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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번 호부터 대략 12회에 걸쳐 나누어 연재될 이 글은 Wing-hung Lam의 Chinese Theology in construction (1983, William Carey Library.)을 번역한 것이다. 지면상 부분적으로 생략하여 싣게 될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이 책의 중국어판이라고 할 수 있는 《風潮中奮起的中國敎會》(1980, 天道書樓出版)을 참조하여 내용을 보충하였다. 저자 임영홍(林榮洪, Wing-hung Lam)은 홍콩 출신으로 1969년 홍콩대학에서 물리학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에 미국의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M.Div.과정을 마쳤으며 1978년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역사신학 분야로 Ph.D.학위를 취득했다. 프린스턴 시절에 그는 프린스턴 중국인교회에서 목사직을 담당했으며, 그 뒤에 토론토의 Chinese Ling Liang Church의 임시목사가 되었다. 1978년 이후로 그는 홍콩의 중국신학연구원(China Graduate School of Theology)에서 신학과 교회사를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생적인 중국 신학 분야에서 저명한 저작인 Wang Ming-Tao and the Chinese Church의 저자이기도 하다.
역자인 문석윤은 1985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5년 같은 학교에서 《朝鮮後期 湖洛論辨의 成立史 硏究》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8월부터 2006년 8월까지 명지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었고, 2006년 9월 이후 현재까지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하남시에 있는 언약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영어판 서(序)〉 중국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시기에 많은 선교가 행해졌지만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중국 신학이 있었던가? 이것은 미국에서 내가 학위과정을 밟는 수년 동안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내가 좀 더 철저하게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탐색을 하도록 몰아 붙였던 질문이다. 지금 내어놓는 이 책은 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 시기의 중국교회에 관한 신학적 사례 연구의 과정에서 내가 발견한 것들을 서구의 학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는 것으로 원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교회사학과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것이다 (…).
〈중국어판 서(序)〉 본서는 근대 중국교회 사상사 탐구의 한 시도로서 집필되었다. 20세기 이래 화인(華人)교회는 줄곧 토착화(本色, 현지화)운동을 제창하여 왔으며, 교회조직과 신학사상 방면에서 모두 자양(自養), 자리(自理), 자전(自傳)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하여 왔다. 20년대의 중국교회는 토착화운동이 극히 번창하던 시기로서 토착화 신학을 연구하는 데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본서를 집필하는 데는 양 방면의 제한이 있었다. 첫째, 20년대는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여서 당시 발생했던 일 중 많은 것들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참고할만한 자료도 매우 부족하다. 둘째, 그 때문에 일차적인 역사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 홍콩과 대만 두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시기의 교회 관련 문헌이 많지 않아서, 필자는 주요한 자료들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미국의 각 대학 도서관들에서 찾았다. 프린스턴대학교, 뉴욕협화신학원, 하버드대학교, 시카고대학교, 그리고 스탠포드대학교 등이 그에 해당한다.
본서의 목적은 주로 20년대 중, 반기독교운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토착화 호교신학(護敎神學)을 연구하고, 아울러 당시 기독교회의 실상에 대해서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데 있다. 본서의 논의 범위는 기요파(基要派, 근본주의), 자유파(自由派, 자유주의), 본색파(本色派, 토착화 신학) 등을 포함한 다양한 신학 전통에 미친다. 그것들은 기독교운동의 다양한 부분을 대표한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과 대표성은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서술하는 이는 반드시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고서 하나하나 평술(評述) 하여 종합적으로 당시 교회의 동태에 대해 한 폭의 온전한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역사학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두 개의 문제는 첫째는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이고, 둘째는 ‘그 일은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어떤 일이 발생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다른 각도로부터 본다면 역사학자는 마치 잠시 동안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신분, 자신의 시대와 배경을 잊어버린 것처럼 해야 하며, 아울러 자기 자신을 역사 속으로 온전히 던져 넣어 동정(同情)과 비평(批評)의 안광(眼光)을 가지고 역사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며, 동시에 충실하게 그것을 독자의 눈앞에 제시해야 한다. 어떤 역사학자는 일찍이, 누구든지 기꺼이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그 사람이 비로소 역사적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태도가 부족한 역사학자가 쓴 책은 편파적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을 견고히 고수하고 있으며, 홍콩신학연구원의 신앙선언에 동의한다. 