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주>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월을 맞아, 김현석(金炫奭) 시인의 ‘유월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시의 뒷부분에 “오월의 푸르름이/돌담으로 이어져/유월에 피어나는 꽃들이/네게로 향해 눈웃음치는 유월유월에는 정말/우리들의 마음 밭에/사랑의 숲이/가득 우거졌으면 좋겠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발행인 통신’을 쓸 준비를 하고 있어서인지 마지막 연을 이렇게 고쳐서 읽고 싶어졌습니다.
유월에는 정말 저 넓은 중국대륙에 사랑의 숲이 가득 우거졌으면 좋겠다 중국 사역의 방략(方略)은? 유월에는 6․25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유월이 되면 ‘상기하자 6․25’, 이런 구호를 많이 들을 수 있었지요. 우문(愚問)이고,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6․25를 생각할 때마다 ‘만일 그때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고는 합니다. 임진각을 비롯하여 분단과 관계있는 장소에 가보면 중국관광객들이 많이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데요, <중주> 가족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인해전술을 글자 그대로 풀면 ‘싸울 때 사람이 바닷물 같이 몰려드는 전술’이 되겠는데요, 백과사전을 찾아보니까 “병력 제한이 없는 군대가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피해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파상적인 공격으로 수적으로 압도하는 돌파, 포위, 침투를 병행한 전법. 즉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수많은 돌파구를 형성 침입하여 방어 지역을 분단, 고립시키는 일종의 ‘제파공격(梯波攻擊, Echelon Attack)전법’이라고 잘 풀이되어 있습니다. 마오쩌동(毛澤東)은, 한국전쟁 이전, 국공내전이나 중일전쟁 때, 적은 병력으로 적과 싸울 때는 저 유명한 16자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16자 전법은 ‘적이 진격하면 아군은 후퇴한다, 적이 정지하면 아군은 교란시킨다, 적이 피로하면 아군은 적을 친다, 적이 후퇴하면 아군은 추격한다(敵進我退, 敵據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16자 전법의 원형은 저 유명한 <손자병법>에 있다고 하는 데요, 이런 것들을 살펴보면 ‘중국은 전법이 참 많은 나라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중국 사역을 위해 우리는 어떤 방략(方略)을 써야 할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앞에서는 ‘전술’, ‘전법’, ‘병법’ 이와 같은 말들이 나왔는데, 여기에서 ‘방략’이라는 말을 쓴 것은 선교, 특히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고 교회를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수단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선교에 대해 말할 때는 전쟁과 관련된 용어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도방략’입니다. 빈민운동을 하는 목사님이 도시빈민들을 이끌고 간석지(干潟地)에 이주해서 농사를 짓는데, 모두들, 간석지에는 염분이 많아서 두어 해 있어야 농사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해서 당장 벼를 심었는데 가을에 많은 쌀을 수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농촌지도소 직원이 그것을 보고 ‘도대체 어떤 농법(農法)을 썼느냐?’ 하고 묻기에 “예, 기도농법을 썼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직원이 진지한 얼굴로 메모를 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전술 위에 있는 것이 기도방략입니다.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우러러 보세요 ‘지금은 제2의 문화대혁명시기라고 할 만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중국 당국의 기독교에 대한 조치들이 그만큼 엄중하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 창세기 15장을 <중주> 독자 여러분과 같이 읽어 보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내가 너로 한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하는 약속을 믿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아브라함이 겪은 것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하는 굴욕(창 12:10~26), 조카 롯과의 갈등(창 13:1~13), 그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한 싸움(창 13:11~16) 등, 힘든 일들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포기하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15:2~3). 하나님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고 하셨지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셨습니다. 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5:5). 우리는 중국복음화의 꿈을 품고 현장에서, 있는 그 자리에서, 여러 분야에서, 여러 형태로 힘쓰며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여러 형편은 밤과 같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다가 비자발적 출국을 당한 분들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장막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어두움을 볼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뭇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뭇별과 같은 중국의 형제자매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6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로마서 1장 17절 후반부에, ‘개신교 신앙의 등뼈’라고 알려진 이신칭의(以信稱義), 또는 이신득구(以信得救)를 가르치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박국서 2장 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이나 바울 훨씬 이전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렇게 믿음의 모범을 보였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는 아름다운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중국복음화의 환상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다시 헌 번, 새롭게, 그리고 확신합시다! <중주> 가족 여러분, 밖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세요. 뭇별을 바라보세요. 뭇별만큼이나 많은 중국의 영혼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조용히 무릎을 꿇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중국 정부의 박해로 중국 기독교인들이 자유가 보장되는 케냐로 이주하고”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홍콩의 중국반환을 앞두고 홍콩 주민들이 캐나다의 밴쿠버로 많이 이주해서 ‘밴쿠버는 홍쿠버’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는데 이제는 케냐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중국교회와 중국 성도들의 현상황, 이들의 중국 안에서와 밖에서의 움직임이 궁급해졌습니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기획기사를 이번 호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호부터 문석윤 교수님(경희대 철학과)이 번역한,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글을 <중국선교 이해하기> 섹션의 <오늘의 중국교회> 코너에 연재합니다. 문 교수님은 꽤 오래전, 1990년대 초에 중국복음선교회의 왕쓰웨 목사님의 소개로 우리 선교회를 알게 된 분이십니다. 그때 저희 선교회에서 ‘유교와 기독교’에 관련해서 발표를 한 인연이 있기도 합니다. 문 교수님은 한국유학을 깊이 연구하셨는데 우리 중국어문선교회가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을 때 같은 건물에 있는 퇴계학연구원을 정기적으로 오셨고, 저희 선교회 방문도 하셨습니다. 이 귀한 글이 <중주>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으며 문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자, 밤하늘의 뭇별을 바라보며, 우리를 이 일에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손을 잡고 함께 힘차게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
사진 | https://pixabay.com/ 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 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