌어졌을 때 홍콩에서는 교회들이 앞장서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홍콩의 선교기관들 가운데 매스컴 기관들이 이 소식을 한국으로 전해 한국의 언론들이 그것을 비중을 두고 보도한 일이 기억납니다. 예전보다는 그 역할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홍콩이 중국 사역의 중요한 지점 거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송환법 문제, 이를 반대하는 시위, 이와 관련된 소식을 대하는 우리는 홍콩교회와 선교기구들, 그리고 홍콩을 통한 중국 사역을 기억하며 두 손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요즘 중국교회 이야기를 할 때는 중국 당국의 박해 이야기를 빼놓으면 알맹이 없는 과일처럼 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이른바 ‘신종교법’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종교사무조례 개정안이 시행될 때 어느 정도 각오는 하였지만 이렇게 심할 줄을 정말 몰랐다고 다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신(新)문화대혁명’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 사진 | 비터 윈터
그런데 한구석에서 ‘지금은 중국교회가 다시 한 번 순수해지기 위한 기간이다’라는 세미한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며 ‘주여, 그렇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기도를 하게 됩니다. 작년은 중국 개혁개방 40년의 해인데, 중국교회는 개혁개방과 함께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교인 수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습니다. 그와 함께 그늘진 면도 많아졌습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가 중국교회에 스며들었고, 이단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셨는데(계 2:4) 중국교회는 박해 받을 때의 순수함과 열심을 멀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재림에 대한 열망이 식은 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중국 성도들의 편지 속에는 ‘마라나타!’라는 음성이 보이지 않게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후에는 그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림을 의식하며 살면 경건하지 말라고 해도 경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중국의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을 통해 그때의 그런 순수함, 재림에 대한 열망이 다시 한 번 회복되고, 고착되어 흔들리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74년 전인 1945년의 이 달에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삼천만이 다함께 해방을 기뻐했지만 무엇보다도 기뻐한 것은 한국교회였습니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국가의식’이라는 명목으로 신사참배를 공식화했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예배드리기 전에 천황이 있는 곳을 향해 궁성요배(宮城遙拜)를 먼저 해야 했습니다. 어쩌다가 일제강점기 말의 교회 주보나 교회 행사의 순서지를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저절로 ‘이거야 원…’ 하게 됩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는 순서가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고, 총후봉공(銃後奉公)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후봉공’이라는 것은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뒤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굴종과 질곡의 암흑과 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해방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8․15 해방을 맞이한 이후 보여준 모습은 그리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의 자유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신앙의 절개를 굽힌 일이 많았던 것을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 되어 해방된 조국을 복음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출옥 성도들 중심의 교회재건운동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사참배 문제로 서로 정죄하고 갈리지는 일이 많았던 것이 해방 뒤에 한국교회가 보여준 두드러진 모습이었습니다.
8월을 맞으면서 우리는 감사와 회개, 용서와 화해, 하나 됨, 이런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중국 사역의 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달의 ‘기획’ 글은 중국교회의 신앙고백 문제입니다.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요. 신앙고백은 사람의 몸에서 척추와 같은 것인데 이번 달의 ‘기획’ 글이 중국교회의 척추가 건강한가를 재어보는 다림줄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척 덥습니다. 생뚱맞게, ‘친서(親暑)의 미학(美學)’이란 말이 느닷없이 .떠오릅니다. 덥지만 짜증내지 않고 더위와 잘 사귀며,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친서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8월을 친서의 미학 가운데 잘 보내면서 9월에 만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사진 | NewsDay 캡처 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 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