본서를 쓸 때 필자는 역사학자의 사명을 나의 임무로 삼았으며, 아울러 불편부당한 태도로 20년대 중국교회의 토착화 신학의 동태(動態)를 연구하고 당시의 정황에 대해 엄정하게 서술할 것을 희망하였다. 필자는 이 시기의 역사가 오늘날의 화인교회에 대해 주는 교훈이 분명 가볍게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역사의 서술은 또한 실사구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화인교회의 이후의 발전에 복을 주셔서 이 책이 자그마한 공헌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 책이 화인 교회의 전도(前途)에 관심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여 교회역사 연구의 행렬에 참여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론 근대 중국교회사 연구에서 1920년대는 가장 흥미진진하고 중요한 시기이다. 당시 중국 내에서는 방대한 규모의 반(反)기독교운동이 일어나서 교회의 신앙과 생활에 대해 비판과 공격을 가하였으며, 교회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중국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격렬한 기세로 몰아치는 반기독교 풍조에 과감히 맞서 호교(護敎)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책의 목적은 20년대 반기독교운동의 물결 속에서 중국교회가 취한 움직임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함으로써 오늘날 화인교회가 토착화 신학의 연구 사업에 종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데 있다. 이 연구는 1920년대 근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반기독교운동의 도전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회의 반응(대응)을 역사학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반기독교 활동들은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당(唐)왕조(대략 서기 845년경)에서의 기독교 박해, 명(明)조정에서의 학자들과 관료들에 의한 예수회 반대, 청(淸) 초기에 일어났던 전례논쟁(典禮論爭) 기간의 정통성 다툼, 그리고 19세기의 반(反)외세주의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중국 인민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이 적대적인 대접을 받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1900년을 전후로 하여 반기독교운동에는 그 범위와 본성에서 이전의 그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발생한다. 즉 그 이전에는 기독교가 중국 전통 문화의 관점으로부터 반대되었다고 한다면, 1920년대에는 서구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부터 반대되었다. 1900년 이전에는 기독교는 충분히 유교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졌다면, 1900년 이후에는 사회의 빠른 서구화 진행과 양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근대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졌다. 20년대 기간 동안,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공동체는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거국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공화국이 설립된 초기에, 중국은 다양한 지적인 흐름들과 정치적인 어려움들 한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었다. 오사운동(五四運動, 대략 1917∼1923)은 서구 사상들이 시장에 범람하여 들어오면서 유교(儒敎)가 가차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지적인 전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파리평화회의에서의 산동(山東) 문제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해결은 민족주의적 정서의 분출에로 이끌었으며, 그것은 1925년 5월 30일의 호안참극(滬案慘劇)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군벌 세력과 제국주의는 젊은 중국의 두 적(敵)이 되었다. 국민당(國民黨)이 공산주의자들과 명목상 협력하면서 이끌었던 북벌(北伐)의 성공은 중국 인민들에게 새로운 날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감정은 국민당이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당의 지배를 강화하면서 복잡해졌다. 이러한 정치적인 불안정, 사회적인 격변들, 그리고 다양한 지적인 흐름들을 배경으로 하여 반기독교운동이 등장하였다. 반기독교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1922년 세계기독교학생동맹(世界基督敎學生同盟)이 그해 4월에 북경(北京) 근교의 청화대학(淸華大學)에서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중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에 대해 반대하는, 감정에 가득 찬 캠페인이 연쇄적으로 반응하여 일어나도록 불을 붙였다.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도구이며 나라를 팔아먹는 앞잡이라고 공격하는 시위들, 연설들과 전문(電文)들, 그리고 소책자들이 만들어져 배포되었다. 정치적인 파당들의 지원을 받아서, 기독교 학교에서는 많은 학조(學潮, 학생파업)들이 일어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정부가 미션스쿨들로부터 교육 특권을 회수해간 것은 서구 문화의 전파매체로서의 그리고 종교적 포교의 수단으로서의 기독교 교육의 지위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반기독교 세력의 힘은 기독교운동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한 가능성의 증거는 1927년 3월 남경(南京)사건 이후에 외국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난 것에서 확인되었다. 