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에르.jpg) 이어지는 중국선교 열정 프란시코 사비에르 생전에 아시아로부터 유럽 청년 대학생들에게 극동선교를 호소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켰던 주장들은 로마와 포르투갈, 파리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영향력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선교 모델이 되었으며, 유럽선교사들은 사비에르와 같이 극동이나 중국으로 가서 선교하는 것을 생애 최대의 사명으로 희망하였다. 포르투갈 국적 예수회 선교사 알메이다(麥安東, Antoine d' Almeyda)는, “당시 내 마음속에 포르투갈을 떠나서 내 주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열어 원방으로 선교하려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비록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관계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가 중국에 이르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바라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매우 벅찬 희망을 갖고 선교구의 문턱에 서 있다.”1)라고 한 바 있다.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롱고바르디(龍華民, Nicolas Longobardi)는 선교지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자, “그곳은 모두가 크게 사모하고 있는 곳이고 동방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뛰어난 곳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위대한 사비에르 신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그가 전심전력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 마침내 죽음으로서 보상을 받은 곳이다. 그의 목적이 어디 있었는가? 즉 방법만 있으면 장벽을 뛰어넘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수양이 뛰어난 그 신부님(사비에르)의 이상을 완성하여” 중국 황제와 그 신하와 백성을 교화시키려고 한 뜻을 반드시 계승하겠다고 말했다.2) 사비에르가 순교한 뒤 30년 동안 그 뒤를 이어 중국으로 들어가려는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데에르뉴(榮振華, Joseph Dehergne)의 통계에서는, “1552년부터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도착한 1583년까지 모두 예수회 선교사 32명,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24명, 아우구스티누스회 2명, 도미니크회 선교사 1명이 중국에 정주하려고 시도했다.”3) 마테오 리치는 회고록에서, “경건하고 두터운 품덕과 학식을 갖춘 프란시스코·도미니크 두 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사비에르 사후에도 이번 기독교 중국 원정을 성사시키려고 힘썼다. 사비에르의 형제들은 그가 남겨 준 유산을 포기하지 않았다.”4)라고 기록하고 있다. 각 선교회들은 강열한 경쟁 의식을 자극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회로 하여금 계속 정예 선교사를 파송해 사비에르가 못다 이룬 선교 사역을 계승하게 만든 일면도 있다. 사비에르의 뒤를 이은 발걸음들 사비에르 사후 가장 먼저 중국에 온 선교사는 알카소바(Pierre d'Alcazova)였다. 1553년 10월 사역지 일본으로부터 인도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는 상천도(上川島)에 상륙하여 7∼8일 동안 머물면서 사비에르의 무덤을 지켰다. 일본 교구회장 후임으로 온 포르투갈인 바래또(巴萊多, Melenior Nunez Barreto)는 사비에르를 본받아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직접 일본과 중국을 내왕했다. 1555년 일본으로 부임하던 도중에 광주(廣州)항에서 2개월 동안 머물 때, 중국 당국에 의해 감금된 포르투갈인 3명과 기독교인 3명이 있음을 듣고 이들을 출옥시키려고 전심전력을 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를 위해 그는 중국 입국도 시도한 바 있다. 바래또가 떠나야 할 때가 되자 동행하고 있던 고에즈(戈玆, Etienne de Goez) 선교사를 중국에 남게 하여 중국어를 배우도록 지시했다. 고에즈는 무리한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아쉽게도 반년 뒤에 중국을 떠나 인도 고아(Goa)로 복귀하였다.5) 1562년 4월 포르투갈 신임 국왕은 인도 총독에 사비에르의 절친한 친구인 페레이라(皮來拉, Diego Pereira)를 사절로 임명하고, 예수회 선교사 페레즈(培萊思, Francois Perez) 등을 중국에 사절단으로 보냈다. 사절단은 광주를 향해 고아를 떠난 뒤 1563년(明 嘉靖 42년) 7월 26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중국인들이 그들을 의심하여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고, 2년 동안 이어진 중국 내지로 들어가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듬해 페레즈가 다시 내지로 들어가기 위해 1565년 11월 21일 광주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포르투갈어로 된 2통의 상소문을 중국 관리에게 올렸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소개한 뒤 중국에 온 목적은 다름 아닌 중국에 거주하고 싶은 바람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관례대로 외국인의 중국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 페레즈는 계속 인도성 교회장의 훈령을 집행하기 위해 마카오에 장기 거주할 숙소를 건립하여 일본을 오가는 중간 거류지로 사용하기로 했으며, 적절한 기회를 얻게 되면 중국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1565년 페레즈 일행이 처음 마카오에 건립한 조그마한 거처는 곧 학교로 개조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마카오에서 가장 유명한 성 바오로 학원의 전신이다.6) 이후 포르투갈 국적 예수회 선교사인 리베이라(黎伯臘, Jean Baptiste Ribeyra)와 리에라(黎耶臘, Pierre Bonaventure Riera)가 예수회 총장의 명에 따라 중국 내지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명 융경(隆慶) 원년(1567) 마카오에 이르러 중국 당국에 광주성으로의 진입 허락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리베이라는 곧 변복을 하고 중국인 선주를 매수하여 야밤을 틈타 몰래 중국 내지로 진입하고자 했다. 이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리베이라는 마카오선교사로서 감금되는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7) 1567년 포르투갈인 카네이로(加奈羅, Mgr Melchior Carneiro)가 교황에 의해 중국과 일본 교구의 초대 주교로 선임되어 그해 고아에서 마카오로 옮기고 방대한 극동 교구를 관리하게 되었다. 1576년 그는 광주 법정에 직접 출두해 입교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수감된 젊은 중국인 수도자를 변호하여 석방시켰다. 그는 마카오에서 병원과 수용소를 건립하고 예수회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강화시켰다.8)
사비에르 사후 20여 년 동안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선교하려는 열정이 매우 간절했다.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조직 기구를 발전시키고 특히 인도성 교구에서 중국과 일본을 개척하려고 주교를 마카오에 임명하는 배치하는 동시에 마카오를 극동선교의 중간 거점과 선교 중심지 그리고 중국 연안으로 진입할 기지로 적극 활용하려고 했다. 예수회는 학교, 성당, 병원, 수용소를 세웠고, 이를 통해 마카오에서 영향력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언어 학습을 통한 선교 준비를 강화하고, 공식 사절단을 파견하여 중국 당국에 공개적인 선교 문호 개방을 위한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국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밀항 등을 통한 중국 내륙으로 진입과 선교 영역의 확대를 지향하였다.
미주 1)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 附錄, p.479. 2)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 p.517. 3) [프]榮振華 著, 耿昇 譯, 〈大事年表〉(《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補編》 下冊), p.794. 4) 何高濟 等譯,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p.139. 5)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巴菜多〉(《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北京: 中華書局, 1995), p.11. 6)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培菜思〉(《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pp.14∼16. 7) [프]裴化行 著, 蕭濬華 譯, 《天主敎十六世紀在華傳敎志》(上海: 商務印書館, 1936), pp.114∼115. 8) 裴化行 著, 蕭濬華 譯, 《天主敎十六世紀在華傳敎志》, pp.130∼131;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加奈羅〉(《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p.19.
사진 | https://blog.naver.com/mshmsc/220192715513 (2019년 2월 3일 열어봄).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