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지그림1.JPG) 루지에리의 조경 정착 조경(肇慶)에서 선교하도록 초청받은 루지에리는 놀라움과 기쁨에 젖어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고, 1583년 9월 초순 마테오 리치와 통역과 함께 중국 관리의 보호를 받으며 관청의 선박을 타고 마카오를 떠나 10일 조경에 도착했다. 그들은 지부 왕반을 만났고, 성내에서 정착할 부지를 둘러보고 한 곳을 고를 수 있었다.
전에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인도로 루지에리 일행은 조경 동쪽 근교 강가에서 신축 중인 팔각구층탑 앞에 건물을 짓기로 하여, 왕반 동의를 얻었다. 이 탑은 11개 현성으로부터 모금하여 ‘화탑(花搭)’ 즉 ‘숭희탑(崇禧塔)’으로 건립하여 이 지방의 복을 빌기 위해 건축 중이었다. 탑 부근에 지부 왕반 자신의 조각상도 세우고 ‘생사(生祠)’로 삼으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던 지부 왕반은 이곳에 외국 선교사의 독특한 양식의 가옥을 추가되는 것이 더 멋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9월 14일 왕반은 양광 총독의 가옥 건립 신청 허가서를 받아 전달하였고, 그 다음날 숭희탑 부근에서 가옥 건립 부지를 선정하여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탑 건립 공사를 주관하던 감독관과 이 지역 수재(秀才)들이 외국인들로 인한 소란이 있을 것이라는 반발이 있자, 지부 왕반은 선교사들이 중국 법률을 준수할 것과 동료 선교사들이 이곳으로 합류하지 않을 것임을 굳게 서약하게 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가라앉혔다.
현지 주민들의 물자(수천 장의 벽돌 기와와 많은 목재)와 인력의 지원 하에, 유럽풍의 푸른 벽돌 기와에 흰 석회 벽으로 지은 1층 건물이 1584년 12월 완공되었다. 대문에는 선교사의 성품과 열정에 대한 찬양과 총독이 허가하고 지정하여 선교사에게 내어준 가옥으로 누구라도 함부로 들어가서 소란을 피울 수 없으며 위반자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게시되었다. 얼마 뒤 선교사들은 조경지부(肇慶知府) 관인이 찍힌 땅 증여 증명서와 선교사들이 광주, 마카오 또는 국내 다른 지역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문서도 받았다. 이로써 사비에르와 발리냐노 이래 오랫동안 꿈꾸던 내지선교 기지 확보의 꿈이 루지에리의 손에 의해 실현되었다. 루지에리의 조경 성당 준공 그러나 선교단이 오랫동안 마카오로부터 재정지원을 얻지 못하게 되면서 빚이 많아지자 루지에리는 부득이 그해 초겨울 마카오로 가서 경비 조달에 나섰다. 모금에 반년여 시간이 소요되어 루지에리는 이듬해 1584년 4월 마카오 포르투갈 상인이 후원한 자금을 갖고서 조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중단된 건축을 계속하여 5월 중 서양식 2층 건물이 정식으로 준공하게 되었고, 뒤에 부근의 단층 가옥 몇 곳을 사들여 철거한 뒤 화원으로 조성했다.
2층에는 방 4칸, 거실, 베란다가 있었고, 아래층에는 방 이외에 가운데에 작은 성당이 있었다. 성당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세워지고, 벽에는 유럽 문자로 표기된 세계지도가 걸렸다. 주위에는 중국인들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인 프리즘, 시계, 해시계, 양장 서적, 벨벳(天鵝絨) 등 유럽에서 건너온 물건들이 진열되었다. 11월에는 건물에 붙여 18척에다 8각형 모양의 종탑이 세워졌고, 종루에서는 매시간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져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조경에 건축된 성당의 명성은 현지인들에게 숭희탑보다 크게 앞섰으며 앞 다투어 참관하는 명소가 되었다. 조경 지부 왕반은 건물 입구에 ‘선화사(仙花寺)’, 응접실에 ‘서래정토(西來淨土)’라고 그가 직접 쓴 2개의 편액을 걸게 했다. 이 두 편액으로 인해 사회 여러 계층에서 선교사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으며 총독 아문을 방문한 각지 관원들도 다투어 이곳을 참관하려고 했다. 