중국교회는 혼란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메시지의 생존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중국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토착의 지도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변증을 제출하였으며, 동시에 신학상의 반성을 진행하였고, 중국 문제에 대해 기독교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들의 노력의 결과, 적지 않은 토착화 신학의 저작들이 탄생되었다. 그들의 노력의 성공 여부는 조심스럽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필자가 수행한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최근의 선교학적 개념인 신학의 ‘토착화(indigenization)’ 혹은 ‘맥락화(contextualization)’에 의해 자극받은 필자의 개인적 호기심에 그 동기를 가지고 있다. 중국교회는 반기독교 논리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대해 어떤 방식의 변론을 하였던 것인가? 그 이름에 값하는 어떤 ‘상황화한 신학’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는가? 이 들끓어 오르던 시기에 있었던 기독교의 활동들에 대해서는 중국 기독교 선교사(宣敎史)의 다른 시기에 비해 아직 자세하게 분석 연구된 바가 없다. 다만 1920년대의 반기독교 활동 자체는 중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그 전제와 방법의 다양성(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통된 관심은 교회에 대해 반기독교 지식인들과 정부에 의해 취해진 행동들에 집중되어 있다. 아직 반기독교의 공격에 대한 기독교 측의 반응을 포괄적으로 다룬 연구는 없다.1) 이 연구가 지금까지 자주 무시되어 온 근대 중국의 지적이고 종교적인 활동들의 한 부면을 채워줄 것을 기대한다. 이 책의 구성은 그 시기 물어졌던 여러 가지 연관된 질문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 번째 장은 중국에서 과학과 민주가 유행하던 시기의 종교 자체에 대해 다룬다. 종교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이 당시 민족(the nation, 국가)의 시급한 필요들과 관련해서 분석된다. 기독교는 근대 중국에 적합한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격동기에 처한 민족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생명력 있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은 기독교인들과 반기독교인들 사이의 대화를 다룰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행위와 관련하여 당시의 주요한 호교적 메시지가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일종의 토착화 복음의 주요 내용을 서술할 것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그 당시의 문화적 위기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다. 오사운동 후 중국 문화의 특색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지식인들이 관심을 기울인 문제였다. 기독교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하게 제시하기 위해 중국 기독교인들은 중국 전통의 맥락 속에서 신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들의 노력들로 말미암아 다양한 형태의 토착적 신학이 발생하였다. 20년대 기독교회의 토착화 운동은 크게 말하자면 민족주의2)의 도전에 대한 반응(대응)이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관점 모두로부터 기독교는 제국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았다. 네 번째 장은 반기독교운동이 중국교회에 미친 다양한 영향들에 대해 연구할 것이며, 다섯 번째 장은 매국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기독교가 제시한 답변을 살펴볼 것이다. 이들 여러 장들에서의 토론으로부터 우리는 1920년대 중국교회들이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여 분투하는 가운데 어떤 기독교 변증론, 토착적이면서도 그 근원과 적용 모두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이 당대의 문제들에 맞섰던 그러한 기독교 변증론(辨證論, 護敎神學)이 등장하였음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시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판단내리기 어렵지만 그들의 노력 자체는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우리가 중국 신학과 교회의 노선을 연구할 때, 과거의 교회의 역사를 깊이 있고 신중하게 검토함으로써 교훈을 얻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20년대 중국교회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미주 1) 예를 들어, Kiang Wen-han, The Chinese Student Movement (New York: King's Crown Press, 1948), pp.60-68, 87-95 ; Tatsuro & Sumiko Yamamoto, "The Anti-Christian Movement in China, 1922-1927", Far Eastern Quarterly (February 1953): 133-147 ; Chow Tse-tsung, The May Forth Movemen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0), pp.314-327 ; Paul A. Cohen, "The Anti-Christian Tradition in China", Journal of Asian Studies 20.2 (February 1961): 169-181 ; Joseph R.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A Trilogy (Berkeley & Los Angel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pp.117-124 ; 그리고 Yip Ka-che, "The Anti Christian Movement in China, 1922-1927,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xperience of Protestant Missions" (Ph.D.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1970) 등이 있다. 2) 영어판의 'Nationalism'에 대해 중국어판에서는 ‘국가주의(國家主義)’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의 통상의 용법에 따라 ‘민족주의(民族主義)’로 옮겼다.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