루지에리의 조경에서의 선교활동 루지에리 등은 거류지와 성당 건립에 이어 선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루지에리는 이교도인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려면 가장 먼저 선교사가 정결한 생활 방식을 통해 훌륭한 도덕적 수양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루지에리는 중국 언어와 문자 학습을 증진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명망 있는 중국학자를 스승으로 삼고 선교단의 서고에 소장한 많은 중국 서적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중국어와 한문을 연구하고 익혔다. 이후 1588년까지 루지에리와 마테오 리치는 중국선교사들의 중국어 학습을 돕기 위해 두 권의 중국어 학습서를 함께 편찬했다. 일명 《평상문답사의(平常問答詞意)》로 불리는 이 책은 문답 대화체 형식으로 라틴 자모병음을 응용해서 한자의 독음으로 주석을 단 것이었다. 또 다른 한 권은 최초의 포르투갈 중국어 사전이었는데, 매 쪽마다 제1란은 포르투갈어, 제2란은 이탈리아어의 로마자(라틴)병음, 제3난에는 한자, 제4난에는 이탈리아 단어로 구성되었다. 이 두 책은 중국선교를 위한 언어 학습을 시작하는 선교사들에게 아주 유용한 길잡이가 되었다. 루지에리는 동시에 중국인들이 책을 좋아하고 있으므로 입으로 전하는 것보다 책으로 전하는 것이 더 효율적임을 간파하였고, 중국어로 기독교 교리서를 편찬하여 전파하는 일에도 착수하였다. 루지에리는 조경 거류 허가를 받기 전에 이미 중문으로 번역한 《천주경(天主經)》, 《성모경(聖母經)》 그리고 《천주십계(天主十誡)》 등을 출간하여 일부 중국 사대부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다. 루지에리는 조경에 도착한 뒤 중국 지식층에게 《천주십계》보다 훨씬 더 잘 갖추어진 기독교 교리 해설을 제공하기 위해, 중국어 교사와 마테오 리치의 도움 아래 이미 4년 동안 걸려 쓴 기독교 교리서인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의 최종 수정 작업을 했다. 이 책은 시찰원 신부의 심사승인 과정을 거쳐 1584년 11월 (만력 12년) 광주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조경 지부 왕반이 문장을 다듬었고, 출간 후에는 그의 추천으로 교회를 참관하러 온 지방 관리들에게 《천주성교실록》 몇 권씩을 갖고 가도록 하여 다량의 책이 배포되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뿐 아니라 조경을 방문하는 이웃 나라 인사들의 손을 통해 필리핀, 베트남 등지로 전해졌다.
루지에리는 조경에 머무는 동안 내방자를 예절을 갖추어 정중히 대함으로써 상류층 관리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마침내 영세 의식을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는 신도를 얻고자 했다. 내방자들 가운데 절대 다수는 호기심으로 찾아 온 사람들이었으나 그 중에는 학식을 갖추고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가진 중국인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루지에리와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가 중국인의 신앙을 무시하지 않고 다만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기독교 교리와 고대 유가사상 간의 소통의 길을 열도록 노력했다.
루지에리 등은 정성스럽게 고위층 관원들의 방문을 맞이하는 동시에 일반 민중들 속에서 조심스럽게 처음으로 신도를 귀화시키는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루지에리가 조경에서 교구를 개척한 지 2년 동안 영세를 준 교인은 단지 12명에 불과했고, 1586년 11월 교인이 40여 명으로 늘어나는 데 그치는 등 선교활동을 신중하고 선별적으로 전개하였다. 중국 사대부와의 교제와 지식인의 개종을 중시한 것, 교인들을 늘리기 위해 종족, 동향(同鄕), 사제(師弟) 등 공고한 종법윤리 관계를 주의 깊게 이용하는 것 등 명청(明淸)대 중국선교의 기본적인 특징은 루지에리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경의 교구 개척 초기부터 자리 잡은 선교전략이었다